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님-5

LA 3.1여성동지회 2015. 12. 23. 00:52

 

유관순열사 순국 제90주년 기념

 

16회 한국여성독립운동사 학술연구특별강연회

 

유관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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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관순(柳寬順, 1902년 12월 16일 ~ 1920년 9월 28일)은 일제 강점기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고흥(高興). 일제 강점기천안에서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1916년 미국인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 초등부 3학년에 편입하고, 1919년이화학당 고등부에 진학하였다. 3월 1일 3.1 운동에 참여하고 3월 5일의 만세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총독부의 휴교령으로 천안으로 내려와 후속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고,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되었다. 일제의 교도소 내 가혹행위로 인해 1920년 9월 28일에 사망했다. 2013년 주일대사관에서 발견되어 국가기록원이 이관받아 11월 19일에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유관순, 옥중에서 타살(打殺)"로 기재되어 있음.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1996년이화여자고등학교는 명예 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의 생가가 복원되어 1991년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유관순 열사 유적과 천안종합운동장 내 '유관순체육관'은 유관순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해방 후 박인덕 등에 의해 기념사업이 추진되었는데, 이 때문에 일부 개신교 세력과 박인덕 등이 자신들의 친일 의혹을 덮기 위한 불순한 의도로 개신교계 학교인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유관순 열사를 부각시켰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1902년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류중권과 어머니 이소제의 3남 1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1905년 집이 근처 탑원리로 이사했다가 1907년 무렵 다시 가족을 따라 용두리로 돌아왔다.


유관순열사의 31독립운동과 정신적 유산

 

일시 : 2010. 3. 22() 10:30-13:00

장소 : 백범기념관 대회의실

   

주최 : 사단법인 31여성동지회

후원 : 국가보훈처, 여성부, 광복회, 서울시

()류관순열사기념사업회


진 행 순 서

 

1. 기념식


사회 : 이 정 옥 (본회 부회장)

 

개식선언  =  사 회 자

국민의례  =  사 회 자

내빈소개  =  주 영 숙

인사말씀  =  김정애 (본 회 명예회장)

축      사  =  김영일 (광복회 회장)

축      사  =  이병구 (서울지방보훈청 청장)

만세삼창 =  본회고문

 

2. 학술연구특별강연회  

 강 연 1 : 자유정신의 화신 유관순 열사

    강 연 : 이 정 은 박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유관순-불꽃같은 삶 영원한 빛저자)

 

강연 2 : 유관순열사의 정신과 문화유산

   강연 : 나 달 숙 교수

(백석대 법경학부)

(백석대 유관순연구소 연구위원)

 

3. 합창 본회 합창단


지휘자 : 김윤태


4. 폐회


점심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자유정신의 화신 유관순 열사

 

이 정 은(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2010년은 유관순 열사 순국 9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90년전 928일 자유의 푸른 하늘을 그리다 서대문 감옥의 높은 담장안에 갇혀 한 떨기 꽃잎처럼 떨어져 숨져 갔습니다. 당시 17세의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1년생이었고, 신장 169.7cm의 키다리 학생이었습니다. 당시 그 나이 평균키는 150cm였습니다. 보통 학생의 머리 위로 어깨 위만큼이 더 있었습니다.


유관순열사는 큰 키로 무엇을 보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18살의 꽃다운 나이에 서대문 감옥의 담장 너머로 마음의 눈으로 키다리 유관순 열사가 본 것은 인도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골이 노래한 동방의 빛이라는 시의 후반부에 붙여 읊었던 키탄자리 제35번의 다음 시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진실의 길은 곳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하여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모래벌판에서 길을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퍼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해방이 된 지도 어언 예순 갑자를 지나고도 다섯 해, 우리는 유관순 열사가 그렸을 그런 나라를 이룩하였는지, 이룩해 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음력으로 1117, 양력으로 환산하면 12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집안은 조선 중기 광해군 복위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 박해를 입은 고흥 유씨 집안으로 그후 경기도 가평, 춘천과 충청도 목천으로 후손이 갈라져 나왔는데, 가평의 문중에서 한말 대표적 유림 의병장 유인석 선생이 나왔고, 목천의 문중에서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열사가 나왔습니다. 이 잡안에서 모두 9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왔습니다

 

유관순 열사가 태어나던 20세기 초 동아시아는 러시아의 극동 진출을 견제하려는 영·미의 일본 지원, 한국을 부정적으로 본 데오돌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등장 등 한국으로서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 조성되던 시점이었습니다.


유열사가 태어나 자란 천안과 목천은 고대로부터 각 세력의 각축장으로서 가장 불안한 지역이었고, 그 중에서도 목천 사람들은 더욱 시세에 영합하지 않는 기질을 갖고 있었는데, 유관순 열사도 이런 지방의 기질을 타고 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말의 불안한 정세는 많은 한국인들을 신흥종교인 천도교나 서양종교인 기독교에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지령리 마을도 20세기 초에 집단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해 감으로써 유관순 열사의 집안 자제들은 기독교 신앙과 신식 교육의 기회를 통하여 근대적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자못 활발하게 발전하여 1907년에는 대지령 야소교회이름으로 82명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어께너머로 혼자 한글을 깨치고 성경구절을 외는 등 총명한 면모를 보여 주었고, 여성교육이 남달리 열성적이었던 미국 여선교사 엘리스 제이 햄몬드 샤프의 눈에 띄어 1915년경 이화학당 2학년에 교비생(장학생)으로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샤프부인, 이화학당 교육, 정동교회의 손정도, 이필주 목사 등 민족주의적 기독교 지도자 등이 유관순 열사에게 민족의식과 근대여성의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괄괄한 성격에 부지런하고 열성적이었던 한편으로 뜨개질과 바느질을 잘 하는 섬세한 면모도 있었고, 또 장난꾸러기 같은 짓궂은 면도 있었습니다

 

19103·1운동에 이르는 10년간 일본의 한국 통치는 말할 수 없는 억압의 공포정치였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조성된 해방과 독립의 국제적 분위기에다가 광무(고종)황제가 갑작스럽게 서거함으로써 조성된 민족적 공분의 분출은 3·1운동이라는 거대한 항일독립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 프라이 교장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담을 넘어 서울 시내의 시위운동에 합류하였고, 35일 학생단 시위에도 다시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던 것을 학교당국이 경무총감부와 교섭하여 석방시켰습니다. 이러한 시위가 있기 전에 도 유관순 열사는 태극기를 온 교실과 기숙사 벽에 붙인다든가, 다섯 친구들과 5인의 결사대를 만들어 태극기와 애국가를 적은 종이를 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등의 애국의식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학교가 휴교하자 313일 고향 천안으로 내려오는 기차안에서도 유관순은 칙칙폭폭하는 기차소리조차 대한독립, 대한독립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할 정도로 오로지 나라의 독립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당시의 친구 이정수 스님 증언

 

이튿날 목천보통학교 200여 학생들의 만세시위가 있었으나 곧 일본 헌병대에 의해 저지되고 더 이상 움직임이 없는 듯 했습니다. 유관순은 부형들을 설득하고, 인근 지역을 돌며 유림대표와 큰 가문의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시위운동에 나설 것을 적극 설득하였습니다. 또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시위운동에 쓸 태극기를 만들었습니다. 331일 밤 인근 각지의 지사들에게 다음날의 거사를 알리기 위해 유관순은 집 뒤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렸습니다. 각지 마을의 산봉우리에서 이에 호응하여 횃불이 그믐밤을 밝혔습니다.     

 

41일 각지에서 병천 아우내 장터에 약 3천명의 장꾼이 모여들었습니다. 오후 1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유관순은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열에 앞장섰습니다. 병천 일본헌병 주재소의 헌병들이 시위대를 제지했고, 총검으로 선두에 선 유관순의 큰 태극기 깃대를 쳐서 부러뜨리고 다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헌병은 상처를 입은 유관순의 머리채를 잡고 주재소로 질질 끌고 갔습니다. 이를 본 유관순의 양친이 끌려가는 딸을 뒤따라가며 필사적으로 만세를 외치자 다시 총검으로 아버지 유중권와 어머니를 찔러 절명케 했습니다.


이때 유관순은 헌병의 손아귀에서 풀려나 피신할 수 있었으나, 얼마 후 붙잡혔습니다. 이날 공주에서는 영명학교에 다니던 오빠 유우석(준석)이 공주 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일경의 칼에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습니다. 아우내 만세시위에는 많은 여성들이 참여한 것도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일본군의 잔혹한 총검에 많은 사상자가 생겨나자 여성들은 치마에 냇가의 돌들을 싸와 일본군을 행해 던지며 대항했습니다

  

유관순은 공주재판소에서 징역 7년형을 받았는데,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 대해 항의하고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던 때문에 중형을 받았습니다. 유관순을 비롯한 아우내 시위 주도자들은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유관순은 3년 형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최종심인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유관순은 삼천리 강산이 어디인들 감옥이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상고를 포기했습니다. 서대문 감옥에 수감된 유관순은 계속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다 많은 고문을 당했습니다.


1920313·1운동 1주년을 맞아 유열사는 다시 감옥안에서 독립만세를 선도하였습니다. 이때 다시 많은 고문을 받아 방광이 파열되었습니다. 아우내시위 때 입은 상처와 그간의 갖은 고문에다 발광파열이 겹친 유관순에게 일제 당국은 치료를 거부하고 방치하였습니다. 유관순은 고문과 상처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1920928일 서대문 감옥 안에서 숨졌습니다.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기념 특사로 형기가 1년 반으로 단축되어 석방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이태원 공동묘지에 쓸쓸히 묻혔으나 일제 군용지 개발로 인해 무덤조차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그녀의 고향 현 천안시 병천면 지령리에는 생가와 기념교회, 사우, 기념관이 있습니다

 

유관순은 비록 17세에 3·1운동에 참여하여 18세에 옥중에서 순국한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한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다음과 같이 길이 기억될 귀감이 되어 주었습니다.

 

첫째, 유관순은 자유정신의 실천가였습니다. 비록 어린 소녀였으나 인간사회에 자유는 생명과 같으며, 나라의 독립은 자유를 보장하는 관건임을 확신하고 서울과 고향 병천에서 3·1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심지어 옥중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켜 자유와 독립을 외쳤습니다.

 

둘째, 유관순은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가졌습니다. 이화학당에서부터 아우내장터, 그리고 공주와 서대문 감옥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독립운동은 일시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끝까지 독립을 위해 행동을 계속했고, 폭력적 탄압 앞에서 좌절하거나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결코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고문과 투옥에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인류의 자유와 양심의 역사에 고귀한 발자국을 선명하게 남겼고, 그녀를 탄압한 일본 제국주의는 그녀로 인해 역사에 지울 수 없는 부끄러움의 자취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셋째, 유관순은 원칙에 충실하였습니다. 유관순은 독립운동에 있어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와 함께 비폭력이라는 민족대표의 독립운동 원칙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그녀의 부모가 시위현장에서 목숨을 잃는 참극을 당했으나 폭력에 호소하지 않았으며, 적개심이 그녀의 진정한 동기가 아니었으며, 자유, 정의와 인도, 인류평등의 이상이 진정한 동기였습니다.


