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2차 대전사(2014년)*

불량감자 2014. 2. 26. 13:42

3. 파시즘, 이탈리아를 장악하다.

 

제1차 대전의 결과에 참담해한 나라는 독일만이 아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승전국 중 하나인 이탈리아도 참담한 전쟁의 결과로 곤경에 빠졌다. 제1차 대전이 한참이던 1915년 이탈리아를 연합국의 일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에 승리하면 이탈리아에게 여러 가지 보상, 그중에서도 영토의 보상을 약속했다. 약속대로라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이던 달마티아 지방까지 국경선을 늘릴 수 있을뿐더러, 터키 제국의 영토 상당 부분과 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 대부분이 이탈리아의 몫이었다. 결국 이 먹음직한 미끼를 문 이탈리아는 1916년부터 제1차 대전에 참전했다. 하지만 결국 65만 명의 전사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가 올린 전과는 너무나 미미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자신들과 동등한 승전국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 대부분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승인하에 독립국가로 재탄생했고, 특히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탄생은 이탈리아의 달마티아 지방의 병합은 물론, 이탈리아의 숙원사업 중 하나이던 발칸 반도로의 진출 자체를 가로막아버렸다. 물론 터키의 영토나 독일 식민지 역시 하나도 받을 수 없었고, 이탈리아에게 주어진 것은 오스트리아와 접한 국경지역 일부의 확장뿐이었다.

 

1919년 내려진 이 같은 결정은 이탈리아 전국을 반정부 시위의 대혼란으로 몰아갔고, 그 틈을 타 유명 극작가 단눈치오가 지지자들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유고슬라비아의 항구도시 피우메를 점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사진] 가브리엘 단눈치오

 

 

 

[사진] 단눈치오에게 점령당한 피우메

 

 

 

피우메는 1915년에 이탈리아의 몫으로 약속되었다가 전쟁이 끝나자 그 요구가 거부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로 편임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국경 바로 건너편에 있고 3만 명의 이탈리아인이 살고 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이탈리아는 자신의 영토로 주장해왔다. 오래지 않아 단눈치오 밑에는 9,000명의 지지자들이 모여들어 민병대를 형성했고, 피우메는 사실상 이탈리아 인들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단눈치오는 곧 이탈리아 최고의 인기인으로 부각됐지만, 그 인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이탈리아 국민들의 관심이 영토에서 경제로 순식간에 옮아갔기 때문이다.

 

원래 튼튼하다고 보기 힘든 이탈리아의 경제는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실업자는 200만까지 늘어난데다 인플레도 최대 60%까지 치솟는 등, 가난 극복이 국민 절대다수의 화두가 되어버렸다. 그 틈을 타 사회주의가 엄청난 기세로 성장했고, 1919년이 되자 이탈리아 사회당 20만 명의 당원을 거느린 거대조직으로 성장했다. 이제 사회주의 독재자나 공산혁명이 우려해야 할 현실로 다가왔고, 그 와중에 피우메 항구도시 이야기는 잊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20년 11월에 결국 유고슬라비아와의 협상 끝에 피우메는 중립지역이 되었고, 이탈리아 군이 피우메로 진격해 단눈치오와 그의 민병대를 간단히 도시 밖으로 쫓아냈지만 이탈이아 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단눈치오가 몰락하는 사이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1919년 3월 23일, 무솔리니는 시골 교사가 ‘귀향군인연맹’ 이라는 새로운 당을 만들었다. 이탈이아 어로 ‘Fasci di Combattimento' 라고 부르는 이 당의 당원들은 곧 이름의 앞머리를 따 파시스트, 당의 이론은 파시즘으로 부르게 된다. 무솔리니는 원래 사회주의자로 천주교 교회와 기성체제를 부정하기는 했지만, 단순한 사회주의자와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바로 골수 국수주의자였고 전체주의자였다.

