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항공전사 유럽편의 참고문헌/루프트바페의 부활

불량감자 2011. 5. 13. 00:25

 

급강하 폭격의 맹신자, 우데트의 선택 - 수투카

 
[사진] 에른스트 우데트... 일차대전의 영웅이며, 루프트바페 신예기 선정에 깊숙히 관여하게 된다. 급강하 폭격기 맹신자였고 훗날 패전과 맞물려 속죄양으로서 자살하고 만다.
 
앞 단원에서 언급한 일명 "라인란트 계획"이 이미 개발된 항공기 댓수를 늘이는 루프트바페의 "양적인 급성장"이었다면, 거의 동시에 "질적 향상을 위한 항공기 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차세대 항공기" 사업이 그것인데, 당시 루프트바페 기술 개발국장이던 빌헬름 빔머(Wilhelm Wimmer)와 곧 그의 뒤를 이은 일차대전 조종사 출신의 맹장 볼프란 리흐토펜(Wolfram von Richtofen) 등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얼마후 이들에게 든든한 새로운 인물이 영입되어 힘을 실어주게 되니, 그 이름하여 에른스트 우데트(Ernst Udet)........
 
괴링은 독일공군의 기초를 다져 나가면서, 1차대전 전투기 조종사라는 자신과 비슷한 경력을 갖추고 또 붉은 남작에 이은 독일 격추 2위의 대에이스 에른스트 우데트를 루프트바페에 영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우데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처음에는 거부 의사를 밝혔다. "나는 전투기 조종삽니다. 지금 독일 공군이 필요한 것은 젊은 조종사들과 그들을 이끌 뛰어난 행정 장교들이죠. 이미 몸이 굳어버린 나는 조종사로서 루프트바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데트 역시 새로 태어날 루프트바페에 누구 못지 않는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민간인 신분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독일 공군의 차세대 항공기 구상으로 골몰하고 있었다.
 
[그림] 커티스 호크 헬다이버기... 우데트를 매료시킨 급강하기가 바로 이것...
 
얼마후 미국으로 건너간 우데트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커티스 호크 헬다이버 (Curtiss Hawk Heldiver) 복엽기의 급강하 시험 비행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접하게 되었고, 이 놀라운 잠재된 군사적 가치를 재빨리 알아차렸다. 마침내 그는 두대의 항공기를 구입하여 훗날 독일 공군의 지상 공격기의 모델로 삼으려 했다. 우데트가 걱정한 것은 미국이 잠재력이 대단한 이 신형기를 타국의 공군 원로인 자신에게 선뜻 내줄까하는 의구심이었다. 그런데 미국측은 의외로 순순히 우데트의 요청에 승낙을 했는데, 문제는 자금이었다. 우데트가 전후 곡예 비행사로 일하며, 돈을 모아 두기는 했으나, 헬다이버기 2 대에  3 만불이란 거금에는 너무도 부족했다. 바로 이때 우데트를 자신의 수하로 영입하려고 안달이 되어 있던 괴링의 연락이 왔다. "우데트... 당신 뜻대로 두대를 구입하시요. 돈은 우리가 지불할 겁니다. 단 독일로 돌아오면, 곧 재건될 루프트바페를 위해 일해 주셨으면 하오...." 우데트가 다시 헬다이버 관계자를 방문하자, 매매상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데트씨, 벌써 입금이 되었더군요. 축하드립니다. 이 항공기들은 이제 당신 것입니다."
 
1933년 말 독일로 돌아온 우데트는 1934년 여름 많은 루프트바페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헬다이버기의 시승을 선보였다. 우데트는 직접 조종석에 올라, 고도를 높였고, 몇번에 걸친 놀라운 급강하 시범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우데트가 자신의 믿음에 더무 과신했던 것일까? 아니면, 지휘부에게 급강하 전술의 효용성을 인식시키기 위해, 지나친 기동에 돌입했기 때문일까? 마지막 시험 비행 도중 사고가 일어나고야 만다. 급강하 회복 도중, 헬다이버는 과도한 G를 이기지 못하고, 승강타가 말을 듣지 않았고, 1만 5천불이나 하는 헬다이버기가 지상에 곤두박질 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다행히 우데트는 마지막 순간에 낙하산 탈출을 성공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낙하산에 매달려 내려오는 독일 공군의 원로는 착잡함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의 신념이 이번 사고로 물거품이 된단 말인가? 그러나 지상에 내려 앉은 우데트는 루프트바페 지휘부 간부들의 더욱 열열한 환영을 받았다. 비록 한대의 항공기를 잃었지만, 이들은 우데트의 선견지명을 공감한 것이고, 급강하 공격기의 개발에 모두 쌍수를 들고 지지를 아끼지 않게 된 것이다. 공군 참모총잠 발터 베버 역시 우데트의 급강하 폭격기 개발에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 주었다.
 