넷째, 유관순은 인간적으로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옥중에서 함께 생활한 어윤희 여사는 그 안에서 일하는 데 관순이가 모든 사람들한테 순진한 마음으로 대하면서 일했습니다. 모자 같은 것을 뜨고 셔츠 같은 것을 뜨고 너무 충직스럽게...하나를 뜨더라도 성의껏 일을 해서 모든 사람들한테 신임을 받았습니다. 어린애가 무슨 일이든지 충직하고 책임감이 강하여 그와 같은 사람을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엄동설한의 감옥안에서 그녀 자신이 추위와 외로움, 배고픔에 고통받는 중에서도 아이를 낳은 여죄수를 위해 젖은 기저귀를 몸에 감아 차고 녹여서 주는 등 친절한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믿는 바와 행하는 바가 일치하는 정금(精金)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제는 역사가 된 유관순 열사의 무등을 타고, 그녀가 감옥의 담장 밖 푸른 하늘을 보며 그렸던 자유롭고 행복한 조국의 상을 실현시키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소한 일본보다는 더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할 역사적 책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고자료

 

1) 유관순열사의 생년월일

유관순 열사의 출생년도는 많은 책과 기사 등 서술에서 1904년으로 알려져 왔다. 이것은 유관순 열사가 이화학당 고등보통과 1년생일 때에 삼일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에 바탕이 되어, 1945년 광복 당시에 고등보통과 1년생이라면 나이가 16세인 학생으로 학교를 다녔기에 유관순 열사도 나이가 16세 때에 만세운동을 불렀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1919년을 16세로 하여 출생 년도를 계산하게 하면 1904년이 되므로, 유관순 열사가 1904년을 출생하였고 1919년에 16세가 되었을 때에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것으로 기술되었다.


그러나, 판결문, 수형자기록표, 제적등본 등의 기록을 근거하여 살펴보면 모든 기록이 1902년이 출생년도가 된다. 따라서, 유관순 열사는 만17세가 되었을 때에 삼일 독립운동에 참여 한 것이다.(이러한 정리에 따라 2002년에 유관순 탄신 100주년 행사를 할 수가 있었다.)


유관순 열사의 생일도 호적이나 수형자기록표를 근거하지 않고, 해방 후 다른 인사들의 증언으로 출생일을 정하여 315일로 기록 된 것이 많았다. 이것도 제적등본을 찾아보면 출생일은 1117일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제적등본의 기록은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 오빠, 동생들의 제적등본의 출생일과 고흥유씨 족보의 출생일과 일치하게 되는 것으로 보아서 유관순 열사의 출생일 기록이 제적등본 기록을 기본으로 해야 됨을 알 수 있다.


이 날짜는 음력날짜로 보이는데, 그 당시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출생일을 양력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음력으로 기억하고 있기에 호적에 출생 신고시에 음력 출생일을 양력 출생일로 환산하지 않고 음력 그대로 출생 신고를 하였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제적등본의 출생일과 족보의 출생일이 일치하는 것을 보아도 음력 출생일을 그대로 출생 신고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관순 열사 제적등본의 출생일이 1117일로 확인되므로, 1117일을 음력의 출생일로 본다면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게 되면 1216일이 양력 출생일이 된다. 그러므로 유관순 열사의 생년월일은 19021216일로 고증할 수 있다.

 

2) 유관순열사의 순국일

경성복심법원 판결문과 서대문형무소의 수형자기록표와 유관순열사의 아버지인 유중권씨의 제적등본 등의 자료에는 유관순 열사의 순국일이 나타나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증언에 의거하여 유관순 열사의 순국일을 1012일로 정하여 매년 천안시에서 추모행사를 해왔었다.


1920년에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순국에 관한 공문서상(호적)의 기록은 유관순 열사의 부모가 191941일 병천 독립 만세운동 현장에서 모두 순국하였기 때문에 유관순 열사의 부친인 유중권이 호주로 된 제적등본에서는 1920년에 순국한 유관순열사의 순국내용이 당연히 기재될 수 없었다. 따라서, 열사의 순국에 관한 내용은 유관순 열사의 부친인 유중권의 호주 상속자인 유우석의 호적에서만 기재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오빠 유우석의 호적을 찾아 유관순 열사의 순국에 관한 내용을 찾고자 유우석이 호주로 나타나 있는 제적등본을 확인 하였다.


유우석이 호주가 된 제적등본이 다행이 천안시 동면 면사무소에 소실되지 않고 남아있어 유관순열사의 순국에 대한 호적상의 기록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여기에 유관순 열사는 1920928일 오전 820분 경성부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하였다는 기록이 있었다. 이로써 그동안 1012일로 잘못 알려져 왔던 유관순열사의 순국일을 1920928일로 고증할 수 있었다. 이 고증으로 그동안 유관순 열사의 추모 행사를 1012일에 거행해 왔으나, 2005년부터는 유관순 열사의 순국일 추모 행사를 928일로 변경하여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3) 고등법원의 항소문제

1919년 당시 재판 절차는 지방법원의 판결과 복심법원의 판결과 고등법원의 판결인 삼심제도가 있는데, 유관순열사의 판결문은 오직 경성복심법원 판결문만 발견되고 공주지방법원의 판결문과 고등법원의 판결문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중에서 특히 제1심인 공주지방법원 판결문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아 형량을 비롯하여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었으나,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자료집5권에서 유관순 열사의 복심 법원 판결문을 번역하여 소개하였으며 고등법원에 항소하여 19199월 기각되었다는 기록이 되어 있어서 유관순 열사의 고등법원 판결문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국가기록원에서는 유관순 열사의 이름으로 고등법원의 판결문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유관순 열사가 고등법원에 항소를 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고등법원 판결문에 유관순 열사의 이름이 없어 찾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유관순 열사와 같이 재판을 받은 조인원, 유중무 이름으로 고등법원 판결문을 찾아보면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예상과 같이 조인원 유중무 이름으로 고등법원 판결문을 확인하여 보니, 조인원 유중무의 이름의 고등법원 판결문이 있었다. 이 고등법원 판결문에서 유관순열사의 이름이 없는 것을 확인했고, 유관순 열사의 이름이 없기에 유관순 열사는 고등법원에 항소를 하지 않았음을 밝힐 수가 있었다.

 

4) 유관순 열사의 공주재판소 1심 형량

유관순 열사는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이 확정되어 복역했다. 그러나 유관순 열사를 비롯하여 병천 동면계 인사들의 공주지방법원 판결문이 발견되지 않아 1심 형량이 7, 3, 6년 등 다양하게 형량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근 국가기록원에서 형사 사건부라는 기록을 발굴하였다. 이를 통하여 공주지방법원 판결 형량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의하면 유관순 열사의 1심 형량은 5년이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사실로 밝혀졌다. 관련 인물들의 형량은 다음과 같다.

 

유관순 5, 조인원 5, 유중무 5, 김상훈 5, 김용이 4, 조병호 4, 백정운 4, 신씨 3, 조만형 1년 징역 20원 벌금, 박제석은 1년 징역 20원 벌금, 박봉래는 6, 유도기(柳道基)1년 징, 이근문(李根文)1년 징역 20원 벌금, 서병순(徐丙順)1년 징역 20원 벌금, 강홍식(姜弘植)40원 벌금, 유애덕은 기소 중지되었다.

 

5) 용두리 교회의 문제

그동안 용두리의 감리교회는 1908년에 처음 소개되어 교회가 생겼다고 증언에 의해 알려져 왔었다. 그러나 1907년에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호응하고 있을 때에, 용두리 교회에서도 1907년에 대지령야소교회의 이름으로 국채보상운동의 성금을 모아 전달한 사실이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어 이미 1907년에 교회가 있었던 것을 확인 할 수가 있었다.


또한, 당시 신문자료에 의하여 의병과 일본군의 전쟁에서 교회가 불타는 사건도 파악할 수가 있고, 그로 인해 1908년에 다시 교회를 세워진 사실을 용두리 교회가 처음으로 설립된 것으로 잘못 파악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용두리 교회는 설립 년도를 1901년까지 올릴 수 있었으며 기독교에 대한 천안의 최초 교회로 용두리 교회라고 고증할 수가 있었다.

 

6) 유관순열사의 신장

수형자 기록표를 살펴보면 유관순 열사의 신장이 56(169센치메터)로 나온다. 이를 그 당시의 여성의 평균 신장과 비교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 관보에 기록된 것을 확인 비교하여 당시 여학생 평균 신장이 5(150센치메터)이므로 유관순 열사는 여성의 평균 신장보다 약 19센치미터나 큰 여학생이었다. 유관순 열사는 큰 신장을 가진 여장부라고 할 수가 있다.

 

7) 191931일 학교에서 일 증언

영국 여류 화가인 엘리자베스 키스가 19193월 하순에 한국을 방문하여 6개월여를 머물면서 자기가 그린 수채화와 그 당시에 한국에서 일어난 일과 경험을 1940년도에 올드 코리아라는 책으로 저술하였고, 이 책은 1946년 출판되었다. 이 책을 도서출판 책과 함께에서 2006년에 한국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이 책의 내용 중에 저자인 엘리자베스 키스가 이화학당의 교장 선생인 프라이에게 들은 이야기를 소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나는 급히 대문으로 내려가 등을 문에다 기대며 슬퍼하는 학생들을 빤히 처다보았다. 용감한 학생이 나에게 항의했다. 그 학생의 아버지 어머니는 시골에서 살해되었고, 유일한 오빠는 칼에 찔리고 매를 맞았다. 그 학생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다른 학생들이 일제히 합창을 했다. ‘나가게 해 주세요. 나가게 해 주세오, 제발!' 그 눈물 흘리던 여학생은 마침내 빠져나갔고, 그 다음에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는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키스, 엘스펫 K. 로버트슨 스콧 지음, 송영달 옮김,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 책과 함께, 2006, pp. 161-162)

 

이 이야기에서 학생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으나 모든 정황을 보면 유관순열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이를 통해서 보면 191931일에서도 유관순 열사는 주위의 학생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였음을 증거해 주는 것으로 유관순 열사의 치열한 독립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생각된다.


                   유관순 열사의 정신과 문화유산

 

나 달 숙(백석대학교 법경학부 교수, 유관순연구소 연구위원)

 

. 머리말

 

유관순열사가 생존하던 시기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여 식민통치의 강도를 더해가는 암울한 시기였다. 일제는 조선을 병탄한 후 강력한 식민지 탄압정책으로 칼을 찬 헌병을 전국에 배치하여 헌병경찰통치를 하였고, 조선의 문화나 교육정책에 대해 탄압통제를 하였다. 열사의 사후인 1930년대 이후에는 언어탄압, 민족문화말살, 민족정신말살, 역사왜곡 등을 통해 철저하게 민족을 말살하기 위한 정책을 펴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민족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애국지사들은 목숨까지 내놓으며 나라를 독립시키고자 하였다.


일제의 강한 식민탄압이 자행되던 당시 유관순 열사는 그토록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었을까? 그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이었을까? 독립에의 희망이 점점 멀어져가는 듯했던 당시 유관순 열사로 하여금 3.1만세운동을 이끌게 하였던 것은 바로 우리 민족을 이끌어 오고 있는 정신적 바탕에서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혹자는 유관순열사의 독립정신과 순국정신의 연원을 신라 화랑도 정신에서 찾기도 하고, 국가위기시마다 봉기했던 의병활동에서 찾기도 하며, 혹은 18세기 실학정신에서 찾기도 한다. 화랑의 정신이건, 의병활동정신이건, 실학정신이건 모두 민족사 전체에 면면히 흐르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 문화유산으로서 후손인 유관순 열사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더불어 유관순 열사가 생존했을 당시 상황과 열사의 환경 그리고 이화학당에서의 교육, 어린 시절부터 믿어 온 기독교 신앙, 개인적인 성품, 가정교육과 가풍 등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유관순열사의 기록이 거의 없는 것은 그녀의 짧은 생애와 유관순 열사가 사망할 때부터 해방되기까지 일제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도록 유관순열사에 대해 언급을 하지 못하도록 한 일제의 억압에도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사의 위대한 행적을 하나하나 찾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유관순열사가 짧은 생애동안에 보여준 위대한 정신은 그 어느 것보다도 강한 것으로 그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창작활동은 계속되어져야 한다.


