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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환인·환웅은 신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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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0. 5.

 

윤여동설 - 환인·환웅은 신화인가?

 

 

   

                            

                                                위 : 동산취 선사유적지 

  

                             

                                                   위:우하량 선사유적지 

 

                            

                                               위: 흥륭와 선사유적지 


  학자들은 인류가 세상에 나타난 때를 기원전 500만 년경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 인류의 기원지에 대해서는 출토된 인류화석을 기준으로 아프리카 지역에서 발원하여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고 주장하는 아프리카기원설이 있고, 세계 각지에서 각각 발원하여 각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다지역기원설이 있다.
  다만 우리는 지금 인류가 생겨난 500만년 중에서 499만년 정도를 구석기시대로 구분하고, 기원전 1만년 정도에 신석기가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역사를 이해한다.
  그런데 수백만 년 전인 원시시대 인류의 생활상이나 문명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고, 지금 발견되는 구석기 유적은 대개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서 기원전 1백만 년 이후에 속하며, 길게는 수십만 년, 짧게는 수만 년 정도에 해당하는 인류문명의 흔적들이다.      
  구석기 시대 인류는 대개 자연 동굴 또는 토굴 등을 이용해 짐승과 비 또는 추위를 피하며 주로 수렵·어로를 위해 떠돌아다니며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짐승을 사냥 할 수 있을 만큼 빠르지도 않고, 시각이나 청각, 후각이 뛰어나게 발달되지도 않았으며, 덩치가 크지도 않으며, 성장하는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인류가 수백만 년간 다른 동물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살아남은 것은 어쩌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인류가 지능이 높아 불을 이용할 수 있었고,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신체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생존경쟁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구석기 초기의 인류는 돌을 던지거나 부러진 나무 몽둥이를 휘둘러 사냥을 했을 것이고, 산이나 들에서 야생 나무열매를 따먹거나 강이나 바닷가에서 조개류 또는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삶을 영위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필요에 의해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해 후기에 이르면, 돌을 깨서 만든 타제석기가 출현하게 된다.  

  그러다가 점차 인류의 개체수가 늘어나게 되어 먹을 것이 부족하게 되자 사람들은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을 것이다.
  야생 동물을 생포해 길러 번식시키는 방법으로 육류획득 방법을 개선했고, 야생 과일나무를 일정한 곳으로 옮겨 심어 수확하는 방법과 야생 곡물의 씨를 채취해 거주지 부근의 일정한 땅에 심어 재배하는 영농 방법도 개발되어 정착생활로 접어들게 되고, 거주지 부근의 강이나 바다에서 물고기를 많이 잡기 위하여 그물이나 동물의 뼈를 이용한 낚시바늘 등 원시적인 어로도구도 만들게 되었으며,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집단 생활로 접어들게 된다.

  이는 씨뿌리는 시기와 거두는 시기에 상호 노동력의 협력을 받을 수 있고, 또 수확물을 약탈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지키기 위함이었을 것인데, 그들은 집단 생활을 원만하게 영위하기 위해 규범과 질서가 필요하자 일정한 룰을 만들게 되었고, 집단을 이끌고 나가는 리더의 출현으로 이어져 계급 분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때 농경생활을 위한 각종 도구들을 만들게 되는데, 땅을 갈기 위한 원시형태의 쟁기와 풀을 자르고 재배한 농작물을 수확하기 위한 낫 또는 칼, 수확한 농작물을 저장하기 위한 용기와 분쇄하거나 가공하기 위한 각종 도구들의 발명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우리는 이 시기를 신석기 시대라 하고 돌을 갈아 만든 그 도구를 마제석기라 한다.
    
