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항공전사 유럽편의 참고문헌/루프트바페의 부활

불량감자 2011. 5. 12. 23:59

 

우랄 중폭격기 사업

 
[사진] 발터 베버가 시작한 4발 엔진 중폭격기 사업의 하나인 도르니에 항공사의 Do-19 중폭격기의 모습
 
베버는 전술폭격기로 Ju-88을 비롯한 쌍발 폭격기의 개발에 역점을 두면서도, 4발 엔진 중폭격기 생산을 독려했다. 발터 베버 장군이 추진한 4발 엔진 폭격기 사업은 일명 "우랄 폭격기(Ural bomber) 사업"이라고 불렸는데, 독일 굴지의 두 항공사에서 추진되었다. 즉 융커스 항공사의 Ju-89와 도르니에 항공사의 Do-19가 그 주인공이었다. 베버가 이 사업의 명칭을 "우랄 폭격기"로 명명한 것은 다분히 소련을 의식해서였다. 즉 그는 독일의 최종 목표가 소련과의 불가피한 일전이란 것을 꽤뚫어 보고 있었으며, 독일 동부에서 소련의 산업의 요충 우랄지방까지 왕복이 가능한 거대한 4발 엔진 중폭격기를 준비한 것이며, 영국의 본토는 물론 상대적으로 취약한 독일 해군을 위해 폭격기의 활동 범위를 대서양 전역으로 확대시킨 한마디로 원대한 꿈을 가졌던 것이다. 혹자는 이런 베버의 구상은 그가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을 읽은 후, 그 저서의 핵심인 소련과의 불가피한 일전을 간파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실은 그 보다는 베버의 원대한 전략 구상에서 자연적으로 도출된 결론이라 보는것이 더 설득력있다. 즉 히틀러의 주장을 떠나, 당시 독일이 상대해야 했던 유럽의 거인은 프랑스, 영국, 소련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들도 알고 있는 것이었고, 소련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숙명의 라이벌이란 것 역시 모르는 이가 없었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인지가 중요할 뿐, 한판 대결은 불가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이 중폭격기를 보유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는 1936년에 접어들면서, 난황을 격게 되는데 그 이유를 몇가지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베르사이유 조약에 묶여 근 10 년 이상을 대형 항공기 엔진 제작에서 손을 떼야 했으므로, 자연히 소형 항공기, 근거리용 항공기에 매진했던 독일 항공 생산력이 대용량 엔진 생산에서 한계에 부딪혔던 것이다. 흔히들 항공기술력의 진보와 항공전술과 개념의 진보는 서로의 업그레이드를 독려하는 상호의존적 관계라 말한다. 하나의 진보는 상대의 발전을 가져오는 촉매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독일 공군에서는 항공전술 개념의 진보에 항공기술력이 따라와 주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즉 베버 장군의 진보적인 구상을 엔진 기술력이 그만큼 충족시켜 주지 못한 상태였다. Do-19 폭격기의 엔진으로 훗날 Fw 190의 공냉식 엔진의 원조격인 BMW사의 엔진이 쓰였고, 또 Ju 89기의 엔진으로 다임러 벤쯔 DB 600A 엔진이 사용되었지만, 이들 원형기의 성능은 예상에 미치지 못하는 실망스러운 면을 보였던 것이다. 엔진의 파워가 만족스럽지 못했으니, 속도가 느렸을 뿐 아니라, 폭탄 적재량도 적었고, 기술적 고장이 잦았고, 이들의 생산 계획의 시작에 대한 타당성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4발 엔진 중폭격기 두 기종
(상) 도르니에 항공사의 Do-19
(하) 융커스 항공사의 Ju 89
 
 
그런데 재밌는 것은 미국의 B-17의 경우도 초기에는 비슷한 시련의 과정을 격었지만, 미국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10년간 지속적인 업그래이드를 추진해 끝내 하늘의 요새를 실전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해, 독일은 단 3년만에 포기하고 만 것인데, 그 이면을 보자면 당시만 해도 독일은 4발 엔진폭격기의 기술적인 초기 난점들을 극복할 만한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즉 4발 엔진기 한대 값이면, 전투기 4대는 만들어 내고, 쌍발 폭격기 2대분에 해당하는 것이니..... 불확실한 한대의 개발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을 만큼 호사스런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당시 정황을 짐작할 만한 괴링이 말한 이야기가 있다  "총통은 나에게 실전 사용 가능한 항공기 댓수를 물어 보았지, 그것이 몇개의 엔진을 달고 있는지,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를 묻지는 않았다." 이것은 4발 엔진 폭격기 사업의 종지부를 찍는 발언이기도 했다.
 
