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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는 하북성 당산시 난주(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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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0. 12.

윤여동설 -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는 하북성 당산시 난주(난현)

 

 

 

 

 

  백제26대 성왕은 서기 538년 봄에 이르러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는 국호까지도 남부여(南扶餘)로 바꾼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는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537년까지로 끝나고, 538년부터는 남부여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인데, "남부여"라는 국호는 "옛 졸본부여의 영광을 남쪽 땅에 재현하겠다"는 명분을 세워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길 때만 잠깐 언급했을 뿐 실제 국호로 사용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백제의 성왕은 왜 이때에 이르러 사비로 도읍을 옮겨야 했던 것일까?
  학자들은 그 이유를 백제가 고구려의 압박 때문에 도읍인 웅진이 위험하다고 보고 더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과연 그것이 맞는 말일까?
  24대 동성왕 때 백제는 북위의 수십만 기병의 침공을 물리칠 수 있을 정도로 강국이었고, 25대 무령왕 때도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여러 번 승리하고는 드디어 강국이 되었다고 큰소리칠 정도로 강국이었으며, 무령왕의 아들인 26대 성왕이 즉위한 해인 523년에 고구려가 패수가에 이르자 좌장군 지충으로 하여금 군사 1만으로 방어하게 하여 승리했다.
  다만 529년 10월에 고구려 안장왕이 침공하여 북쪽 변경인 혈성(穴城 )을 빼앗아가자 그를 탈환하기 위해 좌평 연모에게 3만 군사를 주어 오곡벌판에서 싸웠으나 패하고 2천명의 군사를 잃었을 뿐이었다. 이때 백제는 고구려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였다. 아니 오히려 백제가 고구려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백제 26대 성왕은 옛날 동명왕이 졸본부여를 건설했듯이 졸본부여의 영광을 졸본부여의 남쪽 땅에 재현하겠다는 각오로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남부여라 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백제의 웅진을 충남 공주라고 하고, 사비를 그 남쪽 멀지 않은 충남부여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가 역사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서 필자는 앞글들에서 백제의 건국지는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 진황도 일원이었다고 했고, 신라의 건국지는 그 동쪽인 요녕성 호로도,금주 일원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때 성왕이 옮긴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는 지금의 어디였을까?
  서기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도읍 사비를 공격했던 기록을 보자.
  이때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군과 신라군은 사비의 남쪽인 기벌포에서 7월 10일에 만나 합류하여 북쪽의 사비를 공격하기로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탄현을 지나 부지런히 기벌포를 향하여 행군 중이었다. 
  그런데 7월 9일 황산에 이르렀는데, 계백장군이 이끄는 백제군 5천명이 세 군데로 진을 치고 길을 막고 있었다.
  빨리 가야하는 신라군과 신라군의 길을 막아 당나라군과 신라군이 합류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 백제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처음 네 번의 전투에서는 계백장군이 이끄는 백제군이 승리했으나 5천의 백제군이 5만의 신라군을 끝까지 막아낸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서, 결국 계백장군도 죽고, 백제가 패전하게 된다.
  그러자 백제에서는 다시 군사들을 보내 웅진구를 막아 당나라군이 상륙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려 했으나 결국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군이 상륙하였고, 백제군과 싸워 대승하게 되고, 소정방은 기벌포에서 신라군을 기다리게 된다.   
  그런데 신라군은 계백장군이 이끄는 백제군 5천 결사대를 격파하고 오느라 약속한 7월 10일에 기벌포에 도착할 수 없었다.
  아마 7월 10일 밤이거나 하루쯤 늦은 7월 11일 새벽쯤에야 도착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는 12일에 전군을 네 부대로 나누어 사비를 향하여 진군하게 된다.
  13일 밤에 이르러서는 의자왕이 상황이 불리해져 감을 알고 측근들을 데리고 미리 웅진성으로 피신해 갔다가 18일에는 의자왕이 사비성으로 돌아와서 항복하게 됨으로서 백제가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일주일만에 의자왕이 항복을 하고 만 셈이니 너무도 쉽게 무너진 셈이 된다. 
  이때의 백제의 도읍 사비성은 충남 부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에 있는 난하변의 난현(난주)였다.

  삼국사기 기록 속의 백제(대륙백제)는 바로 그곳에 있었고, 나당 연합군은 바로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대륙백제의 사비성을 공격해 멸망시킨 것이다.     
  나당 연합군은 이때 기벌포 즉 지금 발해만의 난하 하류 부근에서 합류하여 북쪽으로 사비를 향하여 진군했던 것이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성은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난주(난현)이다.  

  지금의 난하 하류가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충남 부여를 지나는 금강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백제의 백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 부흥군을 돕기 위해 파견되었던 왜국 지원군과 당나라 수군이 전투를 벌여 왜국 배 400척이 불타고 왜국 지원군이 전멸했던 백강구도 한반도의 금강 하류가 아니라 발해의 난하구인 것이다.
  삼국사기와 중국사서 기록 속의 백제는 분명 대륙에서 건국되었고, 그곳에서 멸망했다.

  우리의 역사인식과 실제 역사의 현장이 대륙과 한반도로 뒤바뀌어 있는 것이다.

  즉 대륙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사서들의 기록을 우리는 지금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 충남 공주에서 백제 25대 무령왕릉이 발견되었고, 부여에서는 부소산 건너편에서 위덕왕이 죽은 아들을 위해 세웠던 탑 속에 넣었던 사리기 등이 발견되었고, 부여 능산리에는 백제시대 고분들이 있고, 창왕명 석조사리감과 금동대향로도 출토되었으며, 익산 금마 왕궁리에서는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도읍을 옮기고 절을 새로 지었다는 관세음응험기 기록 속의 지모밀지 왕궁터의 흔적으로 보이는 곳을 발굴 중에 있고, 그곳의 왕궁리 5층석탑 속에서는 백제시대 사리병 등이 출토되었으며, 부근의 제석면에서는 불탄 흔적의 제석사터도 발굴 중에 있다.
  대륙백제와 반도백제 그리고 열도백제의 비밀을 어떻게 밝혀낼 것인가?
  발상의 전환........................
  인식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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