 

 

 

[사진] 무솔리니

 

 

 

오래지 않아 무솔리니는 이 점을 교묘하게 활용하기 시작했다. 당의 강령에서 사회주의적 색채를 크게 줄이고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한다” 는 국수주의적 색채를 진하게 채색하면서 그에게는 서서히 공산주의 혁명을 두려워하는 기득권층의 재정적 지원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잃어버린 승리’에 분노한 일반 서민들 모두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이탈리아 곳곳의 도시에서 파시스트 행동대인 검은 셔츠 부대와 사회주의자들 간의 난투극이 헤아릴 수 없이 벌어지게 됐다. 비록 1921년의 총선거에서 전체 535석 중 35석만을 장악하는데 그쳤지만, 의석을 확보한 자체가 그에게는 권력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적은 의석에도 불구하고 무솔리니는 이제 ‘사회주의 혁명으로부터 이탈리아를 지킬 대안'으로 보수층의 지원을 받았고,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 대부분이 파시스트의 실질적 지배에 놓이게 됐다. 마침내 1922년 10월 28일, 무솔리니와 그의 지지자 2만 명은 밀라노의 당 본부를 출발, 권력이양을 요구하기 위해 수도 로마로의 진군을 시작했다.

 

 

 

[사진] 로마로 진군..

 

 

[사진] 로마로 진군중인 검은셔츠당(Blackshirts)

 

 

 

사실 그의 진군은 도박이었다. 28일 새벽 2시에 긴급회의를 소집한 이탈이라 정부는 2만 8천명의 중무장한 정규군을 동원, 로마 근교에 무솔리니 일당이 도착하기만 하면 제압할 채비를 갖췄고, 사실상 비무장인 파시스트들에게 승산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파멸 직전에 역전승을 거뒀다. 처음에는 강경진압을 명령했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28일 아침 9시에 갑자기 마음을 바꿔 계엄령 발동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사진]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팍타 수상은 오전 11시에 사임했고, 갑작스런 상황의 변화에 ‘진군’이 아니라 기차를 타고 로마에 다음날 아침 입성한 무솔리니는 결국 국왕을 만난 끝에(이때까지만 해도 이것이 자신을 체포하려는 정부의 속임수는 아닐까 의심을 했다고 한다)자신이 이끄는 내각을 수립하겠다는 요구를 관철시켰다. 무솔리니를 파멸 직전에 권력의 정점으로 올려보낸 결정을 왜 에마누엘레 국왕이 내렸는지는 아직도 분명치 않다. 한동안은 “국왕은 파시스트 세력이 10만 명이고, 로마 수비대는 8,000명에 불과하다는 허위보고를 받았다.” 는 설이 유력했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오히려 무솔리니의 체포와 파시스트 강경진압이 이탈리아의 내전을 불러일으키고, 자칫하면 공산주의 혁명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주변의 설득이 국왕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어쨌든 이탈리아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게 된 무솔리니는 곧 ‘강력한 이탈리아’ 의 실천을 위해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스와의 국경분쟁이 생겨 이탈이라 고관 한 명이 그곳에서 살해되자, 무솔리니는 곧바로 군함을 보내 항구도시 코르푸에 함포사격을 퍼부은 뒤 병력을 상륙시켜 점령했고, 국제연맹이 개입하자 바로 철수하기는 했지만 그리스로부터 사과와 배상금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그의 국민적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비록 외국의 언론들로부터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지만 파시스트의 협박과 정부의 검열로 이탈리아 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까맣게 몰랐고, 강력한 파시스트의 선전과 매일같이 전국에서 벌어진 검은 셔츠단의 시가행진 등은 이탈리아 인들에게 무솔리니를 부패한 정부를 개혁하고 강력한 이탈리아를 만들 지도자로 차츰 믿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모든 반대세력은 스콰드리스티(Squadristi)라고 부르는 파시스트 폭력단체에 의해 잔인하게 제거되었다. 1925년 12월, 마침내 무솔리니는 자신을 일 두체(Ii Duce)‘절대영도자’로 만들었다. 이탈이아의 모든 것을 맘대로 통치할 수 있는 절대권력을 쥔 그는 곧 그 권력을 이용해 로마 제국시대의 영광을 현대에 재현하겠다는 꿈을 실현하려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