2차대전 항공전사 유럽편의 참고문헌/루프트바페의 부활

불량감자 2011. 5. 12. 23:52
꺽이지 않는 하늘에 대한 믿음과 열정

 
[사진] 일차대전 직후 독일군 참모총장을 지낸 한스 폰 지크트 장군의 모습.. 히틀러 집권 전인 1920년대는 이사람에 의해 독일 공군 부활의 기틀이 마련된다. 창공의 선지자 중 하나였다.
 
1919년 일차대전 종전 직후 체결된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전범국 독일은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무엇보다도 군사적으로 무수히 많은 제약을 받아야만 했다. 거의 초토화 되다시피한 프랑스를 비롯한 다수의 연합국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기에, 독일인들은 대부분의 생산을 연합군에 갖다 바치고, 정작 자신들은 허리띠를 졸라메어야 하는 고난의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런 상황은 항공전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연합국은 독일의 날개를 완전히 꺽어 버리길 원했고, 독일 공군을 해체함과 동시에 2000 기에 달하던 군용기와 17000 개의 항공엔진을 압수했다. 베르사이유 조약의 198 항에서 202 항에 걸친 장대한 제한 조치는 독일이 앞으로 어떠한 군사적 목적의 항공기도 보유할 수 없음을 명시했으며, 항공기 부품의 무역 조차도 일체 금지토록 했으니, 이런 조치들은 독일 항공 산업을 아예 생매장시키겠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영공 자체를 연합군에게 내주는 굴욕적인 조항까지 포함되어 있어, 연합군 항공기라면 민간, 군용기를 불문하고 자유로이 독일 영공을 지나갈 수 있고, 또 독일 영토 어디에나 자유로이 이착륙이 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독일이 비록 일차대전의 패전국이었지만, 항공에 대한 내제된 열정 만큼은 어느 유럽국가에 뒤지지 않는 "항공 개념을 간직한 국가"였었다. 즉 일차대전 당시 뵐케, 이멜만, 리흐토펜, 우데트 등.... 수없이 많은 걸출한 에이스들을 배출해내고, 또 언제난 발빠른 항공 기술력을 선보인 저변에는 항공에 대한 국민 전반적인 열정과 지지 그리고 유별난 관심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연합국이 단행한 극약 처방은 독일의 마지막 남은 하늘에 대한 자존심 마저 완벽히 긁어 버린 것이었다.
 
[사진] 1920년대 합법이라는 틀 내에서 부활을 준비하는 독일의 단적인 예.... 전국의 소년 글라이더 클럽은 약 10 여년후 유럽 상공을 장악하게 될 항공 마인드를 가진 아이들을 길러냈다.
 
비록 일련의 제한 조치가 단행되었지만, 독일군 수뇌부는 항공력에 대한 식지 않는 열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1920년 독일 참모장이 된 한스 폰 지크트 (Hans von Seeckt) 장군은 육군 출신이었지만, 항공력의 잠재된 역량을 꿰뚫어 보고 있던 인물이었고, 언젠가는 다시 일어 설 공군을 위해 비밀리에 그 기틀을 마련해나가고 있었다. 그는 1924년부터 1차대전 항공전에서 터득한 전술적, 전략적 교훈을 분석하는 위원회를 만들어 항공전력의 역할에 대한 연구를 지속케 했다. 한스 폰 지크트가 강조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바로 "항공전력의 가능성을 가슴에 품은 육군 양성"이었던 것이다.
 