유관순 열사는 당시에도 지금도 우리 민족의 영원한 위인이며 우리가 지향해 나아갈 표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관순 열사의 정신을 기리고 열사의 행적을 찾고 그와 관련한 문화유산을 탐지하는 일은 우리가 지닌 소중한 가치를 찾는 활동인 것이다이러한 차원에서 유관순 열사의 정신적 바탕을 찾아보고 유관순 열사와 관련한 문화유산을 고찰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살펴보고자 한다.

 

. 유관순 열사의 사상과 정신

 

1. 유관순열사의 사상형성의 배경

 

1) 시대적 배경

 

유관순 열사가 출생하기 전후로 일본은 조선에 문호개방의 강요를 시작으로 계속적인 침략행위를 해왔다. 우리 민족의 거족적 항일투쟁인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은 계략적으로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서서히 달성해 갔다. 서구 열강은 동아시아로의 서세동점시대를 형성해나갔고 일찍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1876년 한국과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한일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경제적 침투와 정치적 음모를 감행해 한국에의 침략을 노골적으로 가시화시켰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은 제물포조약을 맺어 한반도에 주둔지 병권을 장악하였다. 1884년에는 박영효, 김옥균 등 개화파를 후원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은 더욱 강한 경제적 침탈을 시도하고 청은 한반도에서의 종주권 행사를 더욱 강화해갔다. 1894년 수탈에 시달리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봉기하게 되자 조선왕조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해 왔다.


청이 조선에 들어오자 텐진조약을 내세워 일본도 조선땅에 출병하게 되었다. 그들은 일본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라는 구실 아래 해군과 육군의 대부대를 파병했고, 이어 인천-서울 간의 정치적·군사적 요충을 장악했다. 일본군의 침입에 당황한 조선정부는 갑오농민전쟁이 이미 진정되었음을 이유로 청·일 양군의 동시철병을 요구했다. 일본의 오오토리[大鳥] 공사는 본국의 훈령에 따라 갑오농민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과 조선의 내정개혁을 구실로 철수를 거부했다.


조선정부는 일본이 철수해야 비로소 내정개혁을 실시할 수 있다고 하여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일본은 723일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쿠데타를 통해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725일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도발했고, 이 싸움에서 청이 참패를 당하였다. 이 청일전쟁은 이후 동아시아 3국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청일전쟁으로 얻은 막대한 배상금, 과중한 세금수탈로 만들어진 군사비, 식민지 타이완으로부터 얻은 이윤, 전쟁으로 축재한 자본가의 이윤 등을 바탕으로 전쟁 후 일본자본주의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했다.


반면 조선은 갑오농민전쟁으로 표출되었던 변혁의지가 일본군에 의해 무력으로 압살당함으로써 자주적 개혁이 좌절되었고, 일본 및 제국주의 열강의 수탈대상이 되어갔다. 또한 열강의 중국 분할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동아시아에 제국주의시대의 막이 열린 것이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한국을 독점하려던 일본의 계획은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에 의해 일시적으로 저지되었다. 일본은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켜 민비를 살해했으나, 조선은 반일 의병투쟁을 야기함으로써 더욱 수세에 몰렸다. 또한 18962월 친러파에 의해 아관파천이 단행되고, 친러정권이 수립되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일본이 여전히 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청일전쟁 후 조선의 대외무역에서 일본은 수입의 60~70, 수출의 80를 차지함으로써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권면에서도 열강에 분할되는 이권을 최혜국대우 조항에 의해 획득하거나 위협함으로써 확보해 갔다. 일제는 조선에 대한 경제적 지위를 확실하게 굳히면서 이를 군사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대 러시아 전쟁을 상정한 군비확장에 주력했다.


러시아와 일본 간에 전운이 감돌자, 대한제국정부는 1904121일 국외중립을 선언하고 열국에게 통고했으나,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서울에 진주하고 공수동맹의 성격을 띤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게 하였다. 이때 열사의 나이는 3세였다. 일본은 병력과 군수품의 수송을 위해 경부·경의 철도 건설을 서둘렀으며, 한국의 통신사업을 강점하고, 대한제국정부로 하여금 러시아와 체결했던 모든 조약과 러시아인에게 부여했던 모든 이권의 폐기 혹은 취소를 공포하게 했다. 일본군은 5월초 압록강을 건너 구연성(九連城)과 봉황성을 함락시킨 다음 랴오양[遼陽]으로 향했고 펑톈[奉天]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뤼순항을 함락시키고 대한해협에서 일본해군과의 격전에서 러시아는 참패를 당함으로써 전세를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제1차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여 전쟁을 더이상 지속할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권고를 수락하여 일본과 포츠머드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러일전쟁은 끝이 났다.


동아시아에서 식민지분할을 위한 열강간의 세력각축의 결과였던 러일전쟁으로 한국은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 내지 묵인 하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일본은 19051118일 조선과 소위 을사늑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보호라는 미명하에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고종황제는 이 조약의 부당함을 국제적으로 호소하려고 하였으나 모두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907724일 일제는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내정권까지 강제로 빼앗았다. 통감부는 신문지법과 보안법을 공포하면서 언론탄압과 집회결사의 자유를 억압했다. 급기야 1910822일 이완용과 데라우찌는 소위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일제는 총독부를 두어 무단식민통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제는 한일합병을 전후로 농업어업광업상업 등 산업을 식민경제체제로 바꾸고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미명으로 착취와 박탈을 일삼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제는 이에 참전하였고, 1917년에 러시아는 혁명이 일어나 동맹국측과 단독강화를 하여 전선에서 이탈하여 소비에트 정권을 확립하였다. 19181월에는 미합중국의 윌슨대통령이 소위 14개조의 강화조약을 발표하였고 사실상 강화회의에서 주도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세계사적 국제정세 속에서 지배와 식민치하에 있던 나라들은 국가의 주권과 독립을 회복하려는 기운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3.1운동은 일어났지만 이는 우리 민족이 주체가 되어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었고 이 만세운동은 전국각지는 물론 일본, 만주, 러시아, 중국, 하와이, 미국 등 해외에 흩어져있는 동포들에게 독립정부의 수립으로 결실을 맺게 하였다. 이토록 어려운 식민치하에서 유관순 열사는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고 국가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2) 지역적 배경

 

천안시 병천면에서는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활약한 의병이나 독립운동가들이 특히 많이 배출된 곳이다. 또한 유관순열사가 태어난 고장은 충절과 절개로 유서가 깊은 곳이었다. 이곳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는 전통적 유교이념이 뿌리박힌 곳으로 충신열사로 활동한 인물들과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우선 조선 선조때 의병으로 활약했던 김시민 장군(1554~1592)을 들 수 있다. 그는 조선명종 91554827, 지금의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부락에서 고려충신 충렬공 김방경장군의 12대손인 김충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선조 11년인 1578년 무과에 급제하여, 1581년 부평부사가 되고, 1591년 진주판관이 되어 임진왜란 때 진주목사 이경이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 수행하였다.


진주성을 침략하는 왜적을 여러 차례 크게 무찔렀고, 진주성에서 3800여명의 병력으로 침공하는 2만여명의 왜군과 싸워 물리쳤으나 안타깝게도 적탄에 맞아 39세 나이로 별세하였다. 사후에 선무공신 2등에 추록되었으며(1604), 영의정에 추봉되고 상락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충북 괴산에 충민사라는 김시민사당이 있다. 2004410, 병천면 가전리 4601번지 일대는 기념물 제166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1894321, 천안시 병천면 유두리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였던 조병옥박사(1894~1960)가 있다. 조병옥박사의 부친 조인원도 아우내 만세운동 당시 유관순 열사와 주도적 역할을 한 바 있다. 그는 배재학당을 거쳐 평양숭실전문학교를 거쳐 미국 콜롬비아대학을 졸업하였다. 1914312일 미국에서 신한민보에 독립의 희망봉이라는 기고문과 319일에 동양척식


1) 조병옥 박사는 나는 나의 선친의 혈통을 받아 정의감이 강한 데다가 이와 같이 토질적으로 고집이 세고 강직하고 순박한 사람들만이 살고 있는 목천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나의 성격도 그러한 혈통과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아 후천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이정은, 유관순, 류관순열사기념사업회, 2004, 70).


회사와 한인 실업계의 중대한 관계라는 논설문을 실어 자유·독립·항일·애국 사상을 강하게 나타내었다(박충순, 2006). 귀국 후 신간회 조직에 참여하여(1927),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정부수립 후 내무부장관을 지내고(1953),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선거유세 도중 신병으로 사망하였다. 1995420일 생가가 복원되하였다.


그리고 상해임시정부의 의정원 원장·주석을 역임한 석오 이동녕(1869~1940) 선생이 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선생의 출생지인 목천읍 동리 79-2번지 일원에 기념관을 설립하였다. 전시관 입구에는 석오의 흉상과 태극기를 배치하고, 석오의 일대기를 통해 삶과 사상을 알 수 있는 연대별 활동상을 소개하고, 연보·가계도, 삶과 사상 등을 소개하는 석오 이야기와 함께 을사조약 무효화 운동, 독립협회의 개입, 서전서숙 설립과 신민회 활동, 신흥무관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 임시정부 활동 등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 밖에 선생을 만나 그의 나라 사랑 마음을 확인하도록 어록과 기념사진관을 설치했고 옥외에 왜가리 관찰대와 주차장·의자 등 편익시설 등을 갖췄다. 손자인 이석희씨가 보존해 왔던 이동녕 선생 친필 휘호와 서신, 임시정부 문서, 초상화 등 유품의 일부도 전시해 있다.


유관순열사의 고향 병천에서 멀지않은 진천에는 신라에서 화랑으로 활동하고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던 김유신의 고향으로 김유신의 태묘가 있다그 밖에 신흥무관학교 교관·독립군 참모장을 지낸 이장녕(1881~1932), 풍기광복단을 조직하고 활동한 유창순(1881~1944) 등이 이곳 출신들이다.


주변에 이렇게 국가를 위해 활동한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은 주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유관순열사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 바가 있다.


목천은 지금의 병천으로 지리적으로 천안·전의·진천·조치원 등과 40~50리 정도 떨어진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평야지대이다. 이곳은 서울과 공주를 잇는 내륙교통의 중심지역할을 하였고 이로 인해 지역 산물의 집중지가 되어 자연발생적으로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입지여건은 외부지역으로부터의 소식을 빨리 접할 수 있었고 일찍부터 외부의 문물이나 제도를 유입하기에 좋은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병천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의병·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이곳은 일본군이 양민을 의병·독립군으로 오해하여 사살할 정도로 일본도 경계하는 지역이었다.


