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2차 대전사(2014년)*

불량감자 2014. 2. 12. 11:33

1. 끝나지 않은 전쟁

 

 

 

 

 

19181111. 1,000만 명이 넘는 사람을 깔아뭉개며 질주하는 거대한 트럭과 같았던 제1차 세계대전의 폭주에 간신히 브레이크가 걸렸다. 그로부터 약 7개월 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커다란 거울의 방에서 제1차 대전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48년 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승리를 선언하고 독일제국의 형성을 축하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독일 대표단은 200페이지에 달하는 사실상의 항복문서에 서명해야 했다. 바로 베르사유 조약 이었다.

 

 

 

 

 

 

 

 

 

[사진] 항복문서에 사인을 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사진] 베르사유 조약 영어판

 

 

 

 

 

 

 

베르사유 조약은 간단히 말해서 독일이 영원히 전쟁을 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앞으로 독일은 단지 10만 명의 국방군(Reichswehr)만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군용 항공기부터 전차, 잠수함에 이르는 수많은 신무기는 개발도, 보유도 금지당했다. 심지어 기관총조차 보유가 금지가 됐고, 독일의 자랑이던 대양함대는 몇 척만을 남긴 채 독일해군 자신의 손으로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히고 말았다. 그러나 독일의 전쟁능력을 빼앗겠다는 시도는 단순히 군사력을 금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연합군, 그중에서도 프랑스는 1871년의 패전과 1915년의 위기를 두 번 다시 독일이 몰고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예 국가로서 재기 불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 결과 믿기 힘든 거액의 전쟁배상금을 독일에 물리게 되었다.

 

전사한 장병의 보상금이나 건물 등의 재산피해는 물론 죽은 가축의 값까지 계산한 이 배상금은 결국 1,320억 마르크(당시 영국 화폐로 660억 파운드-지금 가치로 따지면 100~200조 원 사이)라는 믿기지 않는 거액으로 불어났다. 그 의도는 물론 뻔했다. 독일의 대들보까지 들어내서 아무 짓도 못하는 무기력한 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독일의 수모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러시아와의 휴전회담 결과로 얻은 동쪽 국경은 다시 빼앗기고, 동부 프로이센 지방과 독일 본토를 연결하는 중요한 도시 단치히는 자유시라는 명목으로 폴란드에 주어졌다. 이것은 동부 프로이센이 사실상 독일 본토와 분리된다는 뜻이었다. 1871년 승전의 대가로 얻은 알자스/로젠 지방도 프랑스에게 다시 빼앗겼다.

 

 

 

 

 

 

 

 

 

[사진] 베르사유조약에 의해 변화된 독일의 영토

 

 

 

 

 

 

 

군대도, 경제도, 영토도 빼앗긴 만신창이의 패전은 당연히 대혼란을 불러왔다. 191811월의 수병 반란을 계기로 야기된 사회적 불복종은 결국 빌헬름 황제의 퇴위와 독일제국의 붕괴를 불러왔지만, 그 뒤를 이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직면한 문제는 안정 이전에 생존이었다.

 

19191, 수도 베를린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폭동이 벌여졌지만 군과 경찰만으로 진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의 퇴역 군인들로 구성된 극우 민병조직 자유군단(Freikorps)' 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유군단은 공산당의 봉기를 효과적이지만 대단히 잔인하게 진압했다. 주모자인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브루크가 즉결처형당한 것을 시작으로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모든 이들이 잔인하게 사살당했던 것이다.

 

 

 

 

 

 

 

 

 

[사진] 191811월 수병반란

 

 

 

 

 

 

 

 

[사진] 19195월 붙잡힌 혁명군

 

 

 

 

 

 

 

 

 

[사진] 처형된 혁명군들..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이름도 이런 배경에서 시작됐다. 베를린이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공화국 정부는 19191월부터 반년 동안 남부의 소도시 바이마르를 임시 수도로 삼았고, 이곳에서 그 뒤 14년간 계속될 공화체제의 틀을 가다듬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산혁명이 진압되고 공화국이 들어섰어도 독일의 혼란은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극좌파는 어떻게든 이 기회에 공산혁명을 일으키려 했고, 극우파는 패전하지 않은 독일군의 등을 배신자들이 찔렀다며 바이마르 공화국의 다수당이던 사회민주당을 모든 문제의 원흉으로 돌렸다.

 

 

 

게다가 사실상 모든 독일 국민은 제1차 대전을 일으킨 데 대한 죄책감이 없었다. 사실 이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1차 대전의 발발 자체가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암살당하면서 생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알력이 원인이었고, 비록 독일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 도전하는 형세가 되어버렸지만, 독일이 전쟁의 책임을 모두 뒤집어 쓰는 것은 매우 억울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1921, 이번에는 극우파의 대규모 궐기가 벌어졌다. 이제는 25만 명까지 불어나 정규군을 위협하게 된 자유군단의 무장해제를 정부가 명령하자 이에 반발한 자유군단 대원들이 베를린을 점령한 것이다. 하지만 독일 정규군은 진압을 거부했고,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정부의 호소에 의해 일어난 총파업이었다.