또 베르사이유 조약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또 대외적으로 합법적인 절차를 밟으면서도 훗날을  준비하는 대책을 강구하게 된다. 즉 1920년부터  독일 항공 스포츠 클럽(Deutscher Luftsportserband)을 발족해 대대적인 항공 열풍 몰이에 나섰다. 이곳을 구심점으로 전국적으로 소년 글라이더 클럽을 활성화해 나가, 1929년 말까지 소년 항공 동호인은 5 만 명에 달하게 된다. 이들은 유년기부터 단독비행의 맛을 알게 되었으며, 비행 감각과 창공에 대한 도전정신으로 충만하게 되었고,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바로 10 년후 유럽 상공을 완벽히 장악하는 주인공으로 성장하게 된다. 또 1922년부터  베르사이유 조약이 다소 완화되어 소형 민간 항공기 제작이 가능해지면서, 1926년 독일 민항 루프트한자(Lufthansa)가 합법화 되었다. 독일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루프트한자를 구심점으로 미래 공군 육성을 위한 비행시험과 기술적인 축적에 매진했다. 루프트한자는 예하에 4개의 비행 훈련 학교를 두었고, 언제든 군용기 조종사로 돌변할 수 있는, 민항 조종사를 배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천적의 뱃속에서 잉태된 루프트바페
   - 독일 공군의 산실, 소련의 리페트스크 (Lipetsk) -

 
[사진] 소련 리페트스크 상공을 비행 중인 포커 D XIII 전투기의 모습.... 베르사이유 조약의 눈을 피해 독일이 벌인 도박에 가까운 모험이기도 했다.
 
또 일부 독일 조종사들은 서방측의 눈을 피해 소련으로 옮겨가, 비밀리에 군용기 탑승 훈련을 받기도 했다. 당시 소련의 입장에서 보자면, 1924년 레닌이 사망하면서 그의 뒤를 이을 정적들간의 치열한 다툼이 계속되었고, 결국 스탈린이 집권했지만, 숙청과정을 통해 다수의 고급 장교들이 죽어갔고, 이런 군의 질적인 저하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또 발틱해 연안의 소수 주정부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이 혼란한 중앙정부의 틈새를 이용해 독립을 요구하는 등 분열의 양상까지 보이고 있었다. 소련은 이런 혼란을 막아내기 위해 좀 더 강력한 군을 원하게 되지만, 후진 농업국인 지금의 상황에서 소련군을 현대화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물론 1920년말 부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공업국으로 성장해 나가기는 했지만, 1920년 초반만해도 가시화된 군비의 현대화는 어려웠고, 그나마 전술이나 군사 개념에서라도 현대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소련의 바램과 베르사이유 조약의 눈을 가리고 군을 육성하려는 독일의 소망이 잘 들어맞은 것이다. 독일은 소련과의 밀약을 통해, 소련은 독일에 군사 훈련 기지와 군사적 가치가 있는 자원을 제공해주는 대신, 독일은 공업 기술력과 현대 전술의 개념을 소련에 제공하기로 비밀리에 협상을 끝냈다. 또 소련의 장교 일부를 독일에 초청해 진보적인 군사훈련에 동참할 기회를 주기로 했다. 한마디로 소련이 훈련용 땅덩이와 1차산업에 해당하는 재료인 하드웨어를, 독일은 그것을 운용하는 방법인 소프트웨어를 서로간에 교환한 것이다. 육군의 상징 전차, 대구경 야포, 잠수함의 시험 생산이 소련으로 옮겨간 독일 생산공장에서 이루어졌고, 융커스, 알바트로스 항공사도 소련에 생산기지를 제공받았다. 이런 군용 생산 기지 뿐 아니라 모스코바에서 남쪽으로 약 230 마일 거리에 있는 리페트스크(Lipetsk)에 군용기 비밀 훈련소를 세울 수 있었다. 1925년부터 히틀러가 집권하는 1933년까지 이곳을 통해 배출된 인원은 조종사 120명을 비롯해 약 300 여명 정도로 소규모에 불과했지만, 훗날 루프트바페 수뇌부의 핵심 실무자들이 된다. 이들 대부분은 이미 조종사 면허를 취득한 인원들로 이곳에서는 주로 전술 기동에 촛점을 맞춘 실전 훈련을 받았으니, 지금의 공군 사관 학교 같은 엘리트 양성소 개념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1차대전 독일 전투기 대부분을 설계한 네덜란드 항공기술자 안쏘니 포커(Anthony Fokker)의 도움으로 세계 속도 기록을 갱신한 바 있는 뛰어난 복엽 단좌 전투기 포커 D XIII,  50 여 기가 본격적인 훈련기로 지정되었으며, 이 전투기를 이용해 고난이도의 공중전 기동술, 지상 호위 전술 훈련이 이루어졌다. 훗날 이들은 리페트스크의 경험을 토대로 항공 전술 책자를 다수 발간했고, 이것은 일선 조종사 교육의 바이블이 되어, 현대적인 공중전 개념의 보편화에 최일선에 서기도 했다. 또 리페트스크는 인력이라는 소프트웨어 뿐 아니라, 공군의 하드웨어에 해당하는 신예 항공기들의 시험 비행장으로도 운용되었다. Do-11 폭격기, He 28,  He 45, Arado 64/65 전투기 등이 이곳에서 성능시험에 들어갔고, 융커스 항공사의 전금속제 2인승 전투기인 Ju K 47기도 이곳에서 첫 선을 보인 것이다. 이 항공기는 실험적인 급강하기로도 쓰여 훗날 Ju 87 수투카의 원본이 되는 중요도가 매우 높은 항공기였다.
 