환국의 건국설화와 위치


  우리는 지금 환인의 실체에 대하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전 우주를 관할하는 상징적인 존재로서의 하느님 정도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삼국유사에서도 환인이 천부인 세 개를 환웅에게 주어 삼위태백산으로 내려보내 인간세계를 다스리게 했다 라고  환인을 신적 존재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안함로의 삼성기에는,
  "어느 날 동남동녀 800이 흑수(黑水)와 백산(白山 : 太白山)의 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환인(桓因)은 감군으로서 높은 자리에 올라 돌을 부딪쳐 불을 일으켜 날음식을 익혀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필자주 : 흑수는 백차하(百岔河), 백산(태백산)을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으로 보고 해석한다]
 이를 환국이라 하고 그를 천제환인씨라고도 하고 또는 안파견이라고도 불렀다. 7세를 전했는데 그 년대는 상고할 수 없다"라고 기록함으로써 환인을 인간 집단을 이끌어 처음 나라를 세운 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기록 속에서 환인시대가 집단거주생활의 시작, 계급의 분화, 발화법 발명, 음식가공법 발전 등의 시대임을 알 수 있어 이미 농경 정착시대로 접어드는 초기 단계였음을 알 수 있게 하고,   
  원동중의 삼성기에도,
  "옛날에 환국(桓國)이 있었으니 백성은 부유하고 또 많았다.
  처음 환인(桓仁: 桓因의 오기)이 천산에 올라 도를 깨우쳐 오래 살았고 몸에는 병도 없었다. 하늘의 뜻에 따라 널리 교화하니 무력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열심히 일하니 배고프지 않았고 추위에 떠는 일도 없게 되었다.
  혁서환인, 고시리환인, 주우양환인, 석제임환인, 구을리환인에 전하고 지위리환인에 이르렀다.
  환인을 혹은 단인(檀仁: 檀因의 오기)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해 환인 7세의 이름을 기록해 놓아 환인이 하느님이 아니라 왕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원동중의 삼성기에는 또 고기(古記)의 기록을 인용하여, "파나류산 아래 환인씨의 나라가 있었는데 천해의 동쪽 땅이다. 또는 파나류국이라고도 하는데, 그 땅이 넓어 남북 5만리, 동서 2만여 리인데, 통털어 말하면 환국이다...................(중략)................... 천해는 지금의 북해라 한다. 7세를 전했는데, 역년이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라고 했다" 고도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환국이 7세를 전했다는 것은 당시까지 어떠한 형태로든 전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조 3년(A.D.1457)때 고조선비사, 대변설, 조대기,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삼성밀기, 안함로, 원동중의 삼성기 등의 고서적을 거두어들이라는 명을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안함로의 삼성기와 원동중의 삼성기라는 책도 조선초까지 실제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지금 그 원본은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 환단고기 속의 두 삼성기의 내용이 옛 삼성기의 내용과 동일한지 아닌지는 확인해 볼 수 없다.       
               
  그런데 원동중은 고기(古記)라는 기록을 인용해 환국이 3,301년 또는 63,182년이라 기록했는데, 기록 속의 3,301년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환인국은 기원전 7,199년에 건국되었다는 말이 된다.

 

※ 고조선의 건국년도는 기원전 2,333년 무진년이라 하고, 환웅국은 1,565년간 존속했다고 하므로 환웅국의 건국년도는 기원전 3,898년이 되고 다시 환인국 3,301년을 더하면 환인국의 건국년도가 기원전 7,199년이 되어 환인국 건국시점으로부터 현재까지의 우리의 총 역사는 무려 9,200년이 넘게 된다. 반만년 역사가 아니라 1만년 역사이다.  

 