유관순열사가 자란 병천에서는 41일 병천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이전에도 목천면 보통학교 학생의거(314), 입장면 양대·입장시장 만세시위(320, 28), 천안면 시위(329), 풍세면 횃불시위(330), 성환면 만세시위(331) 등이 일어나는 등 3·1운동 당시 시위 횟수가 11번에 동원 인원이 6,400명이었고, 사망자수가 82명에 이를 정도였다(천안문화원, 1994).


유관순열사는 이곳 고향 병천에서 의병활동과 독립군의 활동을 자연스럽게 들으면서 성장하였고, 이러한 의병과 독립군의 활동은 유관순열사에게 큰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애국지사들의 활동과 3·1만세운동을 통한 당시상황은 유관순열사에게 독립을 향한 마음을 길러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3) 가정적 배경

 

유관순열사는 190212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아버지 흥양유씨 중권과 어머니 전주이씨 소재 사이의 삼남 이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관순열사가 태어났던 이 집에 열사의 집안이 정착한 것은 1695년경이다.


유관순열사의 아버지 유중권은 철저히 유가를 고수했다. 그는 할아버지 유윤기와 숙부 유중무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에도 전통적인 유학을 고수하는 유가가정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였다. 그래서 유관순열사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웃어른을 잘 모시려는 마음, 부모에 효도하고 예를 중시하는 것을 가정에서의 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다.


유관순열사의 아버지는 철저한 유교사상을 지니고 있었으나 이는 그동안 내려오는 가문의 풍습을 지키려는 데서 그러한 것이었고 나라의 독립과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는 남보다 앞선 선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유관순 열사와 그의 오빠를 각각 이화학당과 영명학교에 보내어 서양식 교육을 받게 허락하였던 것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유관순열사는 가정에서 충효예와 선진교육정신의 영향을 받게 되고 이러한 정신은 훗날 유관순열사의 생활과 독립만세운동에서 그대로 실천되어 나타난 것이다.


당시 신분차별과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유관순에게도 아들과 동일하게 교육을 시킨 것은 당시 유관순열사의 부모님이 시대를 앞서가는 평등의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관순열사의 전기에 의하면 유관순열사의 부모님간의 대화에서 어머니가 유관순열사를 아들로 태어났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자, 아버지는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태어났고 활동하는 시대가 되었음’(전용택, 1953)을 강조하고 유관순열사의 됨됨이를 알고 장차 큰일을 할 것으로 생각했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유관순 열사는 위로는 언니 계출, 오빠 우석이 있었고, 아래로는 동생 인석, 관석이 있었다. 아버지 유중권은 지령리에 대대로 살아오는 이름 있는 유씨 가문 사람으로 갸륵하고 깨끗한 선비요, 인근 사람 사이에 공경과 신용이 있는 이로 선비이면서도 천성이 너그럽고 활발하여 일을 당하면 담대하고 기개가 있는 사람’(전영택, 1953)이었다.


아버지는 철저하게 전통적 유학을 고수한 사람으로 아버지의 충효나 예 등이 유관순 열사에게도 자연스럽게 전달되었다. 유관순 열사는 성장하는 동안에도 부모님의 말에 거스름이 없었다. 심술궂게 싸우거나 부모의 말을 거슬러 근심을 끼치는 일은 젼혀 없었다. 부모가 시키는 일은 첫마디에 순종하고 비록 힘에 겨운 일이라도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


2) 이정은, 유관순, 조카 유제한의 순국처녀 유관순에서.


그녀의 나라를 위한 애국심이 누구보다 남달랐고, 어려서부터 정의감이 강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또래집단에서도 리더로서 손색이 없는 활동을 해왔던 것은 이러한 가정교육과 집안 가풍에 바탕한 것이다.

 

4) 종교적 배경

 

유관순열사는 어려서부터 기독교적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그녀는 또한 집과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사는 조병옥과 그의 부친의 영향을 받았다. 조병옥은 부친을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자유·독립·항일 애국 사상을 담은 기고문을신한민보에 실을 정도로 강한 조병옥의 애국사상은 자연스럽게 마을에 영향을 주었고 유관순열사도 이에 영향을 받았다. 또한 조병옥의 부친 조인원은 유관순열사의 조부 윤기, 숙부 중무와 함께 교회를 운영하였다.


당시 집안 어른인 유빈기가 케이블 선교사와 친교를 맺고 초가를 하나 얻어 여기서부터 선교를 시작하였다. 유관순열사의 할아버지 윤기는 감화를 받아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숙부인 중무는 교회의 선교사로 일하였다(김기창, 2003). 이로 인해 유관순열사는 어려서부터 집근처에 있는 매봉교회 주일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여기서도 선도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유관순열사의 할아버지 유빈기는 1908년 일본군에 의해 불탄 지령리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외국인 선교사를 데려와 지령리 감리교회를 세웠고 유빈기의 전도와 숙부 유중무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유관순열사는 교회에서 놀기도 하고 성경과 찬송가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곳에서 찬송가를 익히고 어른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보고 흉내내어 한글을 외우면서 한글을 깨쳤다. 또한 총명하여 성경구절도 잘 외었다고 한다. 5세경에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글을 익히고 지령리교회에 전도차온 샤프 선교사부인을 통해 기독교서적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유관순열사는 신앙심이 깊은 아이로 인식되어 당시 선교활동을 위해 공주에 와있던 사애리시(史愛理施, Mrs Alise H. Sharp)의 도움으로 1916년 기독교 학교인 이화학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화학당에의 입학은 유관순열사에게 기독교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하고 교육을 통해 애국과 독립의 정신을 다지는 과정으로 들어가게 하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녀는 이화학당에서 매일같이 오전에는 채플에 참여하였고 성경시간에는 성경공부에 참여하였다. 또한 새벽마다 열리는 새벽기도회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밤중과 새벽에는 텅 빈 기도실에서 기도를 하였다. 이화학당에서는 일 년에 두 번 유명한 강사를 초청해 부흥회를 열었고 유관순을 비롯한 학생들은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고 신앙을 다져갔다.


유관순열사는 이화학당으로 온 이후부터 학교 가까이에 있는 정동교회를 다니며 신앙심을 키웠다. 3년간(1915.4.~1918.5.) 손정도 목사(1882~1931)가 이끄는 정동교회에 다니면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손정도 목사는 교인들에게 민족혼을 불어넣어 주었고 유관순열사도 손정도 목사에게서 참된 신앙인의 모습과 민족에 대한 애국적 열정에 감명을 받았다.


이필주 목사는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한사람으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유관순열사에게 신앙과 독립정신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사람이다. 이같이 당시 정동교회의 담임목사인 손정도 목사, 부목사인 김종우 목사, 손정도 목사의 후임으로 온 이필주 목사는 모두가 애국지사였으므로 유관순 열사는 그들의 설교를 통해 애국자들의 영향을 받고 애국심을 키워나갔다.


이화학당은 기독교 전도를 목적으로 세운 선교학교이므로, ‘그리스도교 정신에 의한 인간교육목표로 교육을 통해 건전한 한국

3)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백년사, 1994, 162.

4) 홍석창은 손목사에 대해

 독립운동 혐의로 2차례나 구속 또는 유배되기도 하였고, 상해,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러므로 손목사는 정동 강단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러므로 손목사는 정동 강단을 통해 독립정신과 나라사항을 항상 강조하여 그 주위에는 항상 이 같은 뜻을 가진 친구 동료들이 모여들었다 한다고 적고 있다(홍석창, 애국소녀 유관순과 매봉교회. 한국감리교회사학회, 1996, 81~82).


사회 건설에 이바지 할 수 있는 한국적인 여성을 육성하고자 하였다(이화 100년사 편찬위원회, 1994). 이화학당은 을사조약이후에 오후 3시면 일제히 수업을 중단하고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를 가졌는데, 거기에는 대학부에 신마실라(1914년졸업), 박인덕(1916년 졸업), 신준례(1917년 졸업), 김활란(1917년 졸업), 황애덕(1924년 졸업)과 같은 애국지사들이 있었다. 유관순열사는 외부인사로서 김마리아와 같은 언니들과 함께 결사대원으로 활약하였고(김해연, 2003), 기독교적 교육환경에서 주변의 애국지사들의 영향을 받았다.


열사가 어려서부터 접했던 기독교의 신앙은 이화학당에서 신앙생활과 신앙교육을 통해서 더욱 굳건해졌다. 이화학당에서는 채플시간과 성경시간이 있어 유관순열사는 지속적 신앙생활과 학교생활을 병행할 수 있었으며, 신앙생활과 함께 독립정신을 실천하는 계기로 만들었다.


이화학당에는 선교사가 세운 미션학교였기 때문에 채플을 할 수 있었고, 기도실이 있어 유관순 열사는 기도실에서 원하는 때 항상 기도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새벽마다 기도회가 있었고, 목사들을 초청해서 부흥회를 열기도 하였기 때문에 신앙활동을 열심히 할 수 있었다. 유관순 열사는 하나님께 나라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였고, 학교에서 하는 신앙활동을 위한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유관순 열사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너무 사랑하사 독생자인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희생정신을 배우며 신앙을 키워나갔다. 열사는 이러한 신앙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정신을 마음에 새겨 조국과 이웃을 위하여 실천하고자 하였다. 성경에 나오는 어려운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돌보며 사랑을 전파한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익히며 자연스럽게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랑정신을 익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유관순 열사가 성장하는 동안 국내에 도입되고 특히 병천지역에 전파되어 믿게 되었던 기독교 신앙은 유관순열사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유관순열사가 어려서부터 접했던 기독교사상과 이화학당에서의 종교교육은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끄는 실천으로 나아가는데 크나큰 밑거름이 되었다. 많은 애국지사들과 유관순 열사의 독립, 애국 운동 등은 자유를 강조하는 기독교사상의 실천이었다.


5) 교육적 배경

< 유관순열사 이화학당 보통과 졸업사진>
당시 이화학당에서는 이문회를 중심으로 토론과 사상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학생들은 이를 통해 독립정신과 애국정신을 키워갔다(박충순, 2006). 그리고 유관순열사도 이러한 교육과 활동을 바탕으로 시국관을 정립하고 애국사상을 키워갔다.


이화학당을 포함한 당시 사립학교는 부녀자 계몽, 사회개혁, 교육을 통해 자주독립을 위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선교사에 의해 많은 학교가 설립되어 기독교를 전파하고 사회개혁과 개화교육을 시켰다. 유관순열사는 이러한 국가사회적 영향과 이화학당에서의 계몽, 자주, 독립 등의 교육이 그녀로 하여금 민족의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의지와 강한 신념을 키워 가도록 하였다.


 

또 유관순열사에게 많은 도움과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교육가이며 독립운동가인 박인덕 선생이었다. 그녀는 교과지도를 하는 한편 학생들에게 사회의식을 고취시켜 애국정신을 함양시키고자 하였다. 그녀는 유관순 열사를 학교에서와 옥중에서 만나 격려해주었고 그녀의 신앙심과 애국심은 유관순 열사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00년 이후로 일본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배일적 집단으로 보았고, 교회에서 세력을 양성하여 일본을 축출하려는데 있다고 하여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인식하였다. 일제는 1915년에는 개정사립학교 규칙에 의해 한국인을 교육하고자 하는 모든 학교에 총독부의 인가를 받고 모든 교과용 도서는 총독부 편찬도서나 검인정을 받은 것을 사용하도록 제한시켰다. 교과과정의 편성에 있어서도 자율권을 모두 박탈하여 기독교계학교에서는 성경, 역사, 지리와 같은 과목이 폐지되고 종교의식도 거행하지 못하게 하였다(박충순, 유관순의 사상형성 배경 연구, 2006).