 File:Bundesarchiv Bild 146-0908-500, Flugzeug Junkers A 48.jpg
 
[사진] Junkers K 47 전투기...  전금속제 2인승 전투기로 급강하 기동에도 탁월해, 훗날 Ju 87 수투카의 원본이 된다.
 
 
또 폭격기 조준기와 고폭탄 등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금지된 많은 군사적 시도가 이루어졌으니, 리페트스크는 1920년대 독일 공군의 산실이었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리고 재밌는 것은 훗날 서로간에 일전을 치러야만 하는 천적인 독일과 소련 입장에서 보면, 리페트스크는 너무도 아이러니컬한 밀약이라 말해야겠다. 리페트스크를 통해 양측은 서로간에 어느정도의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나? 지리적 여건을 마련해 준 소련도 독일의 비밀 훈련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볼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현대적 항공 전술에 눈을 뜨기 시작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시기에 독일로 부터 전수받은 기술력으로 훗날 팬저에 버금가는 소련제 전차를 생산할 기반을 조성했고, 또 Fw 190이나 Bf 109 에 비견할 소련산 전투기 생산의 기틀이 되었음에 틀림없었다. 리페트스크의 인연 후 소련과 독일은 스페인 내전을 통해 서로의 탐색전을 거치게 되고, 드디어 1941년, 하늘이 낸 천적 답게 생사를 건 혈전을 벌이게 될 운명의 라이벌로 성장해 나가게 된 것이다. 물론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되지만.....
 
 
 
 
구름처럼 몰려드는 신생공군의 대들보들

 
[사진] 독일 공군 총 사령관 괴링.... 매우 즉흥적이고, 감정적인데다가,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은 뛰어난 편은 결코 아니었으나, 루프트바페 건군 초에는 탁월한 카리스마로 얼굴마담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냈다.
 
공군 부활을 위해 암암리에 행해지던 물밑 작업은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완전히 수면위로 떠오르게 된다. 히틀러는 국외적으로 베르사이유조약의 무효를 주장했으며, 국내적으로는 경제를 살리면서, 재무장을 선언했다. 일차대전 당시 연합군 항공력에 비해 숫적인 열세를 보이기는 했지만, 질적으로 언제나 한발씩 앞서 나가던 독일 공군도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묶여 있던 양 날개를 다시 펴기 시작한 것이다. 히틀러 집권 초기부터 오른팔 역할을 담당해 온 헤르만 괴링은 히틀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정열적으로 루프트바페의 재건을 위해 힘썼다.
 