우데트는 루프트바페에 영입되었고, 처음에는 대령 계급을 받게 된다. 우데트는 일선 전투기 비행대장직을 원했으나, 괴링은 행정직을 고집했고, 헬다이버기 도입이 인연이 되어, 항공 기술 장교직을 수행해 나가게 된 것이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우데트가 가장 먼저 역점을 둔 것은 급강하 폭격기의 개발이었다. 독일의 항공사 몇 개가 발주 경쟁에 들어갔고, 아라도(Arado) 항공사의 Ar 81 급강하기, 블룀 앤 보쓰(Blohm & Voss)사의 Ha 137기, 하인켈(Heinkel)사의  He 118기, 그리고 융커스(Jukers) 항공사의 Ju 87기가 제작되었다. 그런데 이들 항공사 중 융커스 항공사는 소련 리페트스크에서 이미 선보인 바 있는 전금속 2인승 전투기 Ju K 47기를 급강하 공격용으로도 시험비행했던 경험이 있었고, 급강하 브레이크(Brake) 부분에서 다른 항공사 보다 기술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 공군이 제시한 기준에 급강하 각도가 직각에 가까울수록 선정에 우선순위를 두고, 또 급강하 속도가 375 mph를 넘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급강하 브레이크가 필수였던 것이고, 융커스 항공사에게 유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연유로 루프트바페가 급강하 폭격기 개발 계획을 발표한 단 몇주내에 이미 융커스 항공사는 Ju 87의 설계도를 완성할 수 있었고, 경쟁 시작점부터 한발 앞서 나갈 수 있었다.
 
 
 
[사진] Ju 87과 함께 루프트바페 급강하 폭격기 개발 경쟁에 참여했던 He 137기의 모습
 
 
 
[사진] 에르하르트 밀히(좌)와 볼프람 폰 리흐토펜(우)... 리흐토펜은 붉은 남작의 사촌동생으로 이 당시 독일 항공 기술 국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우데트가 따른다.
 
단 하나의 문제라면, 역시 10 여년간 베르사이유 조약에 얽매여 뒤쳐져 있던 항공기 엔진 개발 능력이었다. 즉 당시 탑재가능한 엔진은 600 마력 내외 정도로 약한 파워의 엔진이 고작이었고, 속도가 느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순항 속도가 느릴 경우, 적 전투기에 취약할 수 밖에 없으니, 이를 보완하기 위해 후방 사수가 필요했고, 자연히 기체 중량은 더 늘어 악순환이었던 것이다. 당시 우데트의 상관으로 항공 기술국장이던 볼프람 폰 리흐토펜(Wolfram von Richtofen)은 속도가 느린 급강하기에 대해 짙은 의구심을 심중에 품고 있었고, 급강하 도중 저공으로 내려갈 경우, 적의 대공포 사격에 매우 취약할 수 밖에 없다는 약점을 들어 개발 반대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볼프람 리흐토펜은 폴란드 항공전에서 자신이 직접 조종한 정찰기를 몰고 적진을 저고도 정찰하다가, 대공포에 격추되는 경험을 가질 운명이었으니, 이런 발언은 아이러니컬 하다고 할까? 아니면, 말이 씨가 된다고나 할까? 어쨋든 리흐토펜도 스페인 내전에서 수투카를 운용해 보고, 훗날에는 적극적인 수투카 지지자가 된다.) 1936년 6월 9일, 볼프람 리흐토펜은 "이제 급강하 폭격기 개발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 종지부를 찍는 듯 보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인 6월 10일, 우데트가 리흐토펜의 자리로 승진하면서, 신형기 개발 사업 전체를 관장케 되었고, 끝나는 줄 알았던 급강하기의 운명은 단 하루만에 되살아 나게 된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 경쟁에 남은 것은 He 118과 Ju 87 두 기종이었다. He 118은 하인켈 항공사의 전통인 날렵한 동체에 빠른 속도와 기동성까지 갖춘 일견 전투기에 가까운 급강하기였으며, 일부에서는 Ju 87보다 월등한 항공기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경쟁자였다. 그러나 몇 달후 우데트가 He 118에 직접 시승한 날, 운명은 결정되고 만다. 이날 강력한 풍속으로 시험비행에는 적합한 날이 아니었지만, 시승을 강행한 우데트는 급강하 도중 추락하고 만 것이다. 이번에도 우데트는 낙하산 탈출에 성공했지만, 이로써 발주권은 Ju 87에게 이미 넘어가 버린 것이나 진배없었다. Ju 87은 이후 지속적인 업그레이드로 스페인 내전에서 데뷰해, 1940년 중반까지 서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전격전의 선봉으로 활약하게 되고, 훗날 독소전에서도 괄목할만한 전과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에른스트 우데트가 있었다. 여담이지만, 하인켈 항공사는 뛰어난 경쟁기를 만들어냈음에도 불구하고, 급강하 항공기 부분에서 마지막까지 경쟁하다가 찬물을 먹어야만 했는데,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단발 단좌 전투기 부분에서도 다시한번 좌절을 맛보아야할 운명이었으니, 당시 독일 항공사 중 실력에 비해 빛을 못본 불운의 항공사였음에 틀림없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급강하 폭격기 Ju 87 수투카.... 서유럽을 휩쓸었으나 영국의 항공전에서 고전할 운명의 기체.... 수투카는 우데트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Bf 냐 하인켈이냐?

