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2차 대전사(2014년)*

불량감자 2014. 4. 29. 12:57

4. 히틀러와 나치당의 대두

 

1919년 9월, 오스트리아 출신의 한 독일군 상사 히틀러가 ‘German Socialist Worker's Party(사회주의 노동자당)’ 이라는 조그만 당의 모임에 나타났다. 안톤 드렉슬러가 이끄는 이 당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사회주의 이론과 반유대주의 이론, 독일 민족주의가 엉성하게 뒤섞인 논리를 내세운 이곳은 결국 실업자들이 사회의 불만을 맥주홀에서 화풀이하는 술 모임정도에 불과했고, 군 정보당국의 명령으로 혹시 불순한 공산당 관련조직이 아닌지 조사하러 잠입한 히틀러에게 555번이라는 당원번호가 주어졌다. 하지만 첫 번째 당원의 번호는 500번이었다. 이곳에서 히틀러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사진] 안톤 드렉슬러

 

독일제국의 위대한 신민을 자처해 오스트리아 인임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에 입대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부상, 훈장까지 받은 그에게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베르사유 조약이 어떤 치욕이었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으며, 그 치욕의 책임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유대 인이게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런 그에게 ‘사회주의 노동자당’ 의 이론은 엉성하기는 하지만 딱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도 이 당이 엉성하다는 것이 대단한 기회였다. 그저 투덜거리는 수준에 불과하던 당수나 다른 당원들의 발언과 달리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히틀러의 연설은 곧 모든 당원들을 휘어잡았고, 몇 달 가지 않아 군에서 제대한 히틀러는 드렉슬러를 몰아내고 당수 자리에 앉았다.

 

1920년,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이름은 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으로 바뀌었다. 나중에 주로 히틀러의 정적으로부터 나치(NAZI)라는 약자로 불리게 되는 당의 탄생이었다. 나치 당의 지배자가 된 히틀러가 내세운 당의 강령은 25항목에 이르지만, 핵심은 간단했다. "베르사유 조약을 폐기하고, 모든 독일인을 통합하며, 독일인이 생활할 영토를 확보하는 동시에 공산주의자와 유대 인을 독일 땅에서 몰아내자" 는 것이었다.

 

 

 

[사진] National Socialist German Workers' Party emblem

 

 

 

 

[사진] NAZI Flag (요즘 일본 관련된 뉴스에서 자주 등장하던데.. 쩝)

 

 

 

이미 너무나 잘 알려진 나치 당의 광신적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해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찌 보면 유치하기까지 한 나치 당의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사회적 혼란이 계속되면서 미래의 희망과 희생양을 동시에 찾던 많은 독일인들에게 히틀러의 호소는 먹혀들었다. 당원의 숫자는 시간이 갈수록 꾸준히 늘어났고, 마침내 1923년 11월 8일에 독일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그의 첫 번째 행동이 시작됐다. 뮌헨의 유명한 맥주홀에서 수백 명의 당원이 모인 가운데, 히틀러는 베를린으로의 진격을 개시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자 한때의 참모총장이던 루덴도르프 장군과 함께 뮌헨에서 베를린까지 행진을 시작한다면 군과 경찰도 함부로 저지하지 못할 테고, 사회에 불만이 있던 많은 시민들이 동조해 결국 베를린까지 들어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파시스트 당원들을 데리고 로마까지 진군해 권력을 장악한 것을 독일에서 재현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그 계산은 몇 킬로미터도 못 가서 무너졌다. 경찰이 총까지 쏘면서 나치의 진군을 막았고, 히틀러는 내란음모죄로 체포되었다. 결국 뮌헨 대봉기는 대실패로 끝났지만, 이것이 뜻밖에도 히틀러를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나치 당과 히틀러는 신문의 머리기사를 연일 장식했고, 특히 재판에서 히틀러가 특유의 열변으로 독일의 문제점과 나치 당의 정당성을 호소한 것이 재판장까지 감동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순식간에 ‘폭동의 수괴‘’궐기에 실패한 애국자‘로 바뀌었고, 히틀러는 내란주모자로서는 너무나 적은 5년형을 선고받은데다가 그나마도 9개월 만에 석방됐다. 수감중에도 그는 극우파의 영웅다운 여유있는 생활을 누렸고, 또 그런 여유를 글쓰기에 투자해 “나의 투쟁(Mein Kampf)" 까지 저술했다.

 

 

 

[사진] 책의 자켓사진

 

 

 

석방된 히틀러는 생각을 바꿨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취약했지만 힘으로 무너트릴 상대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1924년부터 독일 경제와 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그렇잖아도 법과 질서를 중시하는 독일인들에게 ‘정권타도’ 식의 호소가 먹힐 리가 없었다. 히틀러는 선거를 포함한 합법적 방법으로 정권에 접근하기로 방향을 바꿨고, 이 선회는 뜻밖의 지원군을 만든다. 바로 재계였다. 나치의 ‘사회주의’ 라는 이미지 때문에 처음에 자본가들은 히틀러와 나치 당을 경계했지만, 곧 이탈리아 자본가들이 무솔리니를 지원했던 것처럼 공산주의를 광적으로 혐오하고 독일의 전통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나치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1919년 베를린 폭동의 기억이 새롭던 당시, 골수 반공주의자 히틀러는 공산주의 혁명을 막을 파수꾼으로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1925년에 이르자 나치 당은 2만 5,000명의 당원을 가진 조직이 되어있었고, 그것이 4년 뒤에는 18만 명으로까지 불어난다. 게다가 1921년에 생긴 나치 당의 무장조직 SA(돌격대, Strumabteilung)는 1929년경이 되자 경찰을 위협하는 거대조직으로 탈바꿈했다. 나치 당의 집회나 연설이 있으면 돌격대는 언제나 갈색 유니폼을 입고 회장을 둘러쌌고, 누구라도 반대하면 곧바로 붙잡아 잔인한 폭력을 휘둘렀다. 뿐만 아니라, 공산당 등 나치가 정한 ‘국가의 적’이 모이는 곳에 쳐들어가 난동을 부리는 이들의 횡포는 1920년대 독일에서는 흔한 것이었다.(비록 SA는 바이마르 정부에 의해 결국 불법화 됐지만, 이들을 완전히 막을수는 없었다.) 그러나 당세가 커졌다고 해도 여전히 대부분의 국민은 나치에게 권력까지 주는 것은 주저했다. 1928년의 총선거에서 나치 당의 득표는 겨우 2.6%, 12석에 불과했지만, 공산당은 그 다섯 배에 가까운 표를 얻어 나치 당을 압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치는 요란스럽지만 나라를 뒤엎을 정도의 큰 세력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년 뒤, 아무도 예기치 못한 사건이 나치에 엄청난 힘을 준다.

 

 

 

[사진] 히틀러와 SA지도자 룀(Ernst Röh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