우선 괴링은 한스 위르겐 슈툼프(Hans Jurgen Stumpf) 대령에게 부족한 공군 장교를 영입하는 방안을 모색케 했다.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전군의 독일 장교는 4000 명 선에 불과했고, 재무장 선언은 했지만 아직도 고급 인력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슈툼프는 가능한 모든 분야를 총망라해 루프트바페의 대들보가 될 두뇌를 영입하기 시작했다. 융커스 항공사나 하인켈 항공사의 기술진을 루프트바페의 기술 참모로 앉히는가 하면, 민항 조종사 출신과 비행교관들, 심지어 경찰 간부들 중에서 우수한 인재를 영입하기도 했지만, 역시 대부분은 육군 현역 장교들과 일차대전 조종사 출신을 통해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1차대전 붉은 남작의 사촌 동생이며 조종사 출신의 볼프람 폰 리흐토펜(Wolfram von Richtofen), 한스 제쇼넥(Hans Jeschonnek)... 육군의 총망받던 지략가 발터 베버(Walter Wever), 알베르트 케셀링(Albert Kesselring), 휴고 슈페를(Hugo Sperrle), 헬무트 빌버그(Helmuth Wilberg), 파울 다이히만(Paul Deichmann) 등등..... 이때만 해도 괴링은 훗날 타락한 군인의 대표격이던 모습은 아직 아니었고, 그를 따르는 역량있는 많은 지도자들이 카리스마 넘치는 괴링의 주위에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 실질적인 루프트바페 부활의 주역.. 발터 베버 장군... 그는 전술, 전략 폭격 공히 추구한 지략가이며, 완벽에 가까운 행정가이며, 융합하는 완충자였다. 또 괴링이 얼굴 마담이었다면, 베버는 실질적인 총지휘자였다.
 
이중 가장 큰 수확이라면 역시 46세의 젊은 천재 발터 베버 장군의 영입이었다. 베버는 일차대전 당시 독일의 마지막 총공세를 입안했던 참모 출신으로, 매우 매력적인 성품에 하부의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알면서도, 상부와 마찰을 줄이며 자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지략가이며, 지장이었다. 루프트바페로 옮기기 전 육군에서 그의 마지막 직책은 훈련 참모였는데, 베버의 전임자가 바로 훗날 육군 참모총장이 되는 발터 폰 브라우히치(Walter von Brauchitsch) 장군이었다. 또 결과적으로는 베버가 공군 참모총장으로 영입되었지만, 베버와 함께 마지막까지 공군 참모총장의 인선에 오른 인물이 바로 훗날 아르덴느 돌파작전을 입안한 지장 에이리히 만슈타인 (Erich Manstein) 장군이었었다. 이것만 봐도 베버의 역량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나? 또 당시 독일이 얼마나 신생 공군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지 않나? 당시 군내에서는 베버가 육군에 남아 있었더라도 수년내 육군 최고의 직책에 올랐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1933년 공군 참모총장이 된 베버가 우선적으로 실천한 것은 흥미롭게도 "자습"이었다. 즉 베버는 "모르는 자는 지휘할 수는 없다"라는 철저한 자기 관리에 충실한 인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베버는 항공 관련 서적과 문헌에 파묻혀 장시간을 보내곤 했다고 하는데, 이런 공부하는 지휘관으로의 모습을 떠나, 베버가 뛰어난 천재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 많은 문헌 중 옥석을 가려내는 혜안과 판단력 때문일 것이다. 또 베버는 공군으로 옮겨 오면서, 조종 훈련까지 받게 된다. 이것은 독일군의 전통인 "직접 체험해 보지 않은 자는 임무 성격을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역량있는 지휘관이 될 수도 없다"는 실전적이며 경험 우선적인 지도자 육성 정책의 한 단면이기도 했다. 즉 조종사들이 어떻게 비행하고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는지 알아야, 불가능한 임무와 실현가능한 임무 구별이 가능케되고, 궁극적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지도력과 작전을 창안할 수 있다는 매우 현명한 전통이었던 것이다. 얼마후 베버는 조종사 면허증을 취득하기에 이른다.
 