(2) 또 결정적으로 1936년 폭격기 사업의 구심점이던 발터 베버가 He-70 비행 도중 사고로 사망했고, 이후 그의 유지는 단절되고 만것이다. 즉 독일 공군 수뇌부는 전략 폭격기의 잠재력을 알고는 있었으나, 베버의 사후 손쉽게 결과를 얻어 낼 수 있는 단거리 전술 폭격기로 선회하게 된 것이다. 즉 당시 4발 폭격기는 시험단계였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 것은 당연했고, 만약 베버가 사망하지 않았으면, 참을성을 가지고 계속 밀고 나갔겠지만, 베버 사후에는 끝까지 참을성을 발휘할 배짱이 두둑한 지도자가 없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해 아직은 초라하기 그지 없는 결과를 들고, 히틀러에게 조금만 참아 달라고 말하며, 신념을 끝까지 관철하며,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용기를 지닌 베버 같은 위인은 없었던 것이다. 즉 루프트바페 수뇌부는 자신의 불확실한 믿음과 자신의 눈에 보이는 안위라는 두가지 저울질에서 보다 손쉬운 후자쪽을 선택한 것이었다. 꼭 필요로 하기는 한데, 만약 이것이 그토록 재정을 쏟아 붓고도, 끝내 나의 믿음대로 만족한 성능을 보이지 않게 된다면? 이런 소극적인 생각이 루프트바페 지휘부에 스며 있었던 것이다.
 
(3) 또 스페인 내전에 투입된 소수의 초기 4발 엔진 폭격기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적의 복엽기에게조차 취약한 면모을 보이면서, 이를 계기로 아직도 망설이던 독일 수뇌부는 참을성을 완전히 잃어 버린 것이다. 훗날 이차대전 미국의 주간 폭격을 보아도 알 수 있듯, 중폭격기들은 대량 투입되어 밀집편대를 이루어야만 최고의 방어력을 발휘하는 것인데, 몇대 되지도 않는 그리고 시험단계라 방어화력도 취약한 초기의 4발 엔진 폭격기를 써보고는 그 결과가 실망스럽다고 계획 자체를 중단해 버린 것이다. 즉 당장에 가시화된 전과를 이끌어낼 수 없었던 이 중대한 시점에서 독일은 미국과는 달리 너무 빨리 포기해 버리는 우를 범한 것이다.
 
[사진] 도르니에 항공사의 Do-23 항공기... 4발 엔진 중폭격기 개발 중단은 이런 쌍발기 개발로의 선회를 의미했다.
 
루프트바페는 크게 두 개로 벌어 놓은 4발 엔진 항공기 사업에서 손을 떼게 된다. 즉 1937년 4월, 알베르트 케셀링은 4발 엔진 장거리 폭격기는 현시점에서 실용화하기에 힘들다고 판단하고는, Do-17, He-111 등 전술 폭격기 쪽으로 촛점을 맞추게 된 것이다. 물론 이후에도 특히 영국의 항공전 참패후 독일의 여러 항공사에서 4발 엔진 폭격기 계획이 진행되기는 했으나, 정책적 지지는 받지 못한 실정이었다. 반면 미국은 지리적인 환경 때문에 4발엔진 중폭격기 개발을 계속했고, 이런 시발점 1930년대의 차이가 몇년후 유럽 상공에서 크나큰 전력의 차로 나타나기에 이른다. 즉 미국은 대규모 전략 폭격으로 독일의 산업시설을 무너뜨리고 있었지만, 독일은 소련에대한 전술 폭격 이상은 꿈도 못꾸는 지경이었다. 당시 독일은 무한한 소련의 생산력의 덫에 빠진 것이고, 소련 우랄 지역 깊숙이 자리잡은 공업단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량공세를 멀리서 지켜보아야만 했으며, 전략 폭격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즉 베버에 의해 주도되었던 독일의 4발 엔진 전략 폭격기는 잊혀진 루프트바페의 꿈이되고만 것이며 아이러니컬하게도 베버의 유지는 미국 주간 폭격 비행단에 의해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베버가 머리라면, 손은 밀히....

