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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의 초기 군대경력 행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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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2012. 1. 7.

워싱턴의 초기 군대경력 브리태니커

아메리카 식민지군 장군, 미국 독립전쟁(1775~83) 당시의 혁명군 총사령관, 미국의 초대 대통령(1789~97).

로버트 딘위디 총독 대리는 조지 위싱턴을 버지니아 남부 지구 부대장으로 임명했다(1752. 11).

이듬해 그는 노던 곶과 동해안 지구 부대장이 되었다.

 

이무렵 영국과 프랑스는 오하이오 강 연안을 놓고 충돌이 잦았다. 1753년 10월 조지 워싱턴은 프랑스군 진지로 떠났다.

오하이오에 들어와 있는 프랑스인들이 자발적으로 나가지 않으면 강제로 쫓아내겠다는 딘위디의 경고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워싱턴은 혹독한 날씨와 거친 황무지 속에서 갖은 고생을 겪은 끝에 이리 호에서 남쪽으로 32㎞ 떨어진 르뵈프 요새(지금의 펜실베이니아 주 워터퍼드)에 도착했다.

그러나 프랑스군 사령관은 오하이오를 차지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워싱턴은 1754년 1월 16일 윌리엄스버그에 도착하자마자 보고서를 썼다. 딘위디는 프랑스인들의 위협이 심각하다는 것을 국왕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워싱턴의 보고서를 런던으로 보냈다.

 

총독은 군사 원정을 계획했다.

그는 조슈아 프라이를 연대장으로 임명하고 워싱턴을 중령으로 임명하여, 신병을 모집하게 했다.

로렌스 워싱턴이 포토맥 강과 오하이오 강 상류의 땅을 개발하기 위해 만든 오하이오회사는 오늘날의 피츠버그에 요새를 세우기 시작했다.

딘위디는 이 기지를 강화하기 위해 워싱턴을 파견했다. 1

754년 4월 워싱턴은 160명의 부하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를 떠났다.

그러나 그가 요새에 도착하기 전에 프랑스군은 이미 요새를 점령하고 뒤켄 요새로 이름을 바꾸어버렸다.

워싱턴은 프랑스군 기지에서 약 64㎞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하여, 오늘날의 펜실베이니아 주 컨플루언스 근처에 기지를 세웠다.

 

그는 이곳을 발판으로 삼아 30명쯤 되는 프랑스군 파견대를 기습하여, 파견대장 쿨롱 드 쥐몽빌과 9명의 병사를 죽이고 나머지를 포로로 잡았다. 이리하여 프렌치-인디언 전쟁의 마지막 국면이 시작되었다.

연대장으로 승진한 워싱턴은 버지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의 상당히 많은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7월 3일 병력이 2배나 많은 프랑스군의 집중공격을 받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군은 무장해제를 당했으나 버지니아로 귀환했다.

1755년 2월 에드워드 브래덕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버지니아에 도착했다.

 

 뒤켄 요새 공격을 맡은 브래덕은 워싱턴을 부관으로 삼았다.

이로써 워싱턴은 새로운 기회와 책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브래덕의 군대는 7월 9일 복병을 만나 참패했다.

비록 패배했지만, 이 전투에서 워싱턴은 남다른 냉정함과 결단력, 지칠 줄 모르는 정력과 침착성을 보여주었다.

워싱턴은 열병에 걸렸는데도 용감하게 부대를 지휘했고, 부대가 프랑스군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활약 덕분이었다.

이 싸움에서 브래덕은 치명상을 입고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워싱턴은 부대를 이끌고 퇴각한 뒤,

23세의 나이로 버지니아 식민지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700명의 부대를 이끌고 거의 640㎞나 되는 국경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의회는 그에게 별로 호의적이 아니었다.

 건강이 나빠진 워싱턴은 1757년 마운트버넌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봄에 건강이 회복되자 버지니아 식민지군 총사령관으로 복귀했다.

존 포브스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은 뒤켄 요새로 다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존 포브스는 브래덕의 전철을 피하기 위해 펜실베이니아 주 레이스타운에서 서쪽으로 가는 새로운 통로를 개척했다.

늦가을에 프랑스군은 철수하면서 뒤켄 요새를 불태웠고, 포브스는 그 자리에 피트 요새를 세웠다.

얼마 전에 버지니아 식민지 하원의원으로 선출된 워싱턴은 명예 준장의 계급장을 달고 전역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