 
 
 
하늘을 내다 본 천재

 
1933년부터 1936년 베버가 사망하기까지의 기간은 루프트바페 재건의 가장 중요한 시기였고, 이 당시 베버가 괴링 다음으로 공군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된 것은 루프트바페에게는 하나의 행운이었다. 베버의 머리와 손에 의해 훗날 서유럽을 석권할 루프트바페의 틀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1930년대 베버의 역량과 예견은 대단했으며, 단 4년이라는 기간 동안 무수히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된다. 그럼 지금부터 그의 업적을 살려보자.
 
[사진] 이랕리아 군사가이며 전략 폭격의 아버지라 불리는 쥴리오 듀헤트.... 그는 적 도시 집중 공격으로써 적성국 국민의 사기를 꺾어 버리는 것이 공군 제 1의 목적이라 역설했다. 그의 주장은 일견 옳았으나, 일견은 틀렸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베버는 1900년대 초 이탈리아의 군사가인 쥴리오 듀헤트(Giulio Douhet... "제공권"이라는 저서를 남겼는데, 우리나라에도 현재 출판되어 있다.)의 선견지명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미래의 전쟁에서는 공군의 전략 폭격이 전세를 좌우할 것이라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그는 현재 독일 공군의 최대 약점은 전략 폭격기의 부족이라는 것을 꼬집었고, 4발 엔진 중폭격기 사업을 소신있게 밀어 붙였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루프트바페 지휘부 중 유일무이하게 베버만이 4발 엔진 중폭격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실천에 옮긴것으로 또 반대로 당시 루프트바페 지휘부 대부분은 그 중요도를 간과하여 반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아니다"가 정답이다.
 
즉 일차대전과 이차대전 사이 유럽과 미국 공군 모두 (사실 당시 공군을 따로 떼어내 독립시킨 나라는 소수였는데, 여기서는 편의상 항공전력을 공군으로 표현하기로 하겠다.) 폭격기를 최우선의 목표로 잡고 있었고, 독일 공군의 전반적인 흐름 역시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거함거포의 전함이 해군의 표상과 상징이었듯, 당시 공군에서는 중폭격기(Heavy Bomber)가 전함과 비슷한 하나의 목표이자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바로 여겨지고 있었다. 즉 공격적인 공군이 되기위해서는 폭격기는 필수였고, 전투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방어적 공군의 한 단면이라는 생각이 주류를 이루었다. 더구나 엔진 기술의 급진보로 빠른 속도의 폭격기들이 등장하면서, 호위 전투기 없이도 폭격이 가능하다는 폭격기 맹신론까지 생겨날 정도로 폭격기는 이미 공군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물론 "호위기 없는 폭격기 단독 공격"이라는 가정이 이차대전을 통해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나지만, 1930년대만해도 전세계적인 공군의 큰 흐름에서 폭격기가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며, 독일 공군 수뇌부 대부분도 마찬가지 인식을 갖고 있었다. 즉 베버가 중심이 되었을 뿐이지 중폭격기 사업은 독일 공군에게도 궁극적인 목적이었던 것이다. 즉 베버 이외에도 대표적으로 당시 독일 항공기 기술 개발국장 빌헬름 빔머, 또 볼프람 리흐토펜 등은 소신을 가지고 4발 엔진 중폭격기 사업에 지지를 보냈었다. 그리고 독일이 끝내 중폭격기 사업을 달성되지 못한 것은 그 중요도를 과소평가한 것이라기 보다는 당시 독일의 어려운 경제적, 기술적 여건과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부연키로 하겠다.
 
