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hter(Propeller)2/-이탈리아-

불량감자 2010. 1. 15. 05:50

 

◇ Fiat G.50 Freccia


 

* 피아뜨의 차세대 전투기

 

1935년, 이탈리아공군이 차기 전투기로 전금속제 단엽전투기를 선택하기로 결정하고 각 항공사에 차기 전투기를 경쟁을 통해 결정하겠다고 통보하면서 마끼, 까프로니, 레지아네등의 주요 항공기 제작사들간에 열띤 개발 경쟁이 시작되었다. 물론 1920년대부터 이탈리아의 항공산업을 주도해왔던 피아뜨사도 이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단엽기의 설계에 박차를 가했으며 이 계획에는 피아뜨사의 쥬세페 가브리엘리 박사가 주도하는 설계팀이 참가하고 있었다.

 

사실 G.50은 피아뜨사로서는 처음 시도하는 전금속제 단엽 전투기였기 때문에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그동안 복엽전투기에서 사용해온 고정식 강착장치를 새로운 시대에 맞도록 수납식으로 바꾸어 설계해야 했고 개방식 조종석을 폐쇄식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세부 기술상의 난점이 계속 발생했던 것이다. 더욱이 이무렵 피아뜨사가 복엽전투기 CR.42를 함께 개발, 생산하기로 결정하면서 단엽기인 G.50의 개발에 집중되었어야할 자원과 인력이 분산되어 개발은 더욱 더디게 되었다. 특히 이무렵 차기 전투기들에 공통적으로 채택되어 사용되던 840마력의 A.74 RC.38공냉식 성형엔진으로는 공군이 원하는 사양의 전투기를 날리는데는 출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G.50이 애초에 목표로 하던 12.7mm 기관총을 4정이상 장비하는 것이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결국 기수에 2정의 12.7mm 기관총을 장비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 G.50의 최초 양산기 중 한 대로 스페인내전에 파견되어 실전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실험적인 폐쇄식 조종석이 사용되었다. ]

 

피아뜨사의 설계팀은 1937년 2월 최초의 원형기를 날릴 수 있었는데 날아오르자마자 기체의 결함이 속속 드러나면서 테스트 기간이 계속 연장되었다. 특히 기체의 비행안정성이 떨어져 비행중에 한쪽으로 자꾸 기우는 현상이 발생했으며 이로인해 저속에서는 스핀에 빠지기 쉬운 경향이 있다는 것이 지적되었으며, 비행중에 속도가 붙게되면 슬라이딩 방식의 캐노피가 잘 열리지 않아 조종사가 기체에서 탈출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이런 와중에 결국 시험비행 조종사가 착륙도중 스핀에 의한 추락사고로 사망하는 악재까지 겹치면서 기체의 개발은 1938년까지도 마무리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었으며 결국 이로인해 마끼사의 MC.200에게 차기 주력 전투기의 자리를 내주게 된다. 하지만 피아뜨사는 포기하지 않고 시험비행의 결과를 분석해 기체의 조종면에 많은 수정을 가했으며 조종석도 폐쇄식을 포기하고 개방식으로 결정되었다. (라이벌 기체인 마끼사의 MC.200에서도 비슷한 경험으로 인해 폐쇄식 조종석으로의 개발을 포기하고 개방식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G.50은 차기 전투기 성능지표에서 가장 중요한 평가요소였던 최고 속도가 시속 472km로 MC.200의 시속 507km에 비해서 30km이상 뒤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나 결국 차기 전투기 선정 경합에서 탈락할 위기에 몰리게 된다.

 

Fiat G.50 Freccia

엔진: 피아뜨 A.74 RC.38 (840마력)

전폭: 10.96m

전장: 7.79m

전고: 2.96m

기체중량: 1975kg

최대중량: 2415kg

최대속도: 472km/h (고도 6000m)

최대고도: 9835m

항속거리: 670km

무장: 12.7mm 브레다 사파트 기관총 2정 (기수)

 