 
[사진] 에르하르트 밀히... 루프트한자 사장을 거쳐, 1930년대 루프트바페의 생산력 혁신을 일구어낸 장본인
 
베버는 초기 루프트바페의 전략과 전술 개념의 확고한 틀을 마련하면서, 한편으로는 독일 항공 산업의 생산 혁신에도 박차를 가했다. 당시 이 분야의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에르하르트 밀히(Erhard Milch)로 그는 일차대전 독일 공군 정찰 비행대장을 지낸 바 있었고, 일차대전후 융커스 항공사에서 일하던 중, 1926년 신생 루프트한자 대표가 된후, 루프트한자를 중유럽 최고의 민항사로 새롭게 태어나게 한 장본인이었다. 밀히는 민항사를 운영하며 터득한 사업가 기질을 이용해, 독일 항공기 생산력의 증대와 루프트바페의 구조의 혁신을 이루어 낸것이다. 1930년대 중반 밀히의 아버지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가족들이 게슈타포의 취조를 받게되었는데, 괴링은 발벗고 나서, 밀히의 아버지는 법적인 양부일뿐, 혈통적으로는 순수한 아리안족인 어머니의 피를 이어 받았다고 항변을 해주었고, 밀히는 계속 루프트바페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물론 훗날 독소전에서 괴링의 실책에 대해, 괴벨스, 히믈러 등이 괴링의 사임을 히틀러에게 요청했을때 밀히 역시 이에 동참하면서 괴링과 맞서게 되지만, 1930년대 루프트바페 건군 당시만 해도 괴링과 밀히는 손발이 척척 맞는 상하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밀히는 원래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었고, 매우 독단적인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밀히 역시 발터 베버에 대해서만은 매우 우호적이었고 인간적으로도 베버를 존경해 마지 않았다. 즉 공군참모총장 베버의 정책을 적극지지하며, 생산을 독려해 나간 것이다. 1932년 독일 항공기 생산 노동자가 3200 명선이던 것이, 밀히의 노력으로 1933년 1만명선, 1935년 6만명, 1936년에는 12만명으로 몇갑절 껑충 뛰었고, 이에 따라 항공기 생산댓수도 1933년 월 평균 31대 생산을 밑돌던 것이 1935년에 들어 월평균 265대의 놀라운 생산혁신이 가능해졌다. 단 1년여만에 8배가 넘는 급성장을 이룬것이다. 당시 루프트바페의 항공기 생산 정책은 크게 두가지 흐름으로 전개될 예정이었다. 즉 (1) 기존에 이미 생산된 또 생산 단계에 올라선 항공기를 먼저 대량 생산해내고, (2) 한편으로는 새로운 신예기 개발을 서두르는 것....
 
 
File:Heinkel 46.jpg
[사진] He 46 정찰기.... 경폭격기용으로도 쓰였으며, 초기 루프트바페의 주력 공격기 중 하나였다.
 
 
그 첫 단계로 이미 개발이 끝난 He 45, He 46 정찰기를 생산해 경폭격기로도 혼용할 수 있도록 했는데, 개발사인 하인켈 뿐 아니라, 융커스와 고타사에서도 라이센스 하에 추가 생산이 이루어졌다. 그외 250 kg 투하용 폭탄 적재가 가능한 He 50 급강하 폭격기 생산이 이루어졌고, 전투기로 아라도 Ar 65 전투기와 He 51 전투기가 대량 생산에 들어갔다. 또 훗날 루프트바페의 수송기로서 일대활약을 하게될 삼발 엔진 항공기 Ju 52기가 제작되었다. 그외 Do 17의 원류인 Do-11 폭격기도 1934년부터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이들이 다른 서방 국가들의 항공기와 비슷한 성능을 보여, 10여년을 잠자던 독일 항공 기술이 아직 녹슬지 않았음을 천명한 것이기는 했지만, 탁월한 수준은 아니었다. 즉 Do 11, Do 23 폭격기는 적재량이 떨어지고, 조종이 매우 까다롭고, 잦은 사고를 일으키는 난점을 안고 있었고, He 51 전투기 역시 시속 200 mph로 당시로서는 빠르기는 했지만, 조종 특성이 만족스럽지 안았던 것이다. 그러나 차세대 항공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이들을 지속적으로 생산해 내야만 했고, 드디어 1934년 초 "라인란트(Rheinland)"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개발된 항공기의 생산 계획"이 발표되었고, 1935년 말까지 4000 대의 항공기를 생산키로 결정했다. 그런데 밀히의 눈부신 활약으로 1935년말에 이르자 계획보다 1천대가 윗도는 5000 대 생산이 이루어졌다.  물론 이들 중 대부분은 훈련기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놀라운 생산량은 괄목상대 그 자체였다. 드디어 1935년 3월 1일.... 총 병력 2만.... 훈련기 등을 제외하고도 실전 투입 가능한 항공기 2000 대를 보유한 루프트바페는 공식적인 건군을 전세계에 선언케 된다. 준비기간 1933년부터 단 3년.... 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과정이었고, 루프트바페는 전유럽 아니 전세계 제 1의 공군력으로 다시 부활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얼굴 마담 괴링과 실질적인 중추 발터 베버가 있었다.
 
 
 
 
 
초기 루프트바페의 항공기들
(상) 아라도 항공사의 Ar 67 전투기
(중) 하인켈 항공사의 He 51 전투기
(하) 융커스 항공사의 Ju 52 수송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