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2차 대전사(2014년)*

불량감자 2015. 1. 21. 13:46

5. 세계 대공황과 히틀러의 집권

 

1929년 10월, 뉴욕 증시의 대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은 거의 전 세계를 경제적 파산상태에 몰고 갔지만 그중에서도 독일의 타격은 심각했다. 간신히 회복됐던 경제는 산산히 부서졌고, 공황 전까지 6.3%에 불과하던 실업률은 1930년대 무려 14%, 1932년에는 30%까지 치솟았다. 너무나 급격한 추락에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속수무책이었고, 경제의 붕괴와 정부의 무능을 보다 못한 유권자들은 그동안 무시하던 나치 당을 ‘최후의 희망’ 으로 선택하기 시작했다. 1930년 총선거에서 나치 당은 18.3%, 107석을 얻는 ‘대약진’ 을 기록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국가의 안정보다 오히려 혼란을 부추겼다. 나치뿐 아니라 공산당 역시 77석으로 늘어갔고, 그 결과 여당인 사회민주당이 절대 다수당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면서 안정된 정책실행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결국 1932년의 대통령선거에는 더 이상의 혼란을 막기 위해 어느 당도 입후보가 금지됐고, 결국 84세의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그 자리를 계속 유지해야 했다.

 

원래 의원내각제이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대통령은 상징적인 존재였지만, 의회와 내각이 제 기능을 못하고 경제와 사회 모두가 최악의 상황에 빠지면서 대통령의 권한이 점점 강해졌다. 그러나 노쇠한 대통령의 늘어나는 권한은 결국 교활한 자들의 집권을 위한 도구가 될 뿐이었다. 결국 나치의 편이 된 많은 관료들의 꾐에 넘어간 힌덴부르크는 브뤼닝수상의 사임을 계기로 의회를 거치지 않고도 국정을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비상내각의 설치를 승인했지만, 그 첫 번째 수상이 된 파펜은 이미 히틀러와 나치 당 편이었다.

 

 

 

 [사진] 브뤼닝

 

 

 

[사진] 파펜

 

 

 

게다가 1932년 6월의 선거에서 나치 당은 결국 37% 표를 얻어 제1정당의 자리에 올랐고, 거칠 것이 없어진 히틀러는 결국 자신을 파펜의 뒤를 잇는 새로운 수상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우체국장이나 하면 딱 어울릴” 것이라며 혹평한 힌덴부르크는 그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져갔다. 1933년의 선거에서 나치 당의 인기는 한풀 꺾였지만 여전히 33%의 득표를 기록했고, 공산당이 17%의 득표를 기록하자 오히려 독일 국민, 특히 보수층 사이의 불안은 크게 고조됐다.

 

산당의 또 다른 ‘혁명’ 에 대한 우려와 나치 당의 과격파와 SA의 쿠데타 위협,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는 경제가 맞물리면서 선거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독일 정치의 막후에서는 아무도 예기치 못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수상 파펜은 사임했고, 위협이나 다름없는 -잘못하면 독일이 내전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측근들(대부분이 나치에 우호적인)의 설득에 결국 노쇠한 힌덴부르크가 꺾인 것이다.

 

1933년 1월 30일, 마침내 히틀러는 힌덴부르크에 의해 독일의 수상이 되었다. 물론 힌덴부르크나 부수상이 된 파펜이 히틀러에게 절대권력을 줄 생각은 없었다. 특히 노련한 관료이던 파펜은 히틀러를 언제든지 ‘가지고 놀 수 있다’ 고 믿었고, 두 달 뒤에는 완전히 권력의 코너로 밀어붙일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곧 그는 히틀러를 너무나 얕봤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1933년 2월 27일, 베를린의 국회의사당 건물이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 현장에서 네덜란드 인 전직 공산주의자 루베가 체포당했고, 뚜렸한 증거도 없이 현행범으로 붙잡힌 그는 히틀러에게 절호의 기회를 주었다. 이 화재를 ‘공산주의 혁명의 시작’ 이라고 단정지은 나치 당은 곧바로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바로 다음날부터 공산당원과 사회주의자들이 무더기로 체포됐다. 하루 아침에 공산당은 불법화됐고, 한 달도 채 안되어 공산당이 없어진 의회는 SA의 노골적인 위협 아래 히틀러의 집권을 사실상 4년간 확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사진] 불타는 국회의사당

 

 

 

[사진] 방화범으로 체포된 루베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빠른 속도로 히틀러는 독재권력을 다져나갔다. 이미 1933년부터 강제수용소에 나치의 반대파와 공산주의자들이 감금되기 시작했고, 모든 정치/사회 단체는 금지되거나 나치 당의 하부조직으로 변질됐다. 나치 당과 국가에 대한 어떠한 반대도 뿌리뽑는다는 명목으로 1933년 4월에는 악명 높은 비밀경찰 게슈타포가 창설됐고, 히틀러의 집권 1년도 안 되어 독일은 아무도 나치를 반대할 수 없는 경찰국가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히틀러의 절대권력을 막는 것은 다름아닌 ‘내부의 적’ 이었다. 특히 SA가 문제였다. 나치 당의 성장과 함께 SA도 성장했고, 1934년이 되자 그 숫자는 독일 정규군보다 많아졌다. SA의 지도자 룀은 공공연히 SA가 새로운 독일군이 되어야 한다고 떠들었고, 또 SA의 끊임없는 난동은 히틀러와 나치 당에 대한 거부감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SA를 놔두고는 기득권층과 군부의 완전한 지지를 얻을 수 없음을 깨달은 히틀러는 1934년 6월 30일 밤에 마침내 최후의 결단을 내린다. 히틀러가 처음에는 자신의 경호부대로, 나중에는 SA를 견제하기 위해 키워온 친위대인 SS(Schutztaffel)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1,000여 명에 달하는 SA의 지도자와 나치 당의 친 SA 인사들을 모조리 처형해버린 것이다. ‘긴 나이프의 밤’ 으로 불린 6월 30일 밤의 숙청으로 룀을 포함한 핵심인물 모두를 잃고 무력화된 SA는 해체당했고, 이제 히틀러의 절대권력을 가로막을 그 어떤 장벽도 남지 않았다.

 

1934년 8월 2일, 어떻게든 히틀러의 독재를 막으려 애썼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죽은 지 채 한 시간도 안 되어 히틀러는 대통령직과 수상직을 겸직하는 새로운 직위 ‘총통(Führer)' 에 올랐음을 선언했다. 이제 그의 독재를 가로막을 세력은 단 하나, 독일군만 남았지만, 독일군은 애당초 히틀러의 편이었다. 그야말로 베르사유 조약의 장벽을 허물고 독일군을 재무장시킬 유일한 인물로 여겨졌던 것이다. 8월 2일, 히틀러의 총통 선언을 축하하고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독일군은 베를린 시가를 행진했고, 이것으로 히틀러는 독일에 대한 완벽한 절대권력을 손에 넣었다.

“앞으로 천년간, 독일에는 혁명이 없을 것이다. 천년제국인 제3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을 제1제국, 19세기에 탄생한 통일독일제국을 제2제국, 자신이 만든 나치 독일을 제3제국으로 칭한 그의 이 자신있는 선언은 그가 독일을 얼마나 단단한 권력으로 붙잡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