하지만 이탈리아공군은 차기 전투기 경쟁에서 경합을 벌였던 마끼사의 MC.200과 레지아네의 RE.2000 그리고 피아뜨의 G.50중에서 가장 우수한 성능을 보인 MC.200을 대량생산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음에도 결국 이 경쟁에서 뒤쳐진 G.50과 RE.2000등을 과감하게 탈락 시키지 않았으며 별도의 보조 전투기로서 생산하도록 결정하고 우선인도분으로 200기나 발주하는 실수를 범했다. (이탈리아공군이 이런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된 배경에는 당시 이탈리아 군수산업의 중핵을 이루고 있었던 피아뜨사가 공군관료들에게 뇌물을 상납하며 로비를 벌여 결국 돈에 눈이먼 관료들로 하여금 자사의 항공기들도 계속 생산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아냈다는 뒷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현재까지도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 전장의 G.50

 

어떻든간에 G.50은 존폐의 기로에서 살아남아 계속 생산 될 수 있었으며 이탈리아어로 화살을 뜻하는 '프레치아 (Freccia)'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피아뜨사가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는 마끼사에 상당한 라이벌 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MC.200과 G.50의 경우 두 기체의 외형이 멀리서 보면 거의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매우 유사해서 두 기체 사이에는 한쪽이 다른쪽을 모방했다는 추측을 제기하는 전문가들이 많으며 이것은 매우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성능이 더 우수한 마끼사의 기체를 피아뜨사가 모방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지만 심증만 있을뿐 물증이 없어 이에 대한 진실은 아직까지도 베일에 쌓여있는 상태이다.

 

 

[ 실전부대에 배치된 G.50 - 외형은 마끼 MC.200과 매우 유사하다. ]

 

여하간 G.50은 순조롭게 생산되어 1939년 2월 최초의 양산기 12기가 실험부대에 인도되었으며 이 기체들은 해외판촉을 위해서 스페인과 핀란드에 보내져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1939년 3월중순 스페인 내전의 실전부대에 이 12기의 G.50들이 투입되어 실전테스트를 받았으나 이미 전쟁이 거의 끝난상태여서 G.50은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오히려 스페인공군에 넘겨진 이들 기체들의 상당수가 스핀에 빠지거나 정비불량으로 인해 강착장치가 펴지지 않는 등의 비행사고로 대부분 손실되어 기체에 대한 평가를 더 나쁘게 만들었다. 물론 이탈리아 공군내에서도 주력전투기로 선정된 MC.200의 평가가 좋았기 때문에 약간 성능이 떨어지는 G.50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었다.

 

[ 핀란드 공군에 수출된 G.50 - 겨울전쟁에서 I-16등의 소련기들을 상대로 많은 전과를 올리며 맹활약했다. ]

 

하지만 G.50도 큰 활약을 한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핀란드의 하늘이었다. 1940년 1월부터 1941년 6월사이 핀란드는 이탈리아로부터 싼값에 G.50 35기를 도입했는데, 세계각국의 다양한 전투기를 운용하고 있었던 핀란드공군은 정비사들의 경험과 능력에 있어서 매우 수준이 높아 G.50을 항상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고 있었다고 하며 수준높은 핀란드 조종사들이 이 기체를 몰고 소련과의 겨울전쟁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이것은 그야말로 '중요한 것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 ^ 도대체 핀란드 조종사들이 몰아보지 않은 전투기는 무었일까?)

 

1940년 9월부터는 G.50의 개량형인 G.50 bis형도 생산되었는데 이 형은 동체연료탱크 용적을 25% 확장하고 조종사를 보호하기위해 방탄판을 도입했으며 주익과 꼬리날개의 구조도 변경해 비행성능을 향상시켰으며 폭장능력도 강화해 전투폭격기 용도로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결국 중량증가로 이어져 속도와 상승력의 저하를 가져와 조종사들에게는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G.50bis형은 총 384기가 생산되어 전체 생산기수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게 된다. 또한 기체를 2인승으로 개조하여 조종사 훈련기로 개조한 형도 있었으며 이 훈련기는 총 95기가 생산되었다.

 

이후 피아뜨사는 독일로부터 수입된 1000마력급의 수냉식 DB601엔진을 장착하기 위해 G.50V라는 실험기를 제작한적이 있었는데 최고 속도가 시속 580km로 나타났지만 양산에 이르기에는 몇 가지 치명적인 기술적 문제가 발생해 더 이상의 개발은 진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벌 마끼사는 이 엔진을 성공적으로 이식해서 신예전투기 MC.202 폴고레를 내놓게 되고 이 폴고레는 이후 이탈리아 전투기중 최고 걸작으로 인정받으며 사에따에 이은 부동의 주력전투기로 자리잡게 된다. 피아뜨는 계속 마끼사와의 경쟁에서 뒤쳐지게 되었다.