이화학당의 경우도 이 규칙을 따라야 했기 때문에 방과 후 온건한 종교의식을 갖는다는 조건하에 종교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과 목사들의 사상과 교육은 학생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이들을 통하여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학생들은 독립정신과 애국정신을 키워갔다.


1919년 고종의 서거는 국민의 울분은 극에 달하게 하였고 이 울분으로 3.1운동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수많은 학생들이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화학당 학생들도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유관순도 시위행렬에 합류하여 만세를 불렀다. 당시 만세운동은 학생, 교사, 주민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가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이화학당의 만세운동으로 학생들과 교사들은 투옥되기도 하였으나 학당에서 교육을 통해 배운 애국정신은 그대로 실천으로 이어졌다. 유관순 열사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학교의 단속을 피해 몰래 빠져나가 비밀결사대 일원으로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유관순 열사의 구국활동에의 적극적 참여는 이화학당에서의 서구의 진보적 교육과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학생과 교사들, 선교사, 목사들의 교육을 통하여 받아들여지고 실천되어진 것이었다.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을 위해 일본 헌병의 감시의 눈을 피해 비밀연락과 철저한 준비, 주변 어른들을 설득하고, 천안, 공주, 전의, 청주 등을 다니며 기독교인들과 유림들의 힘을 모아 병천 만세운동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이화학당에서의 경험과 교육이 큰 밑거름이 된 것이다.

 

2. 유관순 열사의 정신

 

1) 충효정신

 

유관순열사의 집안은 충효예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유가적 집안이었다.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은 훗날 할아버지 유윤기와 숙부 유중무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에도 전통적 유학을 고수한 철저한 유학자였다.


결혼한 자들이 틀었던 상투를 자르게 하는 단발령이 내려졌고, 개화의 흐름이 국내에도 유입되었지만 유관순열사의 아버지 유중권은 상투를 자르지 않았다. 또한 부친과 친척들이 기독교로 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사를 지내며 전통적으로 내려온 풍습을 지키려고 하였다.


유관순열사의 아버지가 유학을 고수하였음은 유우석과의 인터뷰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유우석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유학을 배운 비기독교인이었으며, 당시에도 자기(유우석)도 비기독교인이었다. 그러다가 육촌 할아버지인 유숭배(유빈기)씨가 세브란스의 의사인 미국인 케이블선교사와 친교를 맺고, 한 초가를 얻어 종을 달고, 십자가를 붙인 다음 선교를 시작하면서 조부숙부는 감화를 받아 신자가 되었다. 숙부인 유중무씨는 선교사였으나 부친 유중권은


5) 19591011일과 1961826일 인터뷰.

기독교에 귀의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지령리 교회의 국채보상운동 때 대한매일신보의 기록을 보면 국채보상의연금수입광고충남목천인동면인지령야소교당명단에 유중권이라는 이름은 없고, 7세된 그의 큰 아들 유우석의 이름으로 헌금한 것을 보아 유중권은 기독교신자가 아니었다고 보고 있다.


부친의 굳건한 유학의 가르침은 유관순열사로 하여금 조상과 정신적 가치와 예를 중요시하는 유교문화를 자연스럽게 익히면서 성장하게 하였다.


이같이 유관순열사는 집안의 유교적 전통에의 영향하에 나라에 충성하고 조상에게 보은하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웃사람을 잘 모시는 것을 중시하는 유교적 생활을 실천하는 것을 어려서부터 몸소 실천하였다.

2) 호국주체정신

 

 

일제의 만행에 저항하여 일으킨 3.1 독립만세운동은 외세의 침략과정에서 면면하게 이어온 의병의 전통과 이들이 지녔던 호국주체의 정신을 계승하여 일어난 것이다. 이 정신은 외세의 침탈에 굳건히 맞서서 국가의 주권을 지키고 이를 회복하기 위한 민족정신의 결정체로서의 역할을 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병의 활동과 유관순 열사가 국가의 주권수호를 위해 일으켜왔던 3.1 운동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과거로부터 일어났던 의병의 활동과 유관순열사의 3.1운동의 공통된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자주성의 발로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의병운동은 민족의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해 일어났으며, 3.1운동 또한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것이었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략에 대항했던 의병이나 승병운동,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략에 항한 의병이나 승병운동, 병자호란과 청나라에  저항했

의병운동, 개화기에 일제에 저항했던 의병운동 등은 3.1운동 당시에 일제침략에 저항하고 자주독립을 외쳤던 서울에서의 만세운동과 병천에서의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이 만세운동은 수없이 많은 외세의 침략과 강탈로 민족의 자주성을 상실하고 이를 회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둘째로 참여의식과 실천성이다. 의병활동에 참여해왔던 계층의 신분은 매우 다양했다. 살생을 하지 않는 불교의 승려들, 학문에 몰두하고 지식을 추구하는 유생들, 학자들, 전직관료들, 심지어 주부까지도 의병의 활동에 직접 참여하여 외세의 침략과 강압에 대항했었다. 이들은 소극적으로 자신들의 교리를 설파하고, 자신이 가진 지식을 책으로만 획득하고 소화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이를 몸소 실천하는 일에 앞장섰었다. 이러한 참여의식과 실천성은 3.1만세운동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지식인이건 지식활동과 먼 사람이건 모두가 풍전등화같은 국가가 처한 현실에 참여하여 국가를 수호하고자하는 실천의 선두에 섰음을 알 수 있다.


셋째로 멸사봉공정신이다. 의병운동을 전개했던 사람들이나 3.1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취하는 견리사의 정신을 실천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실천은 자기 자신, 자기 가족 그리고 자신이 속하는 계층의 이익을 모두 버리고 오직 국가의 이익, 국가의 수호를 위해서 행해졌다. 공자는 지사와 어진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타인을 해치지 않고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을 이룬다고 하였다. 이는 뜻 있는 선비와 사람다운 사람은 구차하게 살기 위해 사람다움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여서라도 사람다움을 완성한다는 말이다. 의병의 활동이나 3.1운동의 참자가들 모두 오로지 민족의 공동 이익을 위해서 가족의 안녕이나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렸던 것이다.


넷째로 불굴의 저항정신이다. 의병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니 3.1운동에 참가한 사람들 대다수가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침략자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그들이 무기를 가지고 훈련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채 오로지 이들과 맞서 국토를 지키려는 무모할 정도의 불굴의 정신으로 분연히 일어났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외세와 맞서는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맞서 싸우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 여기고 실천했다. 이러한 당위성이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고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외세와의 엄청난 여건과 세력 차이도 극복할 수 있는 저항정신을 발휘하게 한 것이다.


다섯째로 자발적인 민중역량의 실천이다. 의병활동이나 3.1운동 모두 국가의 명령이나 부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닌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참여한 자발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어떠한 이익도 댓가도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않은 오로지 외침으로부터 국토보전, 민족보전, 외세로부터 주체적 독립이라는 국익을 위해 일어난 순수성을 지닌 것이었다. 또한 의병운동이나 3.1운동을 실천한 사람들은 집권세력이나 기득권을 유지하던 계층이 아닌 오로지 시대적 양심에 바탕하여 잘못된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해 일어난 민중세력이었고 이들 역량의 실천이 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여섯째로 평화지향이다. 의병운동이나 3.1운동 모두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것이다. 이들의 운동은 외세의 침략행위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이들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침략행위는 평화를 파괴하는 행위이며 이러한 행위는 결코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운동은 침략행위를 원상으로 회복시켜야 할 것을 주장한 것이며 이들이 침략세력을 쫓아낼 경우에도 결코 외세를 지배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않는 평화지향적인 것이다.


이와 같이 유관순 열사가 주도한 만세운동은 자주적이고 자발적인 민중역량의 실천으로 국란의 시기마다 일어났던 의병의 호국주체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6)일제시대

일본내 각종 은행을 통한 금융자본의 진출로, 1910년에는 4,500만원을 넘는 막대한 액수의 국채부담을 지자 경제구국을 위해 일어난 운동이 국채보상운동으로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만세보 등 언론기관의 전국적인 호응을 전개되었고 가장 적극적인 지원을 보낸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었다.

7)1907816일 자.

8)이상 내용은 김기창, 유관순전기문()의 분석과 새로운 전기문 구상,

유관순 연구2,

천안대학교유관순연구소, 102면 각주 참조.

 

항한 의병이나 승병운동, 병자호란과 청나라에 저항했던 의병운동, 개화기에 일제에 저항했던 의병운동 등은 3.1운동 당시에 일제침략에 저항하고 자주독립을 외쳤던 서울에서의 만세운동과 병천에서의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이 만세운동은 수없이 많은 외세의 침략과 강탈로 민족의 자주성을 상실하고 이를 회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둘째로 참여의식과 실천성이다. 의병활동에 참여해왔던 계층의 신분은 매우 다양했다. 살생을 하지 않는 불교의 승려들, 학문에 몰두하고 지식을 추구하는 유생들, 학자들, 전직관료들, 심지어 주부까지도 의병의 활동에 직접 참여하여 외세의 침략과 강압에 대항했었다. 이들은 소극적으로 자신들의 교리를 설파하고, 자신이 가진 지식을 책으로만 획득하고 소화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이를 몸소 실천하는 일에 앞장섰었다. 이러한 참여의식과 실천성은 3.1만세운동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지식인이건 지식활동과 먼 사람이건 모두가 풍전등화같은 국가가 처한 현실에 참여하여 국가를 수호하고자하는 실천의 선두에 섰음을 알 수 있다.


셋째로 멸사봉공정신이다. 의병운동을 전개했던 사람들이나 3.1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취하는 견리사의 정신을 실천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실천은 자기 자신, 자기 가족 그리고 자신이 속하는 계층의 이익을 모두 버리고 오직 국가의 이익, 국가의 수호를 위해서 행해졌다. 공자는 지사와 어진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타인을 해치지 않고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을 이룬다고 하였다. 이는 뜻 있는 선비와 사람다운 사람은 구차하게 살기 위해 사람다움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여서라도 사람다움을 완성한다는 말이다. 의병의 활동이나 3.1운동의 참자가들 모두 오로지 민족의 공동 이익을 위해서 가족의 안녕이나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렸던 것이다.


넷째로 불굴의 저항정신이다. 의병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니 3.1운동에 참가한 사람들 대다수가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침략자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그들이 무기를 가지고 훈련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채 오로지 이들과 맞서 국토를 지키려는 무모할 정도의 불굴의 정신으로 분연히 일어났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외세와 맞서는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맞서 싸우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 여기고 실천했다. 이러한 당위성이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고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외세와의 엄청난 여건과 세력 차이도 극복할 수 있는 저항정신을 발휘하게 한 것이다.


