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항공전사 유럽편의 참고문헌/히틀러의 등장

불량감자 2011. 5. 12. 23:40

 

악마성의 극치 히틀러의 아집 - 나의 투쟁

 
[사진] 1923년 히틀러의 무장 봉기... 실패한 히틀러는 투옥했고, "나의 투쟁"을 저술하게 된다.
 
1923년 드디어 히틀러는 자신의 충견들과 "브라운 샤츠"로 유명한 정치깡패들을 앞세워 바이에른 주 정부를 뒤엎고, 중앙 정부에 맞서려는 첫 기도를 시작했다. "맥주홀 사건"으로 알려진 이른바 깜짝 쑈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고, 히틀러는 구속되어 5년형을 선고받게 된다. 재판 도중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히틀러의 일장연설은 독일 국민들에게 "목숨을 내건 애국의 선봉자"로 비치는 생각지도 못한 부수적 효과를 보았다. 5년형을 다 살지는 않았지만, 형무소에 갇힌 히틀러는 자신의 사상을 이리저리 짜깊기한 저서 "나의 투쟁(Mein Kampf)를 저술했다. 히틀러의 말에 따르면, 그의 비인 시절 도서관에 쳐박혀 단기간내 500 여권의 서적을 독파했다고 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대부분은 신비주의, 점성술, 마녀론 등등 허무맹랑한 책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들의 총집합체 나의 투쟁은 편협한 인종론과 게르만족 우월주의의 표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후 히틀러가 집권한 후에는 그의 저서 나의 투쟁은 제 3 제국의 경전이 되었음에 틀림없고, 그들의 만행을 정당화시키는 그들만의 면죄부였던 것이다.
 
 
[사진] 투옥 중인 히틀러가 동료들과의 면회장면
 
그럼 여기서 그의 옥중저서 "나의 투쟁"을 잠시 살펴 보면서 빗나가고 잘못된 히틀러의 아집 덩어리에 대해 알아보자. 히틀러의 세계관은 인종론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즉 세계에는 우수한 인종이 있는 반면, 열등한 인종도 있다는 전제하에, 독일의 게르만 혈통이 가장 상위 클래스의 인종이며, 그 반대 끝에 해당하는 열등 종족으로 대표적으로 유태인과 슬라브족을 들었다. 그리고 황인종과 흑인종은 히틀러의 눈에는 인류의 카테고리에서 조차 제외되어 있었다. 정말 무서운 생각이 아닐수 없다. 히틀러는 이렇게 처음부터 마치 고깃소의 등급을 매기듯, 인류의 등급을 정해 놓았고,  열등한 족속은 게르만 민족의 혈통 유지를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극소수 노동 자원을 제외하고는 아예 멸종을 꿈꾸었다. 히틀러에게 있어 역사란 우수 혈통에 의한 열등 족속에 대한 길들이기식 전쟁의 연속으로 보았고, 대자연에서 약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되듯, 인류 세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또 만약 열등족속이 이 법칙에 항거한다면 이것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모순 덩어리로 보고, 가차없이 싹을 잘라버리려 했으며, 그 과정을 전쟁으로 보았다.
 
[사진] 유태인 강제 집단 거주지 게토의 어린이들....
 
