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hter(Propeller)2/-에이스들과의 인터뷰-

불량감자 2010. 1. 18. 07:16

  Ace Interview

 

 
 
 
홈지기 한마디 : 2차대전 독일과 소련의 항공전 양상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끔 해주는 이반 코체더프의 생생한 증언...... ^.^   
 
이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적이었지만, 독일의 기라성같은 에이스들에 대한 존경심이 스며있네요
 
왼쪽에 있는 지도는 어떤 비행시뮬레이션 게임에 나오는 동부전선의 지도화면입니다. 사실, 이차대전 항공전하면, 서부전선의 독영의 공중전 만을 생각하게 되는데, 동부전선의 항공전도 만만치 않죠. 초기엔 기량과 성능에서 뛰어난 독일의 일방적 우세였지만, 소련이 점점 갈고닦은 무서운 조종사들과, 뛰어난 전투기를 선보이게 되었고, 게다가 독일의 기라성 같던 에이스들이 점점 줄어들고, 산업시설 가동에 차질을 빚으면서, 칼자루를 쥔 쪽은 이젠 소련.....
 
 

 
이반 코체더프는 1940년 초 독일 공군과의 전투를 통해, 이차대전 연합군 파일롯중 최고의 격추 기록을 보유한 소련의 에이스다.
 
또 그는 소련 최고의 훈장 "황금 별 영웅 훈장"을 3번에 걸쳐 수여 받은 에이스이기도 하다. 그는 1940년대 초부터 종전이 될 때까지 독일과의 공중전에 참가했다.
 
 
또 이채로운 사실은 코체더프는 독일의 제트 전투기인 Me 262를 격추시킨 유일한 소련 조종사라는 점이다. 그는 마지막 임무비행에서 Fw 190기를 2대 격추함으로써 통산 62기의 격추기록으로 연합군 최고 격추기록의 에이스가 된다.
 
다음은 항공 관련 기자와 이반 코체더프의 인터뷰 내용이다.
 
 
 
기자 : 유년기와 교육과정에 대해 이야기 해주시죠.
 
코체더프 : 나는 1920년 6월 8일, 우크라이나의 오브라체예브스카란 한 마을에서 태어났읍니다. 어렸을 땐 식량이 늘 부족해 배 고픈 날을 보냈죠. 1934년, 7년 의무 교육을 마쳤고, 그때 난 레닌그라드에 있는 예술학교에 가길 원했읍니다. 그러나 희망을 이룰 순 없었읍니다. 대신 쇼스트카의 화학 기술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1940년에 졸업했죠.  
 
 
 
기자 : 비행 훈련은 어떻게 받았죠? 그리고 몇시간 정도 비행시간을 기록해야 한명의 파일롯이 될 수 있나요?
 
코체더프 : 1940년 초에, 비행 군사 학교에 입학했읍니다. 그것은 새로운 제 인생의 시작이었읍니다. 비행클럽에서는 비행에 대한 매우 기초적인 것들을 했었지만, 이 학교에서의 훈련과정은 매우 힘겨운 것이었죠. 약 100시간의 비행시간을 완전히 소화해내면, 한사람의 조종사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읍니다.
 
 
 
기자 : 이차대전 기간중, 소련 공군의 정책이라든지, 전술, 구조에 변화가 있었나요. 만약 있었다면, 그 변화를 직접 느꼈었나요?
 
코체더프 : 독소전 초기 몇달간은 매우 힘들었고, 그것이 전투 비행대의 전술과 구조적인 변화를 요구했었읍니다. 공중전에서 가장 유명한 공식은 "고도-속도-기동-사격"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또 2대의 전투기가 한조를 이루어 기동하는 것이 항공단의 확고해진 기본 전술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에 따라 종전에 3대가 편대를 이루던 것이 2대씩 조를 이룬 4기의 전투기로 이루어진 편대전술로 이행되었죠. 비행대(squadron)는 몇개의 예하 편대로 구성되었는데, 각 편대는 고유의 전술적인 임무를 가지고 있었읍니다. 가령, 추격, 엄호, 공습, 영공방어 등으로요....
 
 
전쟁에서 공군의 역할이 커지고, 규모가 대규모화되면서, 점점 이런 세분화되어가는 경향이 두드러졌읍니다. 그리고 소련 전투기 에이스들이 쓰게된 전법에는 공중전 필드를 수직으로 길게 늘여 뜨려서, 즉 고도가 다른 여러 전투기 편대를 배치하게 되었읍니다. 즉 같은 공간이지만, 여러층으로 여러편대가 활동했죠. 독소전에서 격추된 독일기들의 90 퍼센트 이상은 이런 소련전투기들에 의해 격추되어갔죠.
 