 

 

 

혼란은 사회적으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경제적 혼란 역시 극에 달했다. 엄청난 배상금을 갚기 위해 독일 정부는 마르크 화의 발행을 막무가내식으로 늘렸고, 그 결과 통화량이 폭증하면서 환율이 폭락, 19231월에는 1달러가 1만 마르크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전쟁배상금의 지불이 느리다며 프랑스 군이 독일 산업의 중심지인 라인란트를 점령하자 이 지역에서 또 다른 총파업이 벌어졌고, 이들에게 줄 급료를 마련하기 위해 마르크 화 발행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린 것이다. 그 결과는 인류 역사상 보기 드문 살인적인 인플레였다. 19239월이되자 환율은 1달러에 9,800만 마르크까지 떨어졌고, 11월에는 1조 마르크까지 떨어졌다. 이제 마르크 화는 백지만도 못한 쓰레기가 되어버렸고, 빵 한조각을 사기 위해 장바구니에 돈을 가득 채우고 시장에 가야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설령 누가 장바구니를 훔쳐가도 그안의 돈은 놔두고 갈 정도였다.

 

 

 

 

 

 

 

 

 

[사진] 노트로 사용되고 있는 백만마르크(1923)

 

 

 

하지만 이 대혼란은 1924년부터 간신히 수습되기 시작했다. 비록 1919년부터 1933년까지 무려 15명의 수상이 바뀐 바이마르 공화국이었지만, 그동안 베르사유 조약의 족쇄를 조금이라도 풀기 위해 애를 썼고, 그 결과는 조금씩 나타났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배상금의 액수와 지불 시기는 점점 독일에 유리한 쪽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1924년에는 미국으로부터 8억 달러를 값싼 이자로 빌리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5년 뒤에는 배상금의 액수도 원래 요구의 1/4까지 줄어들었다. 거의 전 국민이 신음하던 실업 문제도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고(1928년의 실업률은 6.3%), 경제가 안정되면서 한동안 궤멸상태에 빠졌던 산업생산도 1920년대 끝무렵에는 제1차 대전 이전의 수준을 오히려 능가하는 수준까지 올라가 유럽 최대의 공업국이라는 자리를 회복했다.

 

 

 

2. 독일과 독일군의 조용한 부활

 

경제가 회복되었다고 해도 독일은 여전히 수많은 문제가 가득 찬, 언제 터질지 모르는 풍선이었다. 여전히 극좌/극우파 모두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배하는 사회민주당 정권을 적으로 보고 있었고, 또 상당수의 영토와 군대마저 빼앗긴 베르사유 체제는거의 모든 독일인에게 치욕의 상징이었다.

 

 

 

경제적으로도 급격한 회복은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빈부 격차는 극심해졌고, 사회적으로도 범죄의 증가와 향락 산업의 급격한 창궐 등이 큰 문제가 됐다. 1차 대전까지 엄격한 통제체제를 유지했던 독일제국의 생활에 익숙한 많은 보수적 중산층이 이런 문제들의 해결책으로 서서히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 정권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역시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의 굴레를 언젠가는 벗고 재무장할 기회만을 노렸고, 1924년에 독일 경제부흥의 신호탄을 쏴올린 슈트레제만 수상은 외국의 굴레 아래에서 신음하는 모든 독일인과 독일 영토는 언젠가 해방되어야 한다 고 외쳤던 것이다.

 

 

 

 

 

 

 

 

 

[사진]Philipp Scheidemann

 

 

 

 

 

결국 베르사유 조약의 엄격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조용히 재무장을 시작했다. 10만의 독일군은 명목상 전투훈련보다는 양봉이나 낙농업 교육에 더 치중하는 듯했고, 전차가 없어 승용차나 자전거에 천이나 양철로 만든 껍질을 붙이고 대전차 훈련을 받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절반 가까이가 장교나 부사관으로 채워져 유사시에 몰려들 신병을 빠르게 훈련시킬 수 있도록 편성됐고, 1차 대전까지 있던 많은 군 막사나 진지 등의 시설은 대부분 그대로 유지됐다. 정부는 또 독일 각지에 민간 비행클럽의 창설을 지원했는데, 이것은 물론 조정사 예비군을 양성하려는 속셈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사람만 있다고 전쟁을 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고, 독일도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베르사유 조약에는 사실상 모든 현대병기의 개발이 금지됐지만, 사람이 만든 규제에는 언제나 허점이 있었다. 독일의 크루프와 같은 유수의 병기 회사들은 곧 스웨덴, 스위스, 네덜란드, 스페인 등에 합작회사를 세웠다. 명목상으로는 수출용 무기를 만드는 독일 밖의 회사였지만, 곧 이곳에는 독일인 기술자들이 몰려와 기관총에서 잠수함에 이르는 다양한 무기의 개발과 생산을 시작했다. 물론 만들어진 무기 자체는 다른 나라로 수출됐지만 그 기술은 고스란히 독일이 가져갔고, 더군다나 여기에 들어가는 부품의 상당수는 독일에서 만들어졌다. 독일의 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22년 독일은 소련과 라팔로 조약을 체결한다. 명목상으로는 흔한 우호조약이지만, 그 뒷면은 비밀 군사조약이었다. 신생국가 소련은 군대를 이끌 인재의 교육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고, 독일은 현대전 이론과 각종 장비를 시험하고 간부들을 훈련시키면서도 연합군의 이목을 피할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라팔로 조약 덕분에 소련은 비밀리에 장교단을 독일로 보내 교육시킬 수 있었고, 독일은 독일대로 비밀리에 수많은 장교와 부사관을 소련에 보내 항공전이나 전차전 훈련을 할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 독일군은 이때부터 최대의 적은 공산당 이라고 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적과의 동침은 무려 11년이나 계속됐다.

 

 

 

1930년대에 접어들자 이런 노력은 대부분 결실을 맺었다. 독일군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강력한 군대로 재무장 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준비가 나중에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리라고 예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