그리고 멸종되어야할 첫 대상 혈통으로 유태인을 지목했다. 히틀러는 유태인은 하나의 국가를 세울 역량도 없으면서, 세계 사회 이곳저곳에 깊숙히 파고들어, 지고지순한 게르만 혈통을 더럽히고, 악덕행위를 일삼는 악의 근원으로 보았으며, 몇년후 자신의 신념을 600만명의 유태인과 폴란드인과 집시 100 만명, 770만명에 달하는 소련의 민간인을 대대적인 대학살하면서 실현해 나가게 된다. 또 비록 후에 서유럽 석권하기 전에 배후의 흉기와도 같은 프랑스와 영국을 함락하기 전까지는 슬라브족의 맹주 소련과 손을 잡기도 했으나, 히틀러는 슬라브족 역시 이전부터 제거 대상으로 보았고, 목적을 위해 적과 야합하는 교활함까지 만천하에 과시한 것이었다. 히틀러가 대소전 직전에 연설한 장문의 글을 보면, 이런 히틀러의 대소관을 잘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나중에 소개하도록 하겠다. 20세기를 뒤흔들었던 많은 사건이 있었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사악한 악마와 같은 무리가 있었는데, 이차대전과  그 중심의 히틀러와 나치 만큼 악마적이고, 잔인성을 과시한 독재자와 집단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한마디로 히틀러는 지금까지 내려오던 보편적인 인간 존엄이라는 통념을 완전히 깨버리는 첫 주자였음에 틀림없겠다.
 
(홈지기 주 :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일선 독일 장병들은 이런 전범급의 나치 수뇌부와는 다른 성격으로 봐야한다. 즉 각 전선에서 연합군과 싸워나갔던 독일의 병사들, 창공을 날았던 조종사들은 나치의 사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조국을 위해 싸운다는 생각을 했으며, 나치의 인종말살과는 대치되는 기본적인 인간적인 통념을 간직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른 말이 필요없이 독일 격추 2위의 에이스 게하르트 바르크 호른이 그의 동료이자 후배인 격추 1위 에이스 하르트만에게 했던 한마디만 들어도 이런 사실을 알수 있다. "부비.... 소련 조종사들도 한때는 아름다운 한 소련 여성의 아이였다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고, 살아가고, 또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지... 우리들 처럼 말이야....")
 
 
혼란과 그를 잠재울 힘

 
[사진]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히틀러. 보헤미아 하사관이라 부르던 히틀러에게 정부를 맡겨야만 하다니...
 
출옥한 후에도 정치적인 신념을 버리지 않은 히틀러는 지속적인 정치활동을 통해 점점 자신의 세력을 확고히 해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1932년.....  히틀러의 나치당은 합법적인 투표를 통해 의석수 320석을 차지해 일약 제 1당으로 등극했고, 나치당의 당수인 히틀러는 1933년 1월 수상 자리를 거쳐. 8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괴벨스의 주장에 따라 전무후무한 절대권력 총통(Fuhrer)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못내 히틀러를 탐탁치 않게 여기며 "나는 보헤미아의 하사에게 독일 전부를 맡길 수는 없다"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뜻과는 정반대로 이미 정세는 굳어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고 지나가야 할 것이있다. 독일이 어떤 나라인가? 당시 독일은 모범적인 헌법 바이마르 헌법을 창안해낸 공화국이 아니었던가? 대문호 괴테와 대철학가 칸트와 헤겔, 악성 베에토벤의 고향으로 사상과 문화에서 세계 제일국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아니었던가? 이런 나라와 국민들이 어떻게 문벌도 학벌도 없고, 알량한 말솜씨와 선전선동의 달인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너무도 초라한 히틀러라는 인물을 최고의 지도자 자리에 올릴 수 있었을까? 그것도 합법적으로.....
 