 
 
기자 : 당시 비행교관직을 수행하며, 후방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후  직접 공중전에 참가할수 있는 전선으로 가길 자원했읍니까?. 아니면, 지휘관에 의해 그런 임무가 주어지게 된건가요?
 
코체더프 : 그때, 여러번 전선으로 가도록 해달라고 직접 지원했읍니다. 그러나 전선에선 잘 훈련받은 더많은 1급 조종사들을 필요로 했고, 앞으로의 전투를 위해 실전에 뛰어들기 보다는, 비행교관으로서 더 열심히 후배 조종사들을 훈련시키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이반은 거의 La기 만을 주로 탑승했었는데,
그중 그가 최초로 탑승한 La 씨리즈  La-5기의 일러스트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선에서의 소식도 점점 호전되어가는 양상으로 바뀌고 있었읍니다. 제가 교육시킨 조종사들의 수훈이 들려 올때면 기쁨을 감출수 없었읍니다. 1942년 후반, 나는 새로운 전투기 LaG-5를 접하게 되었고, 곧 이기종을 이용해 비행연습을 시작했읍니다. 드디어 1943년 3월부터 나는 그렇게도 바라던 전선으로 파견되었고, 그때부터 직접 공중전에 뛰어들 수가 있었읍니다.
 
 
 
기자 : LaG-5 전투기를 처음 만났을 때, 첫 느낌은 어떠했읍니까? 그 기종이 당신의 첫 공중전 당시 탑승기였나요? 그리고 La 기종의 특별한 장점이 있었나요?
 
코체더프 : 나는 전투기 일련번호 75번째에 해당하는 LaG-5 전투기를 지급받았읍니다. 사실 동료들이 지급받은 La-5 기들은 모두 3개의 연료탱크를 달고 있어서 좀더 가볍고, 예리한 기동이 가능했읍니다만, 제가 지급받은 전투기는 5개의 연료탱크를 지니고 있어서 좀 무겁고, 육중한 느낌이 드는 전투기였다고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La-5기의 실제 사진
 
 
La기와 같은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는 LaGG-3기는 직접 조종해볼 기회는 없었읍니다. 그 전투기는 수냉식엔진을 가지고 있었는데, 약간의 결함이 있었읍니다. 그에 비해 La-5나 La-7 전투기는 좀더 신뢰할 수 있는 공냉식 엔진을 탑제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수냉식 엔진을 지닌 전투기가 냉각장치에 한방이라도 타격을 받는다면, 엔진이 가열되기 때문에 제대로 기동을 할수 없고, 비행을 포기하거나 기지로 돌아가야하는 취약성을 가지게 되죠.
 
 
 
기자 : 처음 배속된 비행단은 어디였나요. 비행대 사람들은 어떻게 당신을 받아들였나요?
 
코체더프 : 내가 처음 배속된 비행단은 제 240 비행연대였고,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첫 전투를 경험했읍니다. 우리 비행대는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조지아인등,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마치 하나의 큰 가족같은 분위기였읍니다.
 
 
 
기자 : 이차대전 당시 소련의 비행대의 구성은 어떤 식으로 되어있었나요?
 
코체더프 : 사실, 독일공군과의 실전경험은 우리에겐 혹독하고 쓰디쓴 레쓴이었읍니다. 우리는 어쩔수 없이라도 우리의 전술을 바꿔야만 했읍니다. 초기의 공중전 경험을 통해, 우리 소련의 비행연대(regiment, 60기 이상으로 구성)의 규모가 너무 크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그 규모를 줄여, 기동성이 뛰어난 3개의 비행대(squadron) 즉 약 30기의 전투기로 구성된 새로운 개념의 비행연대로 재구성하게 이르렀읍니다. 이렇게 부피를 줄임으로써, 비행대 지휘관들의 부담이 줄어들었고, 지휘가 좀더 용이해졌고, 또 실제로 전투에서도 좀더 유연한 전술이 가능해졌읍니다.
 
 
 
기자 : 카르코프 지역에서 공중전 도중, 당신은 첫 공중전에서 독일 전투기에게 피격당했는데, 당시 당신과 동료 조종사들의 사기는 어떠했읍니까?
 