  그런데 이 "고기"라는 기록은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과 고려의 학자들도 그 기록을 인용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도 고기의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 이 고기라는 책도 실제 실존했던 책이었음은 틀림없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환국의 존속기간이 6만년이 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쉽게 수긍하기 어렵고, 환국이 7세 3,301년을 전했다는 고기의 기록이 환국의 일곱왕조를 말한다면 해석을 전혀 다르게 할 수 있다.
  우리가 고조선을 말할 때 왕검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등으로 시대 구분을 하는 것과 같은 원리로 이해한다면 환국은 7개 왕조로 이어져 왔다는 의미로 해석 할 수 있고, 각 왕조의 존속역년이 각각 약 500년씩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환인환국, 혁서환국, 고시리환국, 주우양환국, 석제임환국, 구을리환국, 지위리환국 등으로 왕조가 바뀌면서 환국의 역사가 전해졌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연대가 너무 오래 되었기 때문에 그 일곱 개 각 왕조의 왕위 계승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았고, 왕조의 이름 만이 지금까지 간신히 전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환인은 신화가 아니라 실제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은 황하 중류에서 발견된 기원전 3천년경의 신석기 문명인 앙소문화(仰韶文化)와 양자강 하류의 양저문화(良渚文化)를 동양 문명의 시원이라 선전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양문명은 모두 그 뿌리가 황하나 양자강 부근으로서 그곳으로부터 사방으로 퍼져 나갔을 것으로 역사를 해석했다.
  한마디로 동양 문명은 중국이 발원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중반부터 만리장성 너머인 요하 부근으로부터 내몽골 적봉(赤峰)을 중심으로 하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중국문명보다 훨씬 오래되고 앞선 문화의 흔적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학자들은 그를 통털어 홍산문화라 이름지었고, 요즈음은 요하문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요하 유역인 요녕성 부신의 사해신석기 문화는 기원전 8,000년까지 편년이 올라갔고, 내몽고자치구 옹우특기에서도 기원전 6,000년경의 통형회색토기가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5,000년경의 봉형토기잔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오한기 흥륭와 신석기유적은 1982년에 발견되었는데, 편년이 기원전 6,200년까지 올라갔다. 흥륭와 유적은 오한기 보국토향 흥륭와촌 동남쪽 1.3km에 위치한 낮으막한 구릉지에 위치하는데, 그 동네에 사는 농민이 농사일을 하다가 주운 출토유물을 신고해와 지표조사를 하게 되었고, 결과 그 부근 지역이 신석기 취락유적지였음을 알게 되어 1983년부터 1994년까지 발굴해본 결과 취락유적 수백 곳과 돼지와 함께 매장된 인골, 잘 다듬어진 동그란 옥귀걸이, 빗살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흥륭와 가까이의 조보구에서도 기원전 5,200년경의 선사 취락지가 발견되었고, 적봉의 하가점 하층, 상층 문화도 발굴되었고, 홍산 부근에서도 신석기 유적지가 확인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중국문명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앞서 중국학자들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는데, 더 나아가 그 문명이 중국문명과는 확연히 달랐고, 훨씬 발전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중국학자들은 그 문명의 주체가 어느 민족인지 알 수 없었고, 이 문명과 중국 문명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할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안함로의 삼성기에는, "어느 날 동남동녀 800이 흑수와 백산에 내려와 나라를 세웠고 이를 환국이라 했다"라고 환국의 위치가 흑수가 있고, 백산(고대의 태백산)이 있는 부근지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필자주 : 흑수가 지금의 어느 강을 말하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는데, 필자는 지금의 서랍목륜하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지금 이러한 기록들을 보고 흑수는 흑룡강, 백산은 백두산이라 해석함으로써 환국의 강역이 흑룡강과 백두산 사이 지역이었을 것으로 이해하며 고대 기록에 나타나는 숙신은 두만강 북쪽으로부터 연해주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부여는 압록강 북쪽 만주에, 옥저는 한반도의 함경도에, 예는 강원도에, 대방은 황해도에 위치했으며, 요수는 지금의 요하를 말하는 것이고, 요동은 요하 동쪽을 말하는 것이라 한다.