 
[사진] 에른스트 우데트의 이차대전 당시 모습... 머리카락이 있고 없냐가 이렇게 중요하다니...^.^
 
193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 독일이 개발에 가장 역점을 둔 것은 폭격기였다. 다분히 공격적인 공군을 위해서였고, 중폭격기부터 급강하 단발 폭격기까지 이들이 모두 개발 순위 제 1, 2, 3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단발 단좌 전투기는 쌍발 전투기 보다 순위가 떨어지는 제 5순위 정도에 불과했다. 즉 물론 Bf 110이 엔진 문제 때문에 개발 기간이 좀 늘어나기는 했지만, 초기만해도 Bf 109는 개발 순위상 Bf 110 보다도 떨어졌었던 것이다. 1933년 루프트바페가 차세대 단엽 단발 단좌 전투기 사업을 시작한다는 공표를 했을때, 아무도 이들이 독일 항공기 최대, 아니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생산댓수를 기록하게 될지 예상하지 못했었다.
 
아라도 항공사의 Ar 80,  포케볼프사의 Fw 159, 하인켈 항공사의 He 112, Bf항공사의 Bf 109가 발주경쟁에 들어갔고, 이들 중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하인켈과 Bf 항공사 둘이었다. 마지막 시험 비행 도중 He 112기가 스핀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추락하면서, 거의 엇비슷한 성능을 가진 Bf 109가 차세대 독일 주력 전투기로 결정되어 버렸다. 하인켈 항공사는 못내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당시 루프트바페가 발표했던 단발 전투기의 첫 조건은 속도였고, 이미 선정이 끝난 상태였지만, 하인켈사는 다시금 속도 경쟁에 돌입해 실추된 자사의 명예를 회복하고, 주력 전투기에 도전을 해보려 안간 힘을 다 쓰게 된다. Bf 109에게 찬물은 먹은 He 112의 구조적 혁신으로 탄생한 새로운 He 100의 시험기가 완성을 보았고, 1938년 6월 우데트가 직접 시승하게 된다.
 
 
 
[사진] 에른스트 우데트와 빌리 메서슈미트 박사... 이둘 사이에 코넥션이 있었나?... 하인켈은 분명 그렇게 생각했음에 틀림없는 것 같다...
 