다섯째로 자발적인 민중역량의 실천이다. 의병활동이나 3.1운동 모두 국가의 명령이나 부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닌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참여한 자발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어떠한 이익도 댓가도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않은 오로지 외침으로부터 국토보전, 민족보전, 외세로부터 주체적 독립이라는 국익을 위해 일어난 순수성을 지닌 것이었다. 또한 의병운동이나 3.1운동을 실천한 사람들은 집권세력이나 기득권을 유지하던 계층이 아닌 오로지 시대적 양심에 바탕하여 잘못된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해 일어난 민중세력이었고 이들 역량의 실천이 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여섯째로 평화지향이다. 의병운동이나 3.1운동 모두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것이다. 이들의 운동은 외세의 침략행위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이들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침략행위는 평화를 파괴하는 행위이며 이러한 행위는 결코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운동은 침략행위를 원상으로 회복시켜야 할 것을 주장한 것이며 이들이 침략세력을 쫓아낼 경우에도 결코 외세를 지배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않는 평화지향적인 것이다

  

이와 같이 유관순 열사가 주도한 만세운동은 자주적이고 자발적인 민중역량의 실천으로 국란의 시기마다 일어났던 의병의 호국주체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3) 평화애호의 비폭력 정신 

상대의 악한 행위, 부정당한 행위에 대해 맞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때 비폭력으로 위험을 무릎쓰고 나아가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비폭력저항 정신은 단순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이나 독서, 교육 등의 심오한 자기 성찰과 노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비폭력저항은 비겁한 자가 택하는 수단이 될 수 없으며, 보복을 하지 않고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궁극적으로 정의가 승리한다는 신념에 근거하는 것이다.


3.1운동은 일제의 폭력적인 압제와 이를 중단할 것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이었지만 모두가 비폭력적이었음을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19년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인돈목사의 남부지역평신도대회에서 했던 말의 인용에서 “31일 수도 서울과 도시에서 또는 농촌 각지에서 수많은 군중들이 거리로 나와 행진을 하였고 일제의 해산시까지 행진은 질서정연하고 폭력도 없었던 평화행진이었고, 이에 대해 일제당국은 거리로 나온 사람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둬 감옥에는 자리가 없을 정도였으나 행진은 전국 각지로 퍼지고 일제는 기병대를 보내고 군대를 동원하여 평화행진하는 수천 명의 시위대에 총을 쏘고 총검으로 찔렀다라고 하여, 3.1운동이 일제의 폭력적인 진압에 대비되는 평화적 행진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천안의 병천 만세운동에서 유관순은 선두에 서서 시위군중을 이끌었고 일본 헌병은 총검으로 유관순을 찌르고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며 발로 차고 때렸다. 이 광경을 본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이에 항의하며 그 뒤를 쫓아가며 만세!를 외쳤고 일병의 총검에 아버지를 잃게 되고, 어머니 이소재도 남편의 죽음을 보고 더욱 분기하여 시위운동에 나섰다가 피살되었다. 유관순은 부모를 모두 잃고서도 내 부모 살려내라절규는 하였을망정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자주독립만세운동을 외쳤던 비폭력독립운동을 벌였었다.

당시 병천 만세시위운동에서 시위자 중 19명이 즉사하고 30여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16명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일병의 인적 피해는 단 한명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 피해도 고작 유리창이 깨지고 벽이 파손된 정도인 것으


9)채진홍, 사랑의 독립군계몽군, 유관순연구

5, 천안대학교 유관순연구소, 136면 참조.

10)박충순, 유관순과 3.1운동,

[유관순연구창간호, 88.



로 보아도 3.1만세운동이 일제의 무력에도 평화적으로 대항하는 평화적 시위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관순 열사가 대열의 선두에서 만세시위도중에 시위자들과 부모님의 죽음을 보며 비폭력적으로 대항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유관순열사가 이러한 상황에서 비폭력적으로 시위를 진행한 것은 악한 자들이 자신을 반성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돌릴 것을 말하는 것이었으며, 속죄와 화해를 통해 올바른 방향인 우리의 조국을 찾는 것을 목표하는 신념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인도에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벌였던 간디는 비폭력의 영역을 악한 기존 권위에 대한 저항, 시민동요에 있어서 폭력을 삼가도록 만드는 것, 외세의 침략의 경우의 3가지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비폭력의 영역을 담당하는 비폭력을 실행하는 자는 가능한 한 완전한 자기정화(complete self-purification)를 내포하고, 비폭력에 대한 깊은 확신과 더불어 인간본성은 사랑의 전진에 응답할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하며, 사랑을 가지고 적대자를 대하며, 이 사랑을 통하여 적대자가 변화하리라는 확고부동한 결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관순 열사가 죽음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비폭력으로 일관했던 것은 간디가 말한 것과 같이 인간은 선한 존재로 결국은 사랑을 가지고 적대자를 대하면 그들이 변화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비폭력의 방법은 절대 소극적이거나 무력한 방법이 아니며, 오히려 가장 적극적인 힘이며 강자의 무기인 것이다.


비폭력저항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한 부정의에 항의하고 그들이 이에 대해 반성하고 물러갈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유관순열사의 비폭력 저항은 비폭력을 통하여 평화에 이를 수 있는 것에 대한 확신에 찬 믿음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11)김종진, 간디와 키의 비폭력 운동 비교 연구,

연세대학교 연학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0, 54면 참조.

12)M.K.Gandhi, Non-violent Resistance, 서행정 역,

비폭력 저항, 김영사, 1984, 369, 389(김영준, 마틴 루터킹의 비폭력저항에 대한 윤리학적 분석,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1, 24면에서 재인용).


4) 이타적 사랑과 희생정신 

유관순열사에게 있어서는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는 효와 예는 가풍을 통해 자연스럽게 체득되어졌다. 유관순열사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잘 했다고 한다. 오빠 유우석의 말에 의하면 보리 절구를 야물게 잘 했던 일이 기억에 아련하다고 하였다. 당시에는 쌀이 귀해 보리밥을 해 먹었는데, 보리밥을 지으려면 겉보리 껍질을 벗기고 보리를 삶아야 하기 때문에 절구질에서부터 돌과 티를 가려내어 밥을 하기까지 손이 많이 가는 것이었다. 이런 힘든 집안일들도 유관순열사는 잘 도왔다. 설거지며 빨래, 시골 농가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일에 기꺼이 솔선해서 돕는 성품을 지녔었다.


유관순열사는 동정심이 많아 언제든지 남을 도와 주기를 좋아하며, 어려운 일이건 쉬운 일이건 솔선수범하여 모범적인 생활을 하였다이화학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평소에는 자기 몫이 아닌 청소까지도 도맡아서 하였고, 한번은 돈이 없어 기숙사비를 내지 못한 친구를 돕기 위해 그 친구가 자기 대신 식당에서 밥을 먹게 하기 위해 자신은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유관순열사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아기를 낳은 여성을 위해 젖은 기저귀를 자신의 몸에 감아 차서 녹여 주기도 하였다. 이는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도우려는 이타적 사랑과 희생정신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오빠 유우석의 말에 의하면 유관순열사는 어려서도 강인한 아이였다고 한다. 교회에서 친구들과 공기놀이를 할 때 유관순열사는 지기 싫어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아이였다. 또한 항상 바르고 정직하고 불의에 대해서는 용인하지 않는 성품을 지녔었다.


어려서 부모에 순종하고 거스름이 없었지만, 만일에 어른의 말이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면 한사코 듣지 않고 제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어른들도 능히 그 뜻을 굽히지 않는 불의와 부정의를 용인하지 못하는 성품을 지녔었다.


고종의 승하를 계기로 독립의 의지는 날로 커지고 유관순열사도 친구들과 함께 뒷담을 넘어 거리로 나가 시위군중 속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수비대의 해산으로 쫓겨 무사히 학교에 돌아왔으나 많은 독립만세 참가자들이 일본의 총칼 앞에서 흩어지고 붙잡혀가 취조와 고문을 당하였다. 일제히 휴교령이 내려지고 유관순열사는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여기서 멈추지 않고 병천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게 되었다. 이 만세운동에서 유관순은 일병의 총탄에 부모를 잃게 되고 체포되었다


그러나 유관순열사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3.1운동 1주년이 되는 날을 기하여 옥에 갇힌 사람들과 함께 옥중만세시위를 일으켰다.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간수들에게 대들다가 두들겨 맞아 의식을 잃기도 하였고 방광파열상까지 입었다. 그러나 유관순열사는 감옥에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독립의지를 불태우는 강인함과 독립을 향한 일제에 항거 의지를 보여주었다.


유관순열사의 불의에 항거하는 강직함은 1919630일 경성복심법원 상고

14) 이정은, 유관순, 99면 참조.

15) 이정은, 유관순, 91.





일심에서의 일제의 부당한 재판에 대한 항거에서도 볼 수 있다. 유관순열사는 남의 나라를 침략한 일제가 행하는 재판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부당한 재판을 받을 수 없는 어딜 가면 감옥이 아니겠느냐고 하여 일제가 식민지화한 조국은 어디가나 감옥임을 항변하면서 상고를 포기하는 강직함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유관순열사의 불굴의 저항정신은 불의에 항거하고 이를 결코 용납하지 않고 항거하는 정신으로 외세의 침입시마다 우리 민족을 위기에서 구하고자 분기했던 의병정신과 통하며, 예나 지금이나 우리 민족을 위기에서 탈출하게 하는 위대한 정신이다.

 

. 유관순 열사의 문화유산

 

1. 문화유산의 의의

 

문화유산(cultural heritage)이란 인간이 자연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서서히 생활형성을 진전시킬 경우, 후대에 계승 ·상속될 만한 가치를 지닌 문화적 소산을 말한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전통문화유산에는 유형적인 것과 무형적인 것이 있다. 유형적인 문화유산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관심을 가져왔고 생활에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반면에 무형적인 문화유산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개별적인 측면에서만 논의되거나 무형유산과 유형유산을 구분하지는 않고 무형적인 문화유산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 또한 부각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유형적인 문화유산 못지않게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민족의 사상과 정신의 결정체인 무형적인 문화유산


16)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자국의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 ·공포하였고 그 이후 문화유산이라는 말이 문화재란 말로 대체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은 과거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수해 주었고 이는 또한 우리 다음 세대로 전해주어야 하는 귀중한 정신적 문화유산이다. 민족의 정신유산 또한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승해준 우리 민족의 값진 유산으로 이러한 정신적 문화유산도 유형적 문화유산이나 지하자원처럼 발굴·음미하는 작업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헌법 제9조에는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는 문화창달조항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는 민족문화창달에 노력할 것이 요청되고, 개인은 문화영역에서 자유로운 문화창작 활동과 문화를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 민족문화는 민족만의 고유한 특성과 고유한 정신이 담긴 민족정체성이 녹아있는 것으로 이에는 유형적인 것이든 무형적인 것이든 국가와 모든 국민은 민족문화의 창달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이하에서는 유관순 열사와 관련한 문화유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유관순열사의 무형적 문화유산

 

1) 작품을 통한 문화유산

 

유관순 열사에 관한 무형적 문화유산은 유관순 열사 찬가, 기원문, 무용극 등을 들 수 있다.

 

(1) 유관순열사 봉화탑찬가

 

정의의 상징 이 나라의 딸 류관순 그대 매봉에 올라 높이 들었던 봉화 여섯 고을 스물 넷 산봉우리마다 내일을 약속하며 같이 타오른 봉화들 이 길로 가야 자유가 있고 이 길로 가야 평화가 있고

 

17) 김정환, 김교신의 민족정신사적 유산, 민족문화연구

 

 Vol.18 No.1,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76 169~170.