 

[ 전투폭격기 용도로 개발된 G.50bis형의 측면사진 ]

 

이탈리아공군에서는 1940년 6월부터 51 전투비행단 21, 22 비행대대에 최초로 장비되었으며 프랑스의 코르시카 지역에 대한 공습과 알프스 지역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고, 이후 알바니아와 그리스 침공작전에도 모습을 나타냈다. 이때까지는 이지역의 영국공군 세력이 미미했기 때문에 G.50은 별다른 전투를 경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이 본격적으로 북아프리카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G.50에게 커다란 난관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북아프리카에는 총 76기의 G.50이 투입되었는데 이당시 이탈리아공군은 사막의 환경에서 이런 신형기를 운용해본 경험이 없어 모래먼지가 난무하는 사막지역의 필수품과도 같은 방진필터를 장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며칠만에 여러대의 G.50이 모래먼지로 인한 엔진고장을 일으켜 전열에서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했으며 이런 비전투 손상이 계속 늘어났다.

 

 

[ 북아프리카의 사막에서 작전중인 G.50 - 허리케인에 훨씬 뒤떨어지는 성능으로 대부분 손실되었다. ]

 

결국 1941년 2월에 이르러서야 방진필터가 도입되어 이점이 해결될 수 있었지만 이미 영국군의 대반격이 시작된 이후여서 이미 절반이상의 G.50이 영국공군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하늘과 땅에서 파괴되었으며 생존기들도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사막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이무렵 영국 사막공군의 주력전투기였던 허리케인은 G.50 보다도 시속 50km이상이 빨랐으며 화력도 훨씬 강력했으며 사막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개조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후 G.50은 북아프리카의 패배이후 이탈리아 방어전에서도 계속 사용되었으나 연합군 전투기기들과의 성능격차가 워낙커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손쉽게 격추되었으며 총 생산기 780기중에서 1943년9월 이탈리아가 항복할 무렵에는 단지 4기의 프레치아만이 비행가능한 상태였다고 한다.

 

 

[ 1943년 이탈리아 본토방어전까지도 계속 사용된 G.50의 정비장면 ]

 

 

* G.50 일러스트 *

1939년 스페인내전의 막바지에 파견된 최초 양산기 12대중 한 대이다.

애초의 설계였던 폐쇄식의 물방울형 캐노피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1940년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전투중이던 21 전투비행대대 소속의 프레치아

 

1940년 핀란드에 수출된 G.50의 측면도, 핀란드 공군에서는 좋은 성과를 기록했다고 한다.

 

 

* 마치면서

 

이 G.50 역시 CR.42처럼 이탈리아공군의 총체적 난국을 잘 보여주는 기체로서 차기 전투기 경쟁에서 이미 탈락되었어야할 기체가 이탈리아 군부의 부패와 정경유착으로 인해서 계속 생산되어 살아남음에 따라 결국 막대한 손실만 끼쳤다고 할 수 있다. 피아뜨사는 CR.42와 G.50과 같은 기체를 통해서 자사의 이익을 위해 국익을 외면했다는 비난을 모면할 수 없을 것이다.


 

 

 

Fiat

 

 
 
이번글은 프롭기 특히, 이차대전 항공기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 프랑스, 핀란드, 일본 등의 마이너 항공기에 대해 관심이 깊으신 처리님께서 직접 기고해주신 내용입니다. 그림과 사진도 처리님이 보내주신 사진을 같이 올립니다. 다시 한번 마이너기의 열풍을 몰고 오신 처리님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그럼 이차대전 이탈리아의 항공기 세계로 들어가 볼까요?
 
 
피아트
 
- 피아트사가 지금은 차로유명하지요.. 근데 아마 2차대전시절에는 종합군수업체였나 봅니다. 이태리군의 탱크 피아트2000과 3000도 피아트에서 만들었고(무척 당연한..^^) 전투기도 많이 만들었다 아닙니까? 자 그럼..........-  처리
 
 
 
G50 후렛티아
 
이탈리아 최초의 전금속제 전투기로써, 1936년에 공군요구사양에 의해 개발되어 1937년 2월에 원형기가 처녀비행을 했습니다. 그후 곧 45기가 연달아 만들어져, 그 중 12기가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습니다.
 