베버가 듀헤트의 견해를 많은 부분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두사람의 전략 폭격 개념은 공격 목표 선정이라는 측면에서 극명한 차이가 있었다. 즉 듀헤트는 전략 폭격의 공격 목표 제 1순위로 적의 대도시를 꼽았었다. 물론 적의 산업시설과 보급로에대한 폭격에도 중요성을 싣기는 했지만, 공군의 궁극적인 목표는 적 후방 대도시를 맹폭함으로써, 적성국 국민들의 사기를 꺽어 버리는 것이라 말했다. 또 공업도시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목적 역시, 생산 시설의 파괴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폭격을 피해 도시를 떠나게 만들기 위함이라 했으며, 이렇게만 되면 자연히 생산력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고, 제공권을 확보한 국가는 궁극적으로 단 몇 주내에 전쟁에서 승리할 것라는 것이 바로 듀헤트 주장의 골자였다. 여기에 구체적인 예까지 첨가했는데, 듀헤트는 10 여대의 폭격기로 반경 500 m의 공간을 초토화할 수 있으니, 만약 500 에서 1000 대의 폭격기만 가진다면, 아무리 큰 도시라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듀헤트의 주장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맹폭을 받은 도시는 전의를 잃고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절망하지만, 그 누구도 꺽을 수 없는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서고 만다는 사실을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즉 듀헤트가 전략 폭격의 중요성을 구체적으로 도출한 것은 매우 획기적인 사실이었지만, 그 공격 목표 선정에서는 바른 예견은 아니었다. 반면 베버의 예견은 매우 정확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베버는 전략 폭격의 목표로 적의 대도시가 아닌 공업시설에 촛점을 맞추었다. 그는 대도시 공격으로 적의 사기를 일시적으로 저하시킬 수는 있으나, 이것만으로는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으며, 대도시 대신 군수품 생산 시설을 초토화함으로써 전쟁 수행 능력을 격감시키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가지 재밌는 것은  우리가 흔히 베버하면 "전략 폭격"이라는 등식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베버는 전략 폭격 뿐 아니라, 전술 폭격에도 큰 비중을 두어, "근접 지상 호위 전술"을 강조했던, 매우 균형 잡힌 식견의 소유자였다는 것이다. 단지 독일의 패배의 중심에 4발 엔진 중폭격기의 부재가 있었고, 베버가 또 그 중심에 있었으니, 베버 하면 "전략 폭격" 이외에는 생각나지 않게된 것일 뿐이다. 정확히 말해 베버는 전략 폭격과 전술 폭격을 균등히 나누어 어디에도 편중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음은 베버가 말한 공군의 목표인데, 훗날 공군간의 전쟁 영국의 항공전을 경험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곡을 찌른다.
 
(1) 공군이 해야할 첫 과업은 조기에 적의 항공력을 분쇄하는 것이다. 적의 비행장이 최우선 목표이며, 이후 항공기 생산시설을 파괴하고, 아군 지상군을 공격하는 적기를 요격한다.
(2) 적 지상군의 이동을 감시하는 정찰기를 투입하고, 그들의 이동로의 요소인 교량과 철도를 파괴함으로써, 보급의 장애를 유발시킨다.
(3) 아군 지상군 특히 중장갑 차량과 기계화 부대의 전진을 위해 진격로를 확보한다.
(4) 적의 군항을 공격하고, 아군의 군항을 공중 방어한다.
(5) 적의 전쟁 수행 능력을 마비시키기 위해, 적 후방 산업시설을 맹폭한다.
 
  File:DornierdoY.jpg
[사진] 도르니에 항공사의 초기 폭격기 Do-Y, 훗날 Do-13, Do-23의 원류가 된다.

 
[사진] 도르니에 항공사의 초기 폭격기 Do-11, 훗날 Do-17의 원류가 된다.
 