  따라서 지금의 요하 서쪽 지역은 우리 고대 역사 강역 밖이었을 것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지금 중국 하북성과 내몽고자치구 적봉시의 경계에는 칠로도산(七老圖山)이라는 산맥이 있는데, 그 의미는 "일곱노인이 그림같이 노니는 산"이라는 의미이고, 또 그 동쪽 요녕성 조양시와 적봉시의 경계에는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이라는 산맥이 있는데, 그 의미는 "어리석은 호랑이가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한 산"이라는 의미이다.
  이를 우리 역사와 연결시켜 보면 칠로도산은 우리 환인설화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고, 노로아호산은 우리 환웅설화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칠로도산이나 노로아호산 부근은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땅임에 틀림없고, 그 부근에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 2,067m)이라는 산이 있는데 고대의 불함산(不咸山), 태백산(太白山)으로 비정되는 산으로서, 환국의 강역은 대광정자산이 위치하고 있는 그 부근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서 숙신씨 전을 보면,
  "숙신씨는 일명 읍루라고도 하는데, 불함산 북쪽에 있다. 부여에서 60일쯤 가야하는 거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구만한국에 접해 있으며, 북쪽 끝은 약수에까지 이른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구당서 말갈 전에는,
  "말갈은 대개 숙신의 옛 땅으로서 후위 때의 소위 물길이다.
  경사(장안)에서 동북쪽으로 6천여 리에 있다.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서쪽은 돌궐과 접하며, 남쪽은 고구려와 경계하고 북쪽은 실위와 인접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숙신이 곧 읍루, 물길, 말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당나라 때의 장안 즉 지금의 서안에서 동북쪽으로 6천여 리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서안에서 동북쪽으로 6천여 리라면 이는 한반도 동북쪽의 연해주를 말한다고 할 수 없고, 대흥안령산맥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어 옛 숙신도 대흥안령산맥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지 부여전에는,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토에서 1천리 거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북사 백제전에는,
  "백제의 동쪽은 신라까지이고, 북쪽은 고구려와 접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후세 여진이 세운 나라인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15년 간이나 금나라의 냉산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해야했던 남송의 홍호는 송막기문에서 "여진은 곧 숙신국이다. 동한 때의 읍루이고, 원위 때의 물길이며, 수당 때의 말갈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냉산의 위치에 대하여 "냉산은 연산에서 3천리 떨어져 있고, 금나라의 도읍에서 2백여리 떨어져 있는데 모두가 불모지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 "장백산은 냉산 동남쪽 1천여 리에 있는데........ 흑수가 여기서 발원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냉산은 금나라 때의 상경회령부였던 지금의 내몽골 파림좌기 북서쪽에 위치했었고, 장백산은 대광정자산을 말하는 것이다. 

 

☆ 원사지리지에는 여진에 대하여 "처음에는 여진이라 했는데 후에는 요 흥종의 이름자를 피하기 위해 여직으로 바꾸었다(初號女眞 後避遼興宗諱 改曰女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보면 지금의 대광정자산을 옛날에는 불함산이라고도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여진의 중심 강역이 지금의 연해주가 아니라 칠로도산산맥 부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삼국지 부여전과 북사 백제전 그리고 송막기문의 기록에 따라 각 나라들의 위치를 배치해보면 아래와 같이 된다. 
                 
                         약수

                                                       
        
   선비                부여                읍루    

 

                                           (태백산)      


                 현토    고구려             
 

                    
                            백제              신라   

 


☆ 우리는 지금까지 이러한 배치를 보고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연해주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역사를 해석해 이들 나라들이 한반도 주변에 위치했던 나라로 인식했는데, 실제 역사의 현장은 한반도주변이 아닌 대흥안령산맥 부근이었다. 사실이 이러할 경우 우리 역사의 중심 강역이 한반도나 압록강 북쪽 만주 부근이 아니라 지금의 대흥안령산맥 부근이라는 말이 되는데, 바로 이 대흥안령산맥 남쪽 줄기에 환국. 환웅국의 중심으로 추정되는 칠로도산, 노로아호산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환웅국(배달국)의 건국설화와 위치  

 

                                                         

 

