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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김알지는 성한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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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4. 25.

윤여동설 - 김알지는 성한왕이 아니다

 

 

 

   전한 무제의 흉노정벌시 포로로 잡혀온 흉노 휴도왕의 태자 일제(당시 14세)는 한 무제에게 신임을 받게되어 소호금천씨의 성씨인 김씨성을 하사 받게 되고, 투후라는 벼슬을 받게되어 한나라의 귀족사회에 편입된다.
  그리고 투후라는 벼슬은 세습되어 그 아들 상(賞)으로, 그 손자 상(尙)으로, 다시 그 증손자 국(國)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국에게 아들이 없자 김일제의 둘째 아들인 건의 손자 당에게 투후벼슬이 세습되고, 다시 당의 아들 성(星)으로 세습되었다고 전한다.
  
   
☆ 투후 김일제(金日 ) → 투후 김상(金賞) → 투후 김상(金尙) → 투후 김국(金國)[절손]
                                  → 김건(金建)         →   ?(실명)           → 투후 김당(金當) → 투후 김성(金星)

 

  김일제는 출생년도가 기원전 133년생이므로 1세대를 25년으로 계산했을 경우 그 고손자인 김성의 출생년도는 기원전 33년경이 되는데, 이때는 전한 말기에 해당하고 이후 왕망의 신나라가 서는데, 김성이 적극 협조하게 되었을 것이다.
  왕망과 김성은 친인척간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망의 너무나 급진적인 정책 때문에 민심이 돌아서게 되자 왕망이 시해 당하게 되고, 후한이 건국되기에 이른다.
  그러자 왕망을 적극 지원했던 투후 김일제 후손들의 운명은 바람 앞에 놓인 촛불 신세가 되기에 이른다.
  장안에 그대로 머물렀다가는 역적으로 몰려 삼족이 멸할지도 모르는 운명이 되었던 것이다.  
  살려면 어디론가 도망쳐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김일제의 후손들은 어디로 도망치는 것이 가장 안전할까를 논의했을 것이다.
  옛 고향인 흉노로?
  그렇지만 한나라에 포로로 잡혀와 한나라에 협조함으로써 투후라는 벼슬까지 받은 자신들을 흉노족들이 배신자로 낙인찍어 놓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후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는 고구려나 한(韓)으로 도망쳐야 살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리하여 김일제의 후손들은 짐을 꾸려 요동을 향하여 출발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요동에 도착해 숨어살게 되었을 것인데, 이때 김일제의 후손들이 정착한 곳이 지금의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옛 요동이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므로 북경 부근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어느 사람은 경주에서 발견되었다는 문무왕 비편이라는 것을 보고는 김알지 설화와 연결시켜 성한왕이 곧 김알지와 동일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김알지가 시림 숲 속에서 발견된 때가 탈해이사금 9년(A.D.65) 3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서안에서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이라는 지석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에 김씨부인의 먼 조상이 소호금천씨이고, 흉노사람 일제(김일제)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김씨부인의 증조할아버지가 원득, 할아버지가 충의, 아버지가 공량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할아버지 충의가 당나라 조정에 들어가 한림대조 검교좌산기상시 소부감 내중상사라는 벼슬을 하게 되어 그 증조할아버지인 원득은 공부상서를 추증받게 되었다 하고, 그 아버지도 한림대조 장작감승 충내작판관을 역임했다고 기록되어 있었고, 이 김씨부인의 성씨인 김씨와 신라 왕실의 김씨가 같은 김씨라고 생각하게 되어 이 기록들을 모두 연결시켜 신라 왕실 김씨들이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탈해이사금은 서기 65년에 알지가 시림 숲 속에서 발견되자 금궤 속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김일제의 후손인 김성은 성한왕으로 보이는 사람인데, 이 성한왕이 곧 김알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출생년대를 따져보면, 김일제의 후손인 성한왕 김성은 기원전 13년쯤 태어났을 것이고, 한나라에 있을 때 투후라는 벼슬을 세습 받았다고 하므로 이미 성장해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서기 65년경에 태어난 김알지와 알지가 태어날 때 이미 80세가 다되었을 김성을 어떻게 동일인으로 볼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필자는 한반도 경주에 신라왕릉이 조성되었을 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신라의 천년 도읍 금성은 한반도의 경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낙랑과 가까운 진한땅에서 건국되었고, 그 땅에 도읍하고 천년 왕조를 이었는데, 한나라 때의 낙랑 땅이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지 한반도 북한 평양 일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북경(필자주 : 지금의 북경은 옛 요동군이었다) 부근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것이지 한반도 북한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신라의 천년 도읍 금성은 지금의 요녕성 호로도시 금주(錦州)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의 왕들은 죽어 금주(錦州)부근에 묻혔을 것이지 한반도 경주에 묻힐 수 없는 것이다.
  신라의 고총들을 모두 발굴해 보면 명명백백 밝혀질 일이다.
  필자의 주장을 믿지 못하겠거든 파 보라.
  지금까지도 경주의 고총들에서 신라 어느 왕의 왕릉이라는 확실한 근거가 발굴되지 않았듯 앞으로도 경주에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신라 무슨 왕의 능이라는 것을 밝혀줄 유물은 절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경주, 김해의 흉노 흔적들, 익산, 공주, 부여의 백제흔적들, 북한지역의 고구려흔적들은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일까?
  이는 흉노족인 투후 김일제의 후손들이 왕망의 신나라가 멸망한 후 후한 광무제에게 쫓겨 도망쳐 와서 김해지역에 자리잡고 왕조를 이루었을 것이고,

  한반도 북부의 고구려 흔적들은 고구려의 일부세력이 한반도 북부로 진출(권력다툼애 패하고 밀려 왔을지도 모른다)한 흔적일 것이며,

  백제의 흔적들은 365년경 대륙의 백제에서 근초고왕과 왕위다툼을 벌이다가 패한 계왕의 아들 무광왕이 한반도로 도망쳐와서 전북 익산 부근의 지모밀지에 도읍하고 다시 백제(반도백제)를 세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반도에도 흉노, 고구려, 백제 사람들이 섞여 살게 되었는데, 우리는 지금 대륙의 땅을 잃어버리고는 한반도에만 삼국이 있었다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고, 흉노족이 살던 경주, 김해지역을 신라, 가야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한반도에 있는 우리 고대사의 그림자를 보고는 그것이 실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