코체더프 : 사실 첫 공중전에서 난 한대의 적기도 잡지 못했고, 대신 내 전투기는 독일기들의 총알 자국으로 엉망이 되었읍니다. 비행대장은 늘 우리들에게 이야기했읍니다. " 서두르지마라. 공중전은 벼룩이나 잡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난 이 충고를 무시했었고, 공중전에 나가면, 한번 출격에 적어도 2 - 3대의 적기는 격추시킬 수 있다고, 늘 자신했었습니다.
 
그 첫날의 공중전은 이런 내 생각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만용이었는지를 깨닫게 했읍니다. 공중전이 한창 벌어질 때, 난 내 뒤에서 독일의 Bf 110기들이 접근하고 있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읍니다. 물론 곧바로 난 쓰디쓴 경험을 격어야만 한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었죠.
 
그러나 이런 계속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 비행대의 사기는 늘 하늘을 찌를 듯했읍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동료들의 대부분은 집이 독일 점령하에 들어갔고, 우리는 가족들을 구하려는 혹은 복수하려는 마음으로 전투를 갈망했읍니다..
 
 
 
기자 : 처음 조우해 본 독일 공군 조종사들의 기동술이나 사기는 어떠했다고 느꼈나요? 또 시간이 가면서 그들에게도 변화가 있었나요? 특히 1943년에서 45년 사이에 말입니다.
 
코체더프 ; 독일의 메서슈미트 109나 포케볼프 190의 동체에는 사악한 고양이라든지, 에이스 표시, 혹은 해골 문양등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것은 조우하게 될 소련 조종사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려는 의도가 다분했습니다.
 
난 될 수 있는 한 그런것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썼고, 다만 그들의 전술과 공중전 기법을 알아내려고 온 신경을 썼읍니다. 그리고 드디어는 그들 전술상의 취약점을 발견해냈죠.
 
그러나 난 항상 독일 조종사, 특히 에이스들의 용기를 존경했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사실 전쟁에서, 그것도 개전초에 적을 과소평가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으니까요.
 
독소전 초반기엔 독일공군이 항상 우위를 지키고 있었지만, 1943년 8월을 기점으로 동부전선에서 제공권은 이미 소련쪽으로 넘어갔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제공권의 우위는 전쟁이 끝날때까지 계속되었읍니다. 즉 독일의 조종사들은 날이 갈 수록 연령대가 어려졌고, 서둘러 훈련 받고 나온 어린애들이 전투기를 몰고 나오게 된 것이죠. 괴링의 에이스들의 무적행진은 일순간에 그쳤고, 탁월한 에이스들을 계속 잃으면서, 그들의 망상은 연기가 되어 날아가 버린 거죠  
 
 
 
기자 : 그렇다면, 전투기의 성능은 어떠했나요? 독일과 소련을 비교해 볼때 말입니다. 당신이 가공할 만한 전투기라고 느낀 독일의 기종이 있었나요?
 
 
 
이반 코체더프가 이차대전 전투기 중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기종이라 일컬었던 La-7기의 일러스트
 
 
코체더프 : 사실 공중전의 잠재력으로 볼때, 나는 소련의 Yak-3, La-7, La-9 전투기등이 독일의 Bf 109나 Fw 190보다 한수 위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바이올린이 아무리 좋더라도, 연주는 바이올리니스트의 몫이죠. 즉 난  두려워하고 꺼려했던 특정 기종이 있었다고 하기 보다는, 내가 격추시킬 수 없었던 전투기에 탑승했던 독일 조종사들에게 늘 존경심을 느꼈었읍니다.
 
 
 
기자 : 당시 소련 전투 조종사들의 하루일과는 어떠했나요. 하루에 몇번 정도의 임무 비행을 수행했읍니까?
 
코체더프 : 그런데, 하루 일과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못하군요. 왜냐면, 우린 항상 하루종일 비행하다시피 했으니까요. 그 당시 난, 극도의 상황에서 인체의 엄청난 적응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죠. 한번의 공격명령이 떨어지면, 하루에 3번에서 4번이상의 비행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여사였읍니다.
 
 
 
기자 : 1943년 7월 6일, 최초의 격추기록을 달성하셨는데, 그때의 상황을 설명해주시죠
 
코체더프 : 그날 우리 비행대는 독일 융커스(Junkers 87, 슈투카) 급강하 전폭기들을 공격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읍니다. 나는 적기들 중 한대를 골라잡고, 조용히 적기에 접근했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격의 시기를 결정하는 것이었는데, 가장 적절한 거리와 타이밍을 선택해, 일단 사격이 시작되자 모든 것은 눈깜짝할 새에 일어나 버렸습니다.
 