살펴보면 1번부터 4번까지는 전술 폭격의 개념이고, 마지막 5번이 전략 폭격의 개념이다. 이렇듯 베버는 두 종류의 폭격에 똑같은 중요도를 두었던 것이다. 그는 지상군에 대한 근접 호위를 위해 공군 전술 폭격기들은 "나르는 포병대"의 역할을 해야하며,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최전방 지상부대에 공군 장교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지상군이 진격 도중 적의 강력한 방어선을 만나게 되면, 공군이 투입되어야 하는데, 어떤 폭격기와 어떤 종류의 투하용 폭탄을 사용해야 되는지를 판단하는데 지상군 보다는 공군 장교가 훨씬 유리할 뿐 아니라, 이들이 휴대용 통신수단을 이용해 공군 비행대에 직접 지원을 요청한다면, 복잡한 중간과정을 줄여 시간과 불필요한 허가과정을 대폭 단축시킴으로써 전술 폭격의 효과를 극대화 할것이다.
 
또 베버는 공군 훈련은 단독으로 수행되어서는 안되며 반드시 지상군이 동참해야한다는 획기적인 주장까지 펼쳤고, 끝내 실천에 옮겼다. 이것은 근접 지원 전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실제 전장과 똑같은 상황을 직접 연출해야 한다는 그의 실증주의적인 신념에서 나온 판단이었다. 또 이것은 부수적으로 육공 합동 훈련에 참여한 많은 독일 지상군 장교들에게 항공전력의 개념을 일깨워 주었고, 그 잠재력에 대해 믿음을 가지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항공전력의 역량"을 이해하는 지상군을 만들어 나간 것이기도 했다. 당시 기갑 군단장이었던 오스발트 루츠(Oswald Lutz) 장군은 베버의 맹신자이기도 했다. 베버의 충고대로 자신의 병력을 훈련시키는데에 인근 루프트바페 비행단에 참여를 독려할 정도가 되었으며, 공군의 정찰 결과와 지원 공격에 적극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멋들어진 베버의 구상은 스페인 내전을 통해 결실을 맺었고, 이차대전 전격전에서 빛을 발하게 되니, 그의 일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미 전격전 개념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또 그의 예견에 따라 준비에 들어간 루프트바페는 몇년 후 전격전 신화의 선봉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베버가 강조한 지상군을 위한 강철 우산으로서의 공군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대공포 부대를 공군 예하에 두길 원했고, 1935년 초 부터 실행에 옮기면서, 20 mm, 30 mm 대공포와 88 mm 대공포의 생산에 박차를 가해 1936년에는 기존의 2배에 달하는 수준으로 급성장하게 된다. 이것은 주로 본토 방위의 목적으로 쓰려 한것인데,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전투기들은 최일선에서 활약해야 했고, 후방 영공 방위는 주로 대공포에 맡기려는 구상이기도 했다. 1930년대말 베버의 착실한 준비로 독일은 세계 제일의 대공 방위 역량을 간진한 국가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또 하나 두드러진 베버의 지상 지원 임무 계획은 낙하산 부대를 탄생시킨것이었다. 원래 이것은 소련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1933년 소련은 이미 소수의 낙하산 병을 양성하고 있었고, 1935년 들어 키에프 (Kiev) 등지에서 연대급의 강하병을 육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버는 이들의 가능성을 간파해 괴링에게 제안을 했고, 1935년 4월 드디어 그 유명한 일명 "강하 엽병" 낙하산 부대(Fallschirmjager)를 창설케 된다. 이것은 베버 사후인 훗날 1938년 7월 쿠르트 슈튜덴트(Kurt Student) 장군의 지휘를 받으며 9월 대대적인 낙하훈련을 거쳐 이차대전 초반 노르웨이 네덜란드와 벨기에 전투의 명성을 얻게되는 첫 시발이기도 했던 것이며, 그 첫 단추를 채운 이 역시 베버였던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베버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역시 4발 엔진 중폭격기 사업이었다. 물론 이것은 완성을 못본채 중도하차하고 마는 루프트바페의 잊혀진 꿈이 되고 말아, 훗날 독소전 패배의 큰 원인으로 작용케 된다. 그럼 다음 단원에서는 베버의 "우랄 폭격기 사업"에 대해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