  삼국유사 고조선 왕검조선 조를 보면,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의 서자 환웅이 있었는데, 천하를 차지할 뜻을 가지고 인간세상을 탐내고 있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산을 내려다보니 홍익인간 할 만했다. 이에 환인은 천부인 세 개를 환웅에게 주어 그곳으로 보내 인간세상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안함로의 삼성기를 보면,
  "(환인의 뒤에) 환웅씨가 이어 흥기하여 천신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사이에 내려왔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을 천평에 정하고, 그곳을 청구라 했다. 천부인을 가지고 오사를 주관하며 교화를 베푸니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다. 도읍을 신시(神市)에 정하고 나라이름을 배달(倍達)이라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유사는 환웅이 환인의 아들로서 환인국을 떠나 태백산 부근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고, 안함로의 삼성기는 환웅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나라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환인이 동남동녀 800명을 이끌고 처음 나라를 세웠다는 흑수백산 땅과 동일한 곳이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환인국의 강역에서 좀 떨어진 태백산에 환웅이 또 하나의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 것이고,

안함로의 삼성기는 환웅이 환인국을 이어 바로 그 땅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고 하고 있는 셈인데 도읍을 신시에 정했다는 것으로 보아 환국의 도읍을 그대로 도읍으로 사용했던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장소를 택하여 도읍을 정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필자 주 : 혹시 도읍 이전을 말함인가?]        

   두 기록의 차이는 삼국유사는 환웅국의 위치가 태백산 부근이라 하는 것이고, 안함로의 삼성기는 환웅국(배달국)이 흑수와 백산 사이에 위치했다고 알려주고 있는 것인데, 두 기록을 합해 보면 결국 태백산이 흑수와 백산 부근에 위치했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또한 환웅이 이끄는 무리가 3천으로서 환인이 처음 나라를 세울 때의 8백보다 훨씬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자연적인 인구의 증가로 해석할 수도 있고, 환웅을 지지하고 따르는 세력이 많았음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인데, 삼국유사는 왕위세습이 부자로 이루어진다고 기록하고 있고, 안함로의 삼성기 기록은 환웅이 환인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지 않아 환웅이 환인국을 없애고 역성혁명을 이루어 새로이 나라를 건국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삼국유사는 세상에서 계속 읽혀지게 되었고, 안함로의 삼성기는 일반백성이 읽어서는 안 되는 책으로 분류되어 민간 속으로 숨어 들어가게 되었는데, 왕조들의 왕위가 세습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점을 감안해 생각해 본다면 안함로의 삼성기는 자칫 역성혁명을 부추길 수 있는 위험한 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세조 때도 고서적 수거령을 내려 안함로의 삼성기를 거두어들이려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환웅의 신시가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고, 우리는 지금 태백산을 백두산이라 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도 하는데, 삼국유사에는 환웅이 나라를 세웠다는 태백산의 위치를 "지금의 묘향산"이라 주를 달아 놓기도 했으나 여전히 주장들만 분분하다.
  따라서 환웅국의 도읍이었던 태백산 신시(神市)의 위치는 아직 정확히 찾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필자는 지금의 내몽골 적봉시가 옛 환웅천왕의 신시가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기원전 2,333년 무진년이라 하고 있고, 원동중의 삼성기에는 신시역대기라 하여 환웅국이 18세 1,565년간 존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환웅국은 기원전 3,898년에 건국되었다는 말이 되는데, 중국 문명과는 확연히 다르고 우리 한반도의 신석기 문명과 맥을 같이 하는 기원전 3,500년경의 신석기 유적지가 칠로도산, 노로아호산 부근에서 많이 발견되었으며, 이미 국가성립단계에 진입할 수 있는 선진화된 문명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중국학자들은 그 문명을 일군 왕국을 "신비의 왕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환웅국이 환국의 뒤를 이어 바로 그 땅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면 옛 환국의 위치와 환웅국의 위치는 거의 동일한 곳일 것이고, 도읍의 위치에 따라 중심지가 약간 바뀐 정도였을 것이다.
  따라서 중국학자들이 신비의 왕국으로 부르기도 하는 문명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환인, 환웅국의 문명으로서 시기적으로도 일치하고 지리적으로도 일치하는 것이다.