적기는 검은 연기를 뿜으며, 격추되었죠. 공중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적기의 발견입니다. 그래서 조종사들은 비행중에 항상 머리를 360 돌리며, 적기를 찾아야만 합니다. 공중전의 승리는 자신의 전투기와 화력을 가장 잘아는 사람, 그리고 선제공격을 하는 사람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첫격추후 그 다음날인 1943년 7월 7일, 나는 2대의 Bf 109 전투기를 더 격추시켰었죠.
 
 
 
기자 : 쿠르스크(Kursk) 전투에서는 대규모의 항공기가 동원된 전투였다고 들었읍니다. 당시 당신의 비행대의 역할은 어떤 것이었나요?
 
코체더프 : 사실 개인적으로 쿠르스크는 내가 어렸을 때, 세례를 받은 곳이기도 했었죠. 우리 비행대의 주임무는 폭격기 호위 임무와, 그에 수반되는 적전투기 소탕작전이 대부분이었읍니다. 쿠르스크의 전투는 2차대전 중 소련공군의 전술적 사용의 방법과 형태를 완전히 완성시키는 모태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총 전투기중 76퍼센트는 전술 항공용으로, 18퍼센트는 장거리 항공용으로, 나머지 6퍼센트는 영공 방위용으로 운용되었읍니다. 쿠르스크 전투 초반에 소련공군은 독일 항공기 1500 대를 격추시켰고, 소련의 피해는 1000 대였읍니다. 이때 출격 횟수는 70,219 회로 기록되어 있고, 그후에 우리 소련의 반격시기에 접어들면서, 출격횟수는 90,000 회를 넘었었죠. 그중 절반 이상은 지상군 지원 임무였읍니다. 나머지 30 퍼센트정도는 영공의 제공권을 유지하기 위한 임무였고, 이때까지 독일기들 2,200 대를 격추시켰읍니다.     
 
젊은 신참 조종사들은 가끔씩, 어떻게하면 빠른 시간 내에 적기를 잡는 기술을 터득하느냐고 물어 올때가 있읍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조종술과 사격술을 마스터해내는 것 뿐이라고....
 
만약, 조종사가 자유자재로 자신의 전투기를 움직일 수 있다면, 적기를 잡아내는 것은 간단해집니다. 즉 어떻게 적기와의 공중전에서 승리하느냐는 전투기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기동시키느냐에 달려있읍니다.
 
그후 나는 비행대의 비행대장직을 맡게 되었고, 여러대의 전투기를 이끌어야 했고, 공중전 도중에도 직접 그들을 지휘해야 했읍니다.
 
 
 
기자 : 1944년 5월 2일, La-5FN 전투기를 지급받았고, 7일만에 8기의 적기를 격추시켰는데, La-5FN기가 이전 버전인 La-5기에 비해 더 향상된 점은 어떤것이 있었나요? 또 La-5와 La-7과 비교해 보면 어떨까요?
 
코체더프 :  La-5FN은 이전 버전인 La-5의 엔진 성능을 더 향상시킨 전투기였읍니다. 부스터가 장착되어서, 순간적인 가속능력이 향상되었죠. 즉 연료직접분사를 이용해 현대전투기의 애프터버너와 비슷한 기능을 할 수 있었죠. LA-5FN을 이용해 일주일간 격추 시킨 독일기중 5대는 Fw 190기였습니다.
 
La-7 전투기는 한마디로 탑 클래스의 전투기라 할 수 있읍니다. 당대의 뛰어난 항공기중에서도 매우 높은 속도를 뿜어낼수 있었고, 기동성도 민첩했읍니다. 나는 La-7, La-9, Yak-3 전투기는 완벽한 항공기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읍니다. 피스톤 엔진 항공기가 구사할 수 있는 최고의 성능에 도달한 기종들이었죠.
 
 
 
기자 : La-7 전투기의 동체의 많은 부분이 목재로 만들어졌는데, 그런 전투기를 이용해 10개월이상 공중전에서 사용한걸 보면, 틀림없이 강력하고, 믿을 만한 항공기였겠군요. 이 전투기들의 파워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요?
 
코체더프 : La 전투기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믿을 만한 기종들이었읍니다. 나는 La기의 설계자인 세미온 라보츠킨(Semyon Lavochkin)을 만났는데, 그는 항상 내가 이야기하는 조언을 귀 담아 들었습니다.
 
 
 
La-7 전투기의 모델
 
 
La 전투기의 안전성은 매우 뛰어난 것이었는데, 한번은 내가 적기를 추격하며,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한계속도를 넘어 최고속도를 내본 적이 있읍니다. 나는 La기의 내구성을 믿었던 거죠. 그때 시속 700 Km, 434 mph로 속도가 올라갔는데, 내 전투기는 끄떡 없었읍니다.
 