이 원인은 크게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나는 경제적인 요인이고 다른 하나는 다분히 정치적 요인 때문이었다. (1) 먼저 그 경제적인 요인부터 알아보자. 1920년대 미국은 사상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대호황을 맞았다. 19세기가 유럽 그중에서도 영국이 중심이된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ica 영국적 평화시기)의 시대였다면, 이제 20 세기는 일차대전의 충격으로 유럽이 허덕일때 미국이 고도 성장의 가도로 들어선 팍스 아메리카나(Pax-Americana)의 시대가 도래한 듯 보였다. 미국은 넘쳐나는 생산과 풍요의 극치를 구가했고, 젊은이들도 승용차를 탔고, 고용은 충만되었으며, 모든 기업은 생산시설을 늘이는데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1929년 가을.... 뉴욕의 주가시장은 더 이상의 거품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선언하듯, 갑작스런 주가하락을 기록했다. 단 며칠사이에 주가는 50 퍼센트 이하로 급락했고, 이후 3년간 오를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이제 1930년대초 세계적인 대공황의 모진 삭풍이 시작된 것이다. 유럽과 미국의 성장이 불균형이 축적되면서, 세계 경제는 일방적 확대 성장만 해왔을 뿐, 더이상 그것을 지속시킬 수요는 창출하지 못한 것이다. 실업자는 늘어났고, 더욱 수요는 줄어들고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미국이 이지경이 되자, 유럽 역시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그 중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갚기 위해 미국에 차관을 다수 빌려 쓴 독일의 충격은 말로 표현 못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미국은 자국의 경제 회복을 위해 독일에 빌려준 돈을 회수해 갔고, 그나마 이제 좀 일어나 볼까하던 독일 경제는 다시 파탄의 수렁에 빠져 버렸던 것이다. 독일 실업자수는 600 만명 수준에 달했고, 수출입은 60 퍼센트 이상 감소하고 말았고, 인풀래이션은 극에 달했다.
 
 
[사진] 제 3 제국의 3인... 히틀러, 괴링과 괴벨스...
 
(2)  세계적 대공황의 위기에 처하자 유럽의 각국에서는 이를 이용한 여러 정치적 세력이 나타났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일의 나치스 등 극우 세력과 소련을 위시한 몇몇 국가의 극좌 세력....  게다가 당시 세계 공산권은 좌파 뿐 아니라, 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와도 손을 잡고 연립하는 "인민 전선"을 유도했으며, 대표적으로 프랑스에서 좌파계열의 정부가 집권하기도 했다. 이들은 우파 좌파로 양분되었지만, 하나같이 경제 회복을 제 1 목표로 외치며, 그들의 당세를 확대해갔다. 독일에서도 점점 "반공산주의 반유대주의"를 주창하는 히틀러의 나치스 당이 힘을 얻게 된다. 독일 국민들은 경제적 절망에서 그들을 구해 줄 누군가를 갈구했던 것이다. 배고픔과 실의에서 구원해줄 구도자.....  이런 와중 이들의 귀를 의심할 정도로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한명의 정치가가 있었으니 바로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앞서 언급한대로 청중의 마음을 한손에 움켜쥐는 연설 솜씨와 그의 충견 선전선동의 천재 괴벨스의 두뇌를 이용해, 실의에 빠진 독일인들의 가슴에 "그래 이 자라면,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아니야 확실히 무언가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 이 자 밖에 없다"라는 히틀러 맹신주의를 심어나가게 된다. 이 당시의 상황을 요약해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이것이 1930년대 독일의 정세와 히틀러 집권의 배경을 극명히 설명한 것이다.
 
"독일 내에는 패배한 군대와 군인계급이 존재했고, 모욕당한 독일 국민과 게르만 민족주의가 존재했다. 유대인을 배척하는 인종주의, 국수주의, 배외주의라는 손을 쓸 수 없는 효모균이 존재했다. 거기에 한 사함이 등장해 상처입은 국민, 그들의 이해관계와 열망의 만남이 있었고, 더불어 라디오라는 선전책동의 놀라운 기념비적 무대장치와 대규모 폭력을 통해  이 사나이에 대한 매혹이 국민 내부에 생겨났다."
 
 
 
 
 
(상) 군중에 휩싸인 히틀러... 표현은 그렇지만 1930년대 독일 최고의 슈퍼 스타였다.
(하) 1934년 나치 전당대회 때의 히틀러.... 당시 독일은 히틀러 공신 돌림병이 나도는 듯 보였다.
 
 
 
제 3 제국의 탄생

 
[사진] 불타오르는 국회 의사당... 이 방화사건은 괴벨스의 작품이었고, 정적 숙청의 호기로 이용한다.
 