오직 이 길만이 사는 길이라고 애타게 일러준 거룩한 봉화였네 그대 손에 들렸던 그 정렬의 봉화 민족의 끓는 피로써 기름을 삼았기에 오늘은 역사의 제단에 이리도 화사로이 무궁화 꽃송이처럼 피어 오는 봉화라 영원히 겨레의 가슴 가슴에 타오르리라 타오르리라

일천구백칠십칠년 칠월

이은상 글 김기승 씀

(2) 초혼묘에 새겨져 있는 유관순 어록문

나는 대한사람이다. 우리나라를 위해 독립만세를 부른 것도 죄가 되느냐! 너희들은 나에게 죄를 줄 권리가 없고 나는 너희 왜놈들에게 재판을 받아야 하 이유가 없다(재판을 거부하며) 선생님! 저는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각오를 했습니다. 2천만 동포의 십분의 일만 순국할 결심을 하면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박인덕 선생님에게···옥중에서)


(3) 소녀 유관순 열사의 초혼묘 기원문  

오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독립만세대한독립만세!

1919년 己未年  331일 (음력 2월 丁卯月  壬午日  그믐 30일 )  매봉에서 기도하며


(4) 유관순열사가

 

유관순열사가는 서편제 판소리의 대가이신 박동실 선생께서 작창하여 고 장월중선 선생께 전승되었고 장월중선 선생께서는 그의 제자이자 딸인 정순임 명창에게 전수하여 불려진 판소리이다. 박동실 선생께서는 유관순열사가 이외 이준, 윤봉길, 안중근의 사가, 이순신장군가 등을 작창하여 장월중선 선생에게 전승을 하였다. 그러나, 박동실 선생께서 납북되어 이 고귀한 소리를 불려지지 못할 것인데, 정순임 명창이 1993424일 국립극장에서 최초로 유관순열사가를 발표하게 되었다.

 

(5) 유관순열사 무용극 

무용극 대한의 딸 열사 유관순은 노산 이은상 선생이 만든 작품으로 1967년에 처음 제작하여 40여 년간 공연된 것이다.

1유성의 정기에서는 옥황상제가 스러져가는 대한의 장래가 걱정이 되어 사랑하는 큰 별을 하나 이 땅에 내려보내는 내용이다.

2새아기에서 옥황상제가 보낸 큰 별이 바로 유관순으로 태어나자 모두 경축하는 내용이다.

3장은 열강의 각축에서 우리나라를 사이에 두고 청일전쟁, 노일전쟁이 일어나며 서로 이권을 차지하려고 애쓰는 국제정세를 그리고 있다.

4장은 일본의 침략에서 1905년의 을사조약, 1910년의 한일합방 등 국가의 비운을 나타내고 있다.

5유비무환에서 조상은 거북선을 만들어 왜적을 물리쳤건만 우리는 무엇을 했나하는 유비무환의 아쉬움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6외로운 발길191931일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에 의해 휴교되어 힘없이 귀향하는 관순을 그리고 있다.

7민족의 횃불은 음력 2월 그믐밤에 고향의 뒷산인 매봉산에 올라 내일의 거사를 알리려고 횃불을 올리는 굳은 의지의 유관순을 그리고 있다.

8대한독립 만세는 아우내 만세운동에 앞장섰다가 부모는 모두 왜병에 의해 모두 죽고, 유관순은 체포되는 내용이다.

9옥중에서의 최후는 옥중에서 고문을 당하고, 형제와 면회를 하며, 투쟁을 하다가 순국하는 유관순의 불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10그 이름 빛나리에서는 유관순의 순국을 애도하는 온 국민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11해방(광복)’에서는 1945815일 해방을 맞아 환호하는 겨레를 그리고 있다.

12독립기념관에서는 해방 42주년을 맞아 독립기념관을 세우고 선열을 기리는 장한 국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13평화의 문은 나라의 무궁한 발전을 노래하고 있다.

2002427일 유관순열사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여 이미라 단장이 구성, 연출, 안무하여 전안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이를 공연하기도 하였다.

 

2) 기념사업활동을 통한 문화유산유관순 열사를 기리는 기념사업활동이다.

 

(1) 유관순열사 기념사업회

해방 후 194791, ‘순국처녀 유관순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다. 이 모임의 발기위원은 정신보, 한 훈, 최현배, 설의식, 신봉조, 장지영, 서명학, 앨리스, 아펜젤러 외 37명이었다.

19471126, ‘순국처녀 유관순기념사업회는 유관순의 애국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우내 독립운동기념비를 아우내장터 뒷산에 세웠다. 19471126일에 순국소녀 류관순 전기를 발간하고 194631948년 류관순영화가 윤봉춘 감독에 의해 제작, 상영하였다. 196012, 박화성여사의 집필로 타오르는 별이 출간되어 국민교육교양도서로 지정되었다. 199041, 초호묘 및 당안기념비를 류관순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건립하고, 류관순 매봉산 돌계단을 건설하였다.


20011113, 임의단체로 설립된 류관순기념사업회를 해체하고 정부의 설립허가를 받아 류관순열사기념사업회라는 사단법인으로 발족되었으며, 보훈처장을 지냈던 류근창회장이 초대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류관순열사기념사업회는 2002년 천안대학교 유관순연구소와 공동으로 류관순열사 탄신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고, 2004년에 이정은의 집필로 불꽃같은 삶, 영원한 빛 유관순을 발간하는 등 유관순열사를 기념하고 열사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활동을 꾸준하게 해오고 있다.

 

(2) 유관순상 

충청남도에서는 2002228, 1회 유관순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유관순상을 수여해오고 있다. 유관순상은 유관순 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그 얼을 오늘에 되살려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사고로 국가 및 지역사회발전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를 전국단위에서 선발, 시상하는 상으로 21세기 한국 최고의 여성상을 목표로 운영하고 있다.

(3) 유관순열사 추모제

18) 김춘식, 유관순과 잔다르크 비교연구, 유관순연구8, 20.

매년 순국일인 928일에 개최되는 추모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순국한 유관순열사를 추모하고 열사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유관순기념사업회와 천안시가 공동으로 주관하여 시적관리소 내 추모각 앞에서 순국일에 거행하는 행사이다.  이날 추모제는 유관순 열사 추모글 입상자에 대한 시상을 시작으로 천안시장의 추념사, 각계인사의 추모사, 내빈과 유족들의 헌화 및 분양, 추모의 글 낭독, 유관순 노래제창 등의 순서로 1시간 정도로 진행된다.

 

 

(4) 아우내 봉화제 

191941일 아우내 장터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시민의 단결과 애향심을 함양하기 위해 1978년부터 병천 청년회의소의 주관으로 해마다 아우내봉화제를 개최해오고 있다. 이 봉화제는 매년 228일에 개최하다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다하여 1996년부터 몇 년간 331일로 옮겨서 개최하였다가 다시 2월 말일로 환원되어 개최해 오고 있다. 아우내장터와 사적관리소를 중심으로 기념식, 공연, 3.1만세삼창재현, 횃불시위, 불꽃놀이 등이 열리며, 유관순선발과 아우내만세운동 주요인물을 선발하는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3) 연구와 교육활동을 통한 문화유산

유관순 열사의 정신을 현시대에 살리는 연구와 교육활동이다.

 

(1) 유관순연구소 

유관순열사의 생애와 사상 및 3.1운동의 고귀한 정신을 연구하여 널리 보급함으로써, 열사의 애국애족정신을 실천하고 민족적 자부심과 정체성을 확고히 하여 국가의 발전과 인류의 복지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백석대학교(, 천안대학교)20001012일 유관순연구소를 설립하여 유관순과 관련한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 20021011일 유관순열사탄생 100주년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하였고, 해마다 초등학교 고학년을 대상으로 유관순학교를 열어 유관순열사의 애국심고취와 나라사랑정신을 체험하는 기회로 삼고 있다.


또한 해마다 정기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유관순연구라는 논문집을 발간해오고 있다. 앞으로도 유관순열사 관련 자료를 모으고 정확한 고증에 바탕한 전기집 발간, 청소년 대상 인성교육, 리더십 교육 등 지속적으로 열사의 정신을 통한 애국정신 계승과 함양을 추진해 가고 있는 전국 유일의 유관순열사를 연구하는 학술연구소이다.

 

(2) 유관순학교

천안시, 천안교육청,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의 후원 하에 백석대학교 유관순 연구소 주최로 매년 방학을 이용하여 초등학교 고학년을 대상으로 유관순학교를 개최하고 있다. 이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유열사의 생애와 삶을 가르쳐 올바른 민족정신과 나라사랑의 마음을 정립시키고 공동체 의식을 키워주는 일종의 청소년 애국심고취 캠프, 놀이 위주의 다른 방학캠프와는 달리 12(혹은 23)의 일정으로 특강과 체험활동으로 이루어진다. 첫날은 이 고장 천안출신인 유관순열사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특강, 다양한 체험, 참여활동을 하여 어린이들에게 역사의식과 인성개발에 중점을 두고 이루어진다. 둘째 날은 유관순열사가 갇혀있었던 서대문형무소, 이화학당, 정동교회, 유관순사우, 유관순생가, 매봉교회 등을 견학함으로써 유관순열사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며 이를 고취시키고 있다.

 

3. 유관순열사와 유형적 문화유산

 

1) 유관순열사와 유형적 문화유산의 의미

 

우리 민족은 유구한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지니고 꿋꿋이 살아온 민족으로서 세계 인류 역사창조의 주역으로서 활동할 역량을 지닌 민족이다. 그 많은 외적의 침탈 속에서도 온 국민이 일치된 마음으로 총화단결하여 위기를 극복하였고 강인한 정신적 뿌리는 조상이 우리에게 음양으로 물려준 위대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유형의 문화유산인 유적지의 문화유산은 유적지의 홍보에 있으며, 유적지를 알림으로써 이를 방문할 필요성과 방문 및 답사를 통하여 유적지에 담긴 정신적 유산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적 유적지 탐방이나 성지순례 등이 단순히 유형적 건물이나 지역에 불과하다면 그림이나 사진만으로써도 탐방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역사적 유적지를 꼭 탐방하여 유적지의 구석구석을 보고 체험하는 것은 유적지가 갖는 의미가 유형적인 면 이외에도 유적지가 탄생하게 된 배경과 유적지가 지니고 있는 가치에 이르기까지 직접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를 알도록 하는 것에도 의의가 있다. 그래서 역사적 유적지 견학이나 탐방이 미래의 주역이 될 초등학생이나 중고생을 위주로 이루어지는 것도 유형적 유산을 통해 그 유적지가 갖고 있는 무형의 유산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


유관순열사와 관련한 유적지도 예외는 아니다. 유관순열사가 생존하는 동안 남겼고 사후에 만든 유적지 등 이러한 유형적 유산에 대한 탐방을 통하여 유관순 열사의 당시 역사적 현장을 체험하고 이를 통하여 현재와 미래의 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적지 견학이나 탐방은 단순한 관광의 의미 그 이상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2) 유관순 열사 활동 기념 유적지

(1) 유관순열사 생가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재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338-5)에 소재하고 있다.  19721014일 사적230호로 지정되었다. 유관순 열사가 19021216일 출생후 살았던 곳이다. 191931일 서울에서의 만세운동후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 이곳에 내려와 머물며 41일 거사를 도모하였다.

 

 

(2) 매봉산 봉화대봉화탑봉화지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251-2 외에 위치하고 있다.현재의 봉화대와 봉화탑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사각형의 기단위에 세운 것으로 19771012일 건립하였다. 봉화지는 19721014일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으며 매봉산 정상에 위치해 있다.