사실 Bf 109와 He 112가 경쟁하던 1930년대 중반, 이 두기종 모두 같은 엔진을 탑제하고 있었고, 최고속도 면에서 Bf 109가 약간의 우위에 있었지만, 거의 엇비슷한 수준이었었다. 이제 He 100은 1100 마력의 다임러 벤쯔 DB 601엔진을 탑재했고, 또 혁신적인 익면 냉각 방식을 도입한 기종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익면 냉각 방식이란 기체 아래에 위치한 냉각 흡입구를 없애고, 항력을 줄여 속도를 증대시키는 대신 냉각수 파이프를 주익으로 분산 배치해, 냉각효과를 극대화한 구조를 말한다. 우데트가 시승한 이날의 시험비행에서 He 100 원형기는 놀랍게도 634 km/h(394 mph)의 속도를 기록하며, Bf 109의 기록인 610 km/h(380 mph)를 사뿐히 넘어 버린 것이다. 당시 항공기 최고 속도 기록은 1934년 이탈리아의 마키 (Macchi) C 72기가 기록한 709 km/h (440 mph)였는데, 이것은 수상기였고, 또 두개의 엔진을 연결해 만든 실전기라기 보다는 속도만을 위해 만든 시험기에 가까운 기종이었었다. 육상 활주 이착륙하는 기종으로서는 He 100 이 신기록을 갱신하고야 만 것이다. 또 얼마후인 1939년 3월에는 He 100 8번째 원형기는 746 km/h (464 mh)라는 믿기지 않는 속도로, 자신의 기록을 다시 갱신하는 대기록을 세우기에 이른다. 하인켈은 He 100을 새로이 He 113으로 명명하며, 실전 비행대 도색까지 마치고, 언론사 기자들을 불러 대대적인 선전에 나섰다. 곧 새로운 루프트바페의 주력 전투기가 탄생할 것 같은 분위기가 독일을 휩쓸고 있었다.
 
 
[사진] 정말 실력에 비해 너무 불운했던 하인켈사의 걸작 He 100 전투기의 모습.... 익면냉각방식의 독창적인 비운의 걸작
 
이렇게 되자, Bf 109를 설계한 빌리 메서슈미트도 가만히 지켜 볼 수 만은 없었고, 속도 경쟁을 위한 새로운 항공기 Me 209를 설계했다. Bf 109보다 작은 동체에 날렵함을 갖춘 시험을 위한 시험기... 빌리 메서슈미트는 하인켈이 도입한 새로운 냉각 시스템을 받아들였지만, 실패했고, 하는 수 없이, 냉각수를 대량으로 적재해 냉각액이 지속적으로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열을 받은 냉각수는 그대로 방출시키는 새로운 설계를 실현에 옮겼다. 이렇게 되면 엔진을 식힌 냉각수를 다시 식히는 과정이 불필요했고, 비행시 언제나 새로운 냉각수가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획기적인 방안이었지만, 이륙시부터 일회용 냉각수를 대량으로 실어야 했으니, 정작 연료는 약 30분 비행가능한 최소량 밖에는 채울 수 없었다. 즉 Me 209는 실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분히 하인켈과의 속도경쟁을 위한 선전용 항공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후인 1939년 4월, 755 km/h (469 mph)의 최고기록을 갱신하고야 만다. 그 누구도 Me 209의 임기웅변적인 구조와 냉각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대외적인 선전효과는 극명했다. 즉 단 한달 간격을 두고 전혀 다른 두개의 독일 항공사가 세계 기록을 두번씩이나 깨버렸으니....
 
 
[사진] Me 209 시험비행 조종사와 빌리 메서슈미트 박사의 모습...
 
이렇게 되자, 이번엔 하인켈사가 더 빠른 기종을 개발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러나 루프트바페 지휘부와 우데트는 항공사 간의 무리한 경쟁에 제동을 걸어 버렸다. 우데트는 하인켈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이것은 주력 전투기 사업의 종지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두 기종 모두 세계 기록을 갱신했소, 이것으로 만족이요. 그리고 Bf 109가 주력 전투기임은 변함없는 기정 사실이요. 그러니 주력 단발 전투기 생산 회사(Bf 사)가 마지막 세계 기록을 보유하는 것이 대외적으로 선전효과가 더 클 것이요. 더 이상 속도 경쟁은 하지 마시요..."  급강하 폭격기 에 이어, 이제는 단발 전투기 분야에서도 더 뛰어난 기체를 생산하고도 연속으로 찬물을 먹어야 했던 하인켈의 실망은 이루 말로 설명 못할 지경이었다. 이후 하인켈은 이 기종을 소련과 일본 등 몇몇 국가에 수출하고, 자사의 방어기로 쓰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리고 훗날의 이야기가 되지만, 서유럽을 쓸어버릴 당시 루프트바페 지휘부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He 100 이 Bf 109 보다 뛰어나든 아니든 상관없다. 우리는 Bf 109로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영국의 항공전 이후 첫 참패를 맞으며, He 100 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기회를 얻게 되지만, 이미 대량 생산에 들어간 뒤였고, 이들의 Bf 109에 대한 애착은 지속되었다. 물론 전투기의 생명에 속도가 전부가 아니고, 또 실전기로서 He 100 이 Bf 109를 능가했을지는 검증되지 않았다. 즉 냉각 시스템이 혁신적이나, 주익에 명중당하면, 냉각수 손실이 심각해지고, Bf 109의 기수부분에 집중된 냉각 장치에 비해 손상률이나 내구성이 떨어질 확률도 다분하지만, He 100가 뛰어난 항공기였음에는 틀림없다. 물론 뛰어난 항공기가 언제나 뛰어난 전투기라는 말은 아니지만, He 100 역시 루프트바페의 이루지 못한 꿈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허리케인이나 스피트화이어보다도 50 에서 100 mph나 빠른 He 100기가 주력기로 선정되었다면, 1940년 영국 상공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File:Bf109V1 3Seiten neu.jpg
 