 
 
기자 : Me 262 기와의 공중전에서 승리했던 때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코체더프 : 1945년 2월 19일이었읍니다. 나는 독일 프랑크프르트 북쪽 상공에서 동료인 드미트리 티토렌코(Dmitry Titorenko)와 함께 단 둘이서 임무 비행중이었읍니다. 얼마 후, 350 미터 상공에서 한대의 항공기를 발견했는데,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전속력을 다해 적기의 뒤를 쫓기 시작했는데, 먼저 드미트리가 사격을 시작했죠. 날아가던 Me 262기는 우리쪽을 향해 방향을 바꾸기 위해 좌측으로 선회를 시작했죠. 그런데 직선비행에선 제트기가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선회를 하려는 그 순간은 속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죠. 그 순간이 그 독일 제트기의 최후가 되어 버렸죠.
 
만약 그 전투기가 그대로 일직선으로 날아가기만 했다면, 우린 절대 격추시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시간이 지날수록 속도차 때문에 거리가 더 멀어졌을 테니까요. 즉 속도가 빠른 전투기와의 교전에선 적기가 속도가 떨어지는 상황, 가령, 선회를 한다든지, 상승할때가 공격의 적기가 되는 되는 거죠.
 
 
 
기자 : 1945년 4월 19일, 동료 파일롯 티토렌코와 마지막 임무 비행을 했다고 들었는데, 그 임무는 어땠나요?
 
코체더프 : 1945년 4월 17일 저녁, 우리는 베를린 교외 상공에서 임무 비행을 하고 있었읍니다. 우리는 갑자기 나타난 40 여대의 Fw 190 전투기들과 마주쳤는데, 그들은 모두 투하용폭탄을 적재하고 있었읍니다. 고도는 약 3500 m 가량으로 우리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죠. 우리는 좌측 상방으로 고도를 높이면서, 그들의 뒤쪽으로 접근했읍니다. 물론 구름이 깔려 있어 그들은 아직,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상황이었구요.
 
그들이 숫적으로 많았지만, 그들이 향하는 방향이 우리 지상군들이 주둔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공격하기로 결심했읍니다. 우리는 태양을 등지고, 급강하하며, 그들 대형의 꼬리쪽을 향해 접근했읍니다. 사격은 시작되었고, 그중 한대의 Fw 190기가 지상으로 추락했고, 5 - 6대는 방향을 바꿔 서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읍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적기들은 아직도 예정된 방향으로 계속 비행해 나가더군요.
 
우리는 그들 대형으로 뛰어들어, 대형을 깨버리기로 마음먹었고, 수직 급하강으로 그들에게 달려 들어서는 이리 저리 휘젖고 다녔읍니다.(홈지기주 : 대전 말기라 독일전투기에는  비행시간이 몇 시간도 안되는 어린애들이 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네요. 이렇게 미친듯이 날뛰는 소련기들 2대에게 휘둘림을 당하다니....) 이렇게 되고 보니, 독일 조종사들은 우리를 대규모 편대로 착각했었던지, 폭탄을 아무데나 투하해 버리더군요. 그들은 둥글게 방어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는데, 이 대형은 각 전투기가 자기 앞의 동료의 꼬리를 엄호해주는 모양이 되는것이죠. 곧 그들도 반격해왔읍니다. 나의 윙맨 티토렌코는 아주 멋진 기동으로 내 6시 방향을 추격 중이던 독일 전투기를 격추시켜 주었읍니다. 우리는 그곳을 벋어나 기지로 기수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폭탄을 적재한 또 다른  Fw 190기들이 나타났고, 그중 한대는 급하강후 다시 상승하려고 고개를 쳐들었읍니다. 속도가 떨어진 그 Fw 190기는  우리의 사격으로 말그대로 폭발 후 공중분해되어 버렸죠. 이 전투는 나의 마지막 공중전이었는데 이로써, 나의 격추기록은 통산 62기를 기록하게 된것이죠.
 
 
 
기자 : 코체더프씨는 이차대전 기간중 쓰인 전세계의 전투기 중, 어떤 것이 가장 뛰어난 기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코체더프 : La-7입니다. 난 여러분도 그걸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Reference : Combatism     

  

 
 
   
 
 
 
 
 
 
 
 
 
 
 
 
 
 
왼쪽 가슴에 황금별 훈장을 3개나 달고 있는 이반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