이런 세계 경제와 정치의 흐름 속에서 히틀러는 독일의 절대 권력을 한손에 움켜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술 더 떠 나치스는 국회 의사당 방화 사건까지 조작하여 일당 독재의 기틀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화재가 난 의사당에 가장 먼저 뛰어든 것은 괴링이었고, 그는 돌격대원들에게 소리쳤다. "이것은 공산당 봉기의 시작이다. 당장 이 주모자들을 잡아 내라. 공산당 의원을 잡아들이고, 그들의 간부와 수하를 사살하라. 오늘밤은 그들의 마지막 밤이 될 것이고 모두 교수형감이다...." 히틀러의 두뇌 괴벨스의 모략에 의한 조작이 틀림없었지만, 이들은 교묘히 반대파 숙청의 호기로 이용해, 처절한 정치적 보복을 일삼았던 것이다. 이로써 나치스는 공산당과 사회당을 불법화하고, 노동조합을 해산하면서 일당 일인 독재의 기반을 완성했다.
 
이젠 이들에 대항할 표면적인 정적도 없었을 뿐 아니라, 독일국민들은 오히려 히틀러에대해 열렬한 지지를 보내왔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치솟는 인플레를 잡아냈고,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보다도 앞서 뉴딜 정책과 같은 산업 간접 자본을 확충하는 정책을 폄으로써, 일차대전후 나락으로 떨어지던 독일 경제에 활력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600 만명에 달하던 실업자 수가 히틀러 집권 2년째인 1935년 들어 3분의 1인 200 만명으로 줄었고, 1937년에는 백만명, 1939년에는 불과 몇만명 선으로 격감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 속에서도 독일은 임금과 물가 안정 위에서 불황의 늪을 빠져나와 호황의 가도에 들어선 것이다. 히틀러는 지금도 독일의 고속화 도로로 유명한 아우토반을 건설하는 첫삽을 떴고, 자신이 디자인한 폭스바겐 승용차 보급에 나섰으며, 괴벨스의 충고로 당시로서는 호사품인 라디오를 전 가정에 보급하여 독일인들의 가슴과 머리마저 장악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1936년에는 우리에겐 눈물겨운 "손기정옹"의 마라톤 사건으로도 유명한 베를린 올림픽까지 유치함으로써 독일은 보란듯이 재기에 성공했다.
 
[사진] 일차대전 패전국 독일의 재기를 보란 듯 전세계에 알린 1936년 베를린 올림픽대회....
 
그러나 1938년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히틀러의 야심이 독일 국내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 전초전으로 1935년 베르사이유 조약을 공식적으로 무시하기에 이르렀고, 재무장에 들어갔으며, 날개가 꺾였던 루프트바페를 일으켜 세웠다. 바로 다음해인 1936년에는 베르사이유조약에 의해 비무장 국경지대로 정해진 라인란트를 장악했으며, 얼마후인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합병을 달성하고야 만다. 원래 히틀러의 고향은 독일 본토가 아니라 오스트리아였었다. 두 국가의 국경 사이의 린츠 근처였고 오스트리아 합병에 대해 히틀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운명이 나의 출생지를 린츠로 택한 것은 신의 섭리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작은 마을은 두개의 독일의 경계에 위치해 있어 이땅을 결합시키는 것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으라는 신의 지시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합병에 대해서는 재밌는 일화가 하나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의 공조를 통해 독일과 이탈리아가 추축 동맹을 천명하게 될 운명이었지만, 1934년 만 해도, 두 국가는 결코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물론 히틀러가 자신 보다 먼저 이탈리아의 독재자로 집권한 뭇솔리니(Mussolini)가 일구어낸 방법을 빼다박은 과정으로 집권했지만(단적인 예로 히틀러의 브라운 샤츠단은 뭇솔리니의 검은 샤츠단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아직은 혈맹의 관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림] 히틀러와 뭇솔리니... 다정한 친구... 그런데 1930년대 중반 둘이 전면전에 들어갈뻔 했다?
 