아우내 만세운동 당시 상황에 대하여 조선군 사령관의 일본 육군대신에의 보고서 중 별지에 의하면, ‘만세운동 수일 전부터 매일 밤 읍내 주위의 고지에서 분화를 하며 만세를 높이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관순열사가 당시 독립만세운동을 모의하고, 1919331일 밤에 다음날인 4.1일의 거사를 각지에 알리기 위해 봉화를 올렸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매년 3월 말일에 봉화를 올리고 있다.

 

(3) 아우내장터

19) 역사적 현장의 사실이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을 사적으로 지정한다. 

20)홍석창, 매봉교회가 낳은 민족의 보배 유관순, 한국감리교회사학회, 2004, 189.

 

아우내장은 서쪽으로 천안, 동쪽으로 충북 진천, 남서쪽으로 청주와 조치원이 각 40리 내외에 위치하고 있다. 10여리 내외에 목천면, 북면, 성남면, 수신면, 동면이 인접하고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1720년대1914년 사이에는 234번지와 289번지 일대의 개천가에 형성. 개천가에 위치해 홍수로 인한 피해가 잦아 개축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144월에는 300번지, 301번지, 302번지 일대로 옮겼고, 이곳에서 191941일 아우내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28년 무렵 장터의 위치가 293번지, 294번지, 164번지, 166번지, 169번지 일대로 장터를 옮겼다.


물류의 유통이 활발하고 보부상들의 활동이 빈번했던 곳이다. 특히 우시장으로 유명하여 영남지역과 호남지역의 소장수들까지 왕래가 잦았던 곳이다. 191941(음력 31) 유관순열사와 주민 3천여명이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던 독립만세운동의 역사적 현장. 이 만세운동으로 19명이 사망하고 수많은 사람이 부상당했으며 유관순열사를 비롯한 30여명이 투옥되었다.

 

(4) 아우내 3.1운동 독립사적지

 천안시 병천면 산 73-2 외에 위치하고 있다. 19471126일에 유관순기념사업회에서 만세기념탑을 세웠다. 충남기념물 제58호로 지정되어 있다191941일 아우내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순국한 수많은 사람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아우내장터가 내려다 보이는 구미산에 있다. 이 비에는 아우내만세운동 당시 순국한 선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날 아우내 3.1독립운동 기념비 준공식에는 수천 명의 각계인사가 참석하였으며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과 이시영 부통령, 오천석 문화부장관 등이 참석하여 추도사를 하였다. 기념비문은 위당 정인보 선생이 짓고 일중 김충현 선생의 서예작품을 각인하여 세웠다.

 

(5) 매봉교회

 

천안시 병천면 용두1338-6번지, 유관순 생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감리교 선교사 스웨어러가 전도활동의 결과 1901년 목천과 진천에 교회를 설립할 때 설립된 것이다. 1908년 연회록에 의하면 190711월 일본군이 지령리교회에 불질러 건물이 전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령리 교회가 불타면서 해산되었던 교회를 1908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던 지령리교인이 주축이 되어 교회를 다시 세웠다. 유관순열사의 할아버지 유빈기와 숙부 유중무가 케이블 선교사의 지원을 얻어 지령리 교회를 1908년 다시 세웠다. 19193.1만세운동시 소실되었다가 1967년 이화여고 동창생이 다시 재건하였다. 현 교회는 1998년 기독교대한감리회 남부연회 모금으로 건립한 것이다.


유관순열사가 어릴 때 이 지령리교회에 다녔다. 그리고 유관순열사는 공주에 살면서 이 교회에 자주 들르던 사애리시 선교사를 만났던 곳이다. 191941일 아우내 만세운동에 교회 전교인들의 참여로 인해 일제는 교회집회금지령을 내리고 교회마저 불살라 없애버렸다. 3.1운동 당시는 용두리교회였으나 1914년 지령리에서 행정구역 명칭을 변경하였다.


조병옥 박사의 부친 조인원 씨는 이 교회의 전도사로 사역하기도 했다. 조인원은 자신의 사랑채를 사경회장소로 개방하고 선교사 케이블의 권유에 따라 아들 조병옥을 공주영명학교로 입학시켰다. 용두리교회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고, 19193.1만세운동의 선봉역할을 했다.

매봉교회는 유관순 열사는 물론 임시정부에 공헌을 세운 조병옥 박사 등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한 역사적인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교회 지하에 유관순열사유물을 전시하는 전시관이 있다. 

21) 영명 80년사, 공주영명중고등학교총동창회, 141-142.


(6) 서대문형무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의주로 247(현저동 10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1907년에 지어 19081021일 경성감옥으로 문을 열었고, 1988220일 사적 324호로 지정되었다. 옥사 3개동(10, 11, 12)과 사형장은 1988220일 사적 324호로 지정되었다.


수용인원의 증가로 공덕동에 또 다른 감옥을 짓자 191293일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을 바꿨다. 1916년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여성만을 투옥시키기 위해 여성감옥을 새로 지었다. 지하에는 독방을 만들어 비중있는 애국지사들을 수용하여 가혹한 고문을 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지하감옥의 면적은 190이며 사방 1m도 안되는 독감방 4개가 있다. 유관순 열사가 일제가 행한 모진 고문으로 순국하신 곳으로 일명 유관순굴이라고 하였다.


192355일에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을 바꾸어 1945815일 해방이 되기까지 애국지사들을 투옥시키고 고문을 하고 처형하거나 옥사시켰던 악명높은 곳이다. 19451121일 서울형무소로, 19611223일에 서울교도소로, 196777일에 서울구치소로 명칭이 바뀐 뒤 19871115일에 서울 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가고 1992815일에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1987년 옥사는 15개였으나 역사성과 보존가치를 고려해 옥사 7개동과 사형장 보안과 청사를 원형대로 보존하였다. 그중에서 옥사 3개동(10, 11, 12)과 사형장은 1988220일 사적 324호로 지정되었다.


대한제국말에 일제의 강압으로 감옥이 지어져 80여년동안 우리 근현대사 격동기의 수난과 민족의 한이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이자 우리 민족의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표적 탄압기관이었다.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이에 항거하는 민족독립운동이 거세지자 일제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체포한뒤 여기에 투옥하였다.


조국 독립을 위해 이곳에 투옥되어 모진 고문과 탄압을 받고 순국한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민족독립정신을 일깨워주는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삼기 위하여 1998115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개관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우리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은 물론 온 국민이 순국선열의 뜻을 기리고 부끄러운 지난날의 역사를 극복하기위한 애국애족의 뜻을 배우는 역사의 산교육장이다.


유관순, 김구, 강우규를 비롯해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갇히거나 목숨을 잃었던 옛 서대문형무소의 보안과 청사와 옥사를 개조해 개관한 것으로, 옥사와 사형장, 망루와 시구문을 원형대로 복원해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하고 있으며, 19081945년까지의 순국선열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전시하고, 고문형장을 재현해 관람객이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든 고문실과 유관순 열사의 모형, 투옥된 90인의 수용기록표, 복원한 지하감옥 등이 있다.


1층의 추모의 장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애국지사들을 가두었던 서대문형무소를 첨단 영상시스템을 통해 조감해 보고, 그분들의 발자취를 직접 찾아보며 그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마련되었다. 영상실, 안내실, 기획전시실, 자료실 등을 통해 애국 지사들의 양력과 고귀한 업적을 알 수 있다2층 역사의 장에서는 나라사랑에 불타는 선열들의 의거를 통해 우리의 암울했던 역사와 그 극복을 위한 저항을 계승 발전하고, 온갖 고문과 억압에도 굽힘이 없었던 역사의 현장을 다시금 되돌아보기 위해 구성되었다.

(7) 정동교회

 

 

서울 중구 정동 32-2에 위치하고 있다.

1895년 공사를 시작하여 1고종 광무 1(1897) 1226일 봉헌식을 가졌다. 19771122일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었다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개신교 교회건물로 유관순열사가 이화학당에 다니던 시절에 다녔던 교회이다. 본래는 십자형으로 115평이었으나 1926년 증축 때 양쪽 날개부분을 넓혀서 현재11575평의 네모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원래 건물은 그대로 두고 양 날개 부분만 늘려지었기 때문에 건물의 원래모습에는 손상이 없다. 벽돌쌓기를 하였으며, 곳곳에 아치형의 창문을 내어 고딕양식의 단순화된 교회당 모습을 이루고 있다. 돌을 다듬어 반듯하게 쌓은 기단은 조선시대 목조 건축의 솜씨가 배어있어 주목된다. 이 교회당의 종은 장식없는 내부 기둥들의 겉모습과 함께 소박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북미계통의 단순화된 교회건물이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가 예배만을 위한 건물을 구입하여 베델(Bethel)예배당으로 부르고 1887년 첫 예배를 시작하였던 곳으로 현존 유일한 19세기 교회건물로 단층이나 층고가 높아 2층으로 보이고 남측 종각은 3층이다. 20012002년에 교회 보수공사가 있었고, 교회 옆에는 100주년 기념탑이 세워져 있으며, 앞뜰에는 당시 쓰이던 종과 50주년 기념비, 아펜젤러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8) 이화여고

 

 

서울시 정동 32번지에 위치하고 있다유관순열사를 기리기 위한 유관순기념관이 1974년에 건립되었다. 2006년 창립 120주년 행사를 거행하고 이화박물관을 개관하고 유관순열사 동상을 건립하였다. 18865월 미국 북감리회 여선교사 스크랜턴이 설립한 사립여학교로, 처음 설립당시 1명의 학생으로 출발하여 이듬해 7명으로 증가하였고, 19044년제 중등과 1908년 보통과와 고등과를 신설하고, 1910년에는 대학과를 신설하여 우리나라 근대여성교육의 산실역할을 하게 되었다.   유관순열사가 다녔던 당시 이화학당.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은 1887년 민비가 내린 것이며, 학교 북동쪽에 당시 기숙사에 기거하던 유관순 열사가 사용한 우물이 보존되어 있다.

 


 

2) 유관순 열사 기념 유적지

 

(1) 유관순열사 추모각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252. 매봉산에 위치하고 있다.

유관순열사의 애국정신을 길이 추모하고 3.1운동의 빛난 얼을 기리기 위해 1972년에 건립하여 19853186.58로 확장 정비하였다. 1973년까지 보수, 정비하였으며 1986년에 15평에서 26평으로 경역(境域)을 넓혔다. 추모각은 19861119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58호로 지정되었다 .


화강석의 기단 위에 정면 3, 측면 2칸으로 단층 맞배지붕의 팔각지붕으로 목조기와집이다. 담장을 두르고 정면에 삼문을 두었다. 유관순의 영정은 원전 장우성 화백이 좌상으로 제작(가로 1.2m, 세로2m)하여 1986815일 봉안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친일파시비와 영정이 너무 나이들어 보인다는 지적에 따라 2008228일 류열사 표준영정 교체 봉안식을 개최하였다. 그 전 표준영정이 중년부인을 연상시키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청순하고 진취적이며 애국심에 불타는 항일민족 소녀의 모습이 표현되었다. 추모각에서는 매년 928일에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2) 유관순 열사 기념관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소재하고 있다.

유관순 열사 탄신 100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2002년에 지은 것으로 200341일 개관하였다.

기념관은 193평의 터에 지상1층 지하1층의 팔각지붕의 건물로 전시실, 영상실, 자료실 등이 있다.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모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