1940년에는 개량형인 G50bis가 생산되었는데, 이것은 방풍이 개방식이고, 착륙기어와 날개의 구조가 개조되고 수직 미익의 크기를 늘였고 , 또 연료 탑재량도 증가했기 때문에 항속 거리가 420∼670 km에서 1000 km에 증대했지만 그 외의 성능은 G50와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그 밖에 피아트 A76RC40 엔진 탑재의 G50ter(실험기), 날개폭을 늘려 무장을 강화한 G50bis/A 복좌전투 폭격기, DB601A엔진을 탑재한 실험기G50V가 있었다. 성능적으로는 제2차 대전의 전투기로는 떨어졌지만 개전시부터 118기중 가동 87기가 사용되었습니다.
 
 
 
G 50의 원형기로 생각되는.....
 

 
엔진:A74RC38 공냉 14 기통 840HP
치수:전폭 10.98 m, 전장 8.29m
중량:자중 1959 kg, 총중량 2397kg
최대 속도:472km/-m
상승 시간:-m/-분초
무장:12.7mm×2
비고:Finland에 35기수출.
 

 
 
 
G55 첸타우로
 
G50을 기초로 해 개발된 액랭 전투기로 엔진은 독일의DB605A-1 엔진을 국산화한 피아트 RA1050RC58 엔진을 사용했읍니다. 원형기는 1942년 4월 30일에 처녀비행했고 테스트중, 속도 619km/h를 기록했을 뿐 아니라, 조종성과 운동성도 뛰어나 1943년 초부터 양산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곧 이탈리아가 항복했기 때문에 통산 105기의 생산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G55는 통상형인 G55/0과 G55/1의 달리 MG151(20 mm기관포)×5문을 탑재한 G55/2형과, 983 kg 어뢰를 달수있는 G55/S형이 있었지만 모두 항복 후 독일에서 개발된 것으로 각 1기씩 완성되었습니다.
 
또 전쟁 후에 재건 이탈리아 공군을 위해서 복좌형 G55/B형도 개발되어 소수가 생산되었고 일부가 이집트에 수출되었습니다. (전쟁 후에 전투기형태의 A형도 개발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는 소문이...)
 
격납고 앞의 G 55
 
 
 
G 55의 칵크핏 모습
 

 
엔진:피아트 RA1050RC58 액랭 12 기통 1475HP
치수:전폭 11.8 m, 전장 9.4m
중량:자중 2694 kg, 총중량 3702kg
최대 속도:618km/-m
상승 시간:6000m/7분 12초
무장:20mm×3, 12.7mm×2 
 

 
 
 
 
피아트 G56
 
(이글을 쓰신 처리님이 개인적으로 이태리전투기중 제일 좋아하는 기종)
1944년 3월에 완성한 G55의 엔진을 DB603로 교체한 기체로서 2차대전당시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최우수 전투기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처리님의 개인적 견해가 아니라, 통설이라고 함)
 
엔진 교체에 의해 G55보다 전장이 121m/m 길어져, 중량도 200 kg 증가했지만 최고속도는 684km/h에 달했고 상승력, 운동성도 우수했습니다. Bf109GFW190A와의 비교 테스트에서도 양 비행기를 웃돌아 P-51으로 필적하는 성능이었다고 전해지지만 엔진이 부족했기 때문에 양산 되지 못했읍니다.
 
 
G 56의 미끈한 모습
 

 
엔진:다이믈러 벤츠 DB603A 액랭 12 기통 1750HP
치수:전폭 11.8 m, 전장 9.5m
중량:자중 2894 kg, 총중량 3846kg
최대 속도:684km/7000m
상승 시간:-m/-분-초
무장:20mm×3, 12.7mm×2
비 고 :독일 군정하에서 1기만 완성
 

 
  
 
G 55의 기수 부위의 모습... 이차대전 전투기치고는 앞머리가 매우 공기역학적으로 유연하고 미끈한 모습을 하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