히틀러가 1934년 6월 뭇솔리니와 첫 상견례를 가졌는데, 여기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병합에 반대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수상 엔겔버트 돌푸스는 뭇솔리니의 친구였고, 오스트리아의 독립은 이탈리아가 지켜줄것을 공헌해 온 바있었으니, 이런 히틀러의 제안에 뭇솔리니는 탐탁치 않았다. 회합이 있은 후인 1934년 7월 25일 히틀러는 자객을 보내 오스트리아의 수상을 암살해버리고 만다. 당시 수상의 가족들은 이탈리아에 머무르고 있었고, 돌푸스 수상은 뭇솔리니를 방문할 예정이었는데, 어이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친구를 잃은 뭇솔리니는 격분했고, 당장 오스트리아 국경에 군대를 출동시켰다. 독일과의 일전이라도 불사할 태세였다. 또 프랑스와 영국에 전문을 보내 독일에 대한 압박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는 반대했지만, 당시 독일은 군사적으로 이탈리아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히틀러는 부랴부랴 암살자를 잡아, 오스트리아로 이송시키고, 독일의 언론에 압박해 오스트리아 수상의 서거를 애도하는 대대적인 발뺌작업에 들어갔다. 이로서 조기에 합병의 위기에 처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의 구원으로 그 명을 몇년 더 연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36년 스페인내전에 이탈리아와 함께 독일이 가담하면서, 둘은 드디어 허니문 기간에 들어갔고, 뭇솔리니는 1936년 11월 로마와 베를린의 추축동맹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되자 히틀러는 "이제 오스트리아 집어 삼켜도 돼?"하고 뭇솔리니에게 물어보았고, 이탈리아의 대답은 "Yes"였다. 그리고 얼마후인 1938년 드디어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 것이다.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히틀러는 이렇게 혼자 되뇌였다고 한다. "못솔리니... 뭇솔리니... 정말 고맙소... 이 일은 내가 살아있는한 평생 잊지 않을 것이요.... 그리고 보답하리다.." 히틀러의 이런 다짐은 대전말 더 이상 쓸모 없어진 갈곳을 잃은 독재자 뭇솔리니를 구출함으로써 지켜진다. 물론 아주 훗날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사진]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 접경 주테덴란트 진주후, 그곳 주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는 독일군... 주테덴란트 주민의 다수가 독일계였으니....독일은 점점 눈앞에 뵈는 게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서 히틀러의 야심이 멈춘 것은 아니었고 그해 9월 체코슬로바키아에 총한방 쏘지 않고 진주해 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처음에는 독일과의 접경 주테덴란트(Sutedenland)만을 노렸지만, 얼마후 체코 전부를 단숨에 집어 삼킨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체코 문제에 대해 우스운 뮌헨 조약으로 거의 합법화 시켜주고 만다. 일차대전을 격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일어선 독일과 전면전만은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알량한 "유화정책"의 오류이기도 했다. 드디어 히틀러는 서쪽과 동쪽의 잃어버린 땅덩이를 되찾았고, 독일 국민들을 기쁨과 흥분의 도가니로 집어넣고는 거창한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제 독일은 천년 이상의 제국을 형성할 것이고, 이것이 시작이다. 서기 962년 오토 1세가 이룩한 신성 로마 제국이 제 1 제국.... 1806년 나폴레옹에게 멸망당한후 1800 년대 중반에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의 수고로움으로 빌헬름 1세의 프러시아 제국이 제 2제국.... 그리고 이제 일차대전 패전을 극복한 히틀러 자신의 대제국이 바로 제 3제국이라 자칭하기에 이른 것이다. 1930년 중반을 넘어 그 말에 접어들면서 유럽대륙은 폭풍전 전야의 불안한 고요함 속에 들게 된다. 그리고 그 태풍의 눈에는 독일과 그의 수뇌 히틀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