 
 
(상) 우여곡절 끝에 단발 전투기 독점 생산을 확립한 Bf 109의 B형.. 스페인 내전 참가한 도색을 하고 있다.
(하) Bf 109의 원형기(prototype)의 모습
 
 
 
 
하늘이 낸 천재 창공에 잠들다

 
루프트바페의 날개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던 1936년 6월.... 루프트바페는 최고의 지략가를 잃고 만다. 이것은 1930년대 뿐 아니라, 이차대전이 장기화될수록 루프트바페에게는 두고두고 되씹으며, 못내 아쉬움을 감출 수 없게 하는 상념의 발단이었다. 발터 베버의 비행사고와 연이은 사망... 1936년 6월 3일, 발터 베버 장군은 드레스덴에서 루프트바페 항공기 시찰 계획을 마치고, 베를린으로 돌아갈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일차대전 원로 조종사의 장례식에 참석키 위해, 자신의 항공기에 올랐는데, 너무 시간에 쫓겼던 것일까? He 70기를 직접 조종하며, 시동을 켰지만, 베버는 이륙전 수칙을 생략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즉 에일러론의 락(lock)을 풀고 난 후, 시동을 걸었어야 했는데, 베버는 잊고 있었고, 제대로 조종할 수 없는 기체를 공중에 띄운 것이다. He 70기는 곧바로 비행장 끝에서 나뒹굴었고, 베버는 동승한 항공기술자와 함께 운명을 달리 하고 만 것이다. 루프트바페 최초로 참모총잠을 잃은 것이고, 혹자들은 베버의 죽음이 이미 이차대전 루프트바페 패배의 시기적으로는 첫번째 시작이며,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실전에서 베버의 역량이 시험 되지는 않았지만, 이 말은 매우 설득력이 있음에 틀림없다. 육군에 만슈타인이 있다면, 공군엔 베버가 있다던 말처럼 뛰어난 지략가의 죽음은 이후 루프트바에 행보에 정신적인 나아갈 바를 밝히는 빛이 시들어감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베버의 뒤를 이어 알베르트 케셀링이 공군참모총잠이 되었지만, 베버와는 달리 에르하르트 밀히와 계속 대립했고, 베버라는 구심점을 잃은 루프트바페 내에는 도토리 키재기를 하듯 여러 세력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위해 겨룸으로써 일체된 모습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즉 외형적으로는 최고의 기량과 단합을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갈등이 고개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  발터 베버 장군이 조종 도중 비행사고를 당하고 마는 기체 He 70기
 
 
그러나 비록 내부적인 가장 뛰어난 핵을 잃어 버린 루프트바페였지만, 그 역량은 세계 제 1위의 공군력이 되었음은 자명했다. 1933년 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틀이 베버라는 천재에 의해 조율되었고, 드디어 무에서 유를 창조한 제 2의 탄생을 이루어 낸 것이다. 1939년 8월 본격적인 이차대전 시작에 앞서 괴링은 루프트바페 전장병에게 다음과 같은 메세지를 전했다. 이것은 부활한 독일 공군의 자부심과 자신감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이었다.
 
"나는 지난 몇년간, 최상의 노력을 경주해 루프트바페를 세계 제일의 공군으로 만들었다. 위대한 제국의 꿈은 강력한 공군력과 완벽한 출격태세가 갖추어짐으로써 실현되었다. 1차대전 선배 조종사들의 정신에서 태어나, 총통과 군지휘부의 영명한 영감에 힘입어, 이제 루프트바페는 일어선 것이다. 전장병은 감히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전광석화의 잿빠름과 불굴의 의지로 총통의 명령에 따를 철두철미한 준비에 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