 

 

 

 


 

  삼국지 예전을 보면,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후일의 신라), 북쪽으로는 고구려, 옥저와 접했고,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다. 지금 조선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의 내몽골 오한기, 고륜기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강원도 강릉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고 역사를 해석했던 예(동예)가 한반도가 아닌 내몽골 오한기, 고륜기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고, 삼국지는 또 "(예는) 호랑이를 신으로 섬겨 제사지낸다"라고도 기록하고 있는데, 바로 그 부근에 어리석은 호랑이가 사람이 되어보려고 노력한 산이라는 의미의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이때 호랑이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같은 굴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항상 신웅(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기원했다. 이때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했다. 이에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먹고 삼칠일 동안 조심했더니 곰은 여자로 변했고, 호랑이는 조심하지 않아 사람이 되지 못했다" 라는 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진짜 곰이 사람으로 변하고, 호랑이가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무엇인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기록일 텐데, 곰과 호랑이를 부족의 명칭으로 보고 서로 사람이 되어보려고 했다는 말을 환웅이라는 왕에게 두 부족에서 서로 혼인관계를 맺으려 경쟁했다는 말로 해석해보면, 결국 곰동네의 여인이 왕후로 최종 선택될 수 있었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이 국운을 걸고 다툰 탁록

 

 

  중국 사람들은 수인씨, 복희씨, 신농씨를 삼황이라 부르며, 황제헌원, 전욱고양, 제곡고신, 제요도당, 제순유우를 오제라 한다.
  그런데 삼황시대란 신화시대로서 원시시대, 구석기시대, 신석기 시대를 말하는 듯 하고, 오제시대부터는 역사시대로 볼 수 있다.
  황제헌원과 치우천왕 사이에 벌어졌던 탁록 벌판에서의 전투는 역사적으로 매우 유명해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두 민족이 국운을 걸고 다투었던 탁록 전투에 대하여 전하여지고 있는데, 중국 사람들은 이때 황제헌원이 승리했다고 기록했고, 동이족의 기록에는 치우천왕이 승리했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탁록이란 곳이 대체 어디에 위치하고 있기에 이들은 그 탁록에서 국운을 건 전투를 해야만 했던 것일까? 

  원동중의 삼성기를 보면, 치우천왕은 환웅국 14세 자오지환웅을 말하는 것이라 하는데, 기원전 2,707년에 천왕에 올랐다고 한다.

 

※ 원동중의 삼성기에는 환웅국 1,565년 간 18명의 천왕이 다스렸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믿기 어렵고, 환웅국이 1,565년간 존속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최소한 50∼60명 정도의 천왕이 있었을 것이나 그 왕대가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18명의 천왕의 이름만이 전해지자 후대 누군가가 그 재위기간을 18명의 천왕에게 나누어 배분하여 기록함으로써 연대를 맞추었을 것이다.  
    
  그런데 치우천왕의 모습을 사기의 주석에는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하고 모래를 먹고 오구장, 도극, 태노를 만드니 위세가 천하에 떨쳤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때 이미 청동으로 만든 투구를 쓰고, 철로 만든 갑옷을 입고 전쟁터에 나갔다고 해석할 수 있어 그때가 청동기 또는 철기시대였음을 알 수 있고, 탁록은 두 나라간의 국경에 속하는 지역으로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탁록이라는 지명이 지금 북경 서북쪽 하북성 장가구시에 있는데, 이곳은 원래의 탁록이 아니라 지명의 교치가 이루어진 이후의 지명으로서 원래의 탁록은 지금의 북경 서남쪽 하북성 탁주부근이다.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이 탁록에서 국운을 건 전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 중국에서는 현재의 탁록이 곧 옛 탁록이라 선전 하면서 그곳에 삼조당이라 하여 염제신농, 황제헌원, 치우천왕을 모시는 사당도 만들어 놓았는데, 이는 중국 사람들이 위 세 사람을 중국인의 시조로 받든다는 의미이다.

  역사 왜곡의 극단적인 한 단면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