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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국내성(國內城), 질산(質山), 좌원(坐原) 그리고 현토군(玄菟郡), 요동군(遼東郡)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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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22.

윤여동설 - 고구려 국내성(國內城), 질산(質山), 좌원(坐原) 그리고 현토군(玄菟郡), 요동군(遼東郡)의 위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대 유리왕 조를 보면,

   “22(A.D.3) 겨울10월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12월 왕이 질산북쪽(質山陰)에서 사냥하면서 닷새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6대 태조대왕 조를 보면,

   “55(A.D.107) 가을9월 왕이 질산남쪽(質陽)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자주색 노루를 잡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8대 신대왕(新大王) 조를 보면,

   “4(A.D.168) (後漢)나라 현토군 태수 경림(耿臨)이 침입하여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다..........

   8(A.D.172) 겨울11월 한(後漢)나라가 대병으로서 우리나라를 향하여 오고 있으므로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공격과 방어 중 어느 편이 이로울 것인가를 물으니,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後漢)나라 군사들이 수가 많음을 믿고 우리를 얕보고 있을 것인즉, 만약 나가서 싸우지 않는다면 적들은 우리를 겁쟁이로 알고 자주 쳐들어올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것이야말로 한사람이 문을 지켜도 만 명의 사람이 당하지 못하는 격입니다. (後漢)나라 군사가 아무리 수가 많더라도 우리의 방어망을 뚫을 수는 없을 것이니 청컨대 군사를 출동하여 막아버리소서하였다. 답부(명림답부)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後漢)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아 이제 강병으로서 멀리 쳐들어오니 그 서슬을 당할 수 없습니다. 군사가 많으면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으면 지켜야 하는 것은 병가의 상식입니다. 이제 한(後漢)나라 사람들이 천리 먼 길로 군량을 운반하고 있으니 오랫동안 지탱할 수 없을 것이므로, 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이파고 보루를 높이 쌓고, 곡식 한 알 없이 들판을 비워놓고 기다리게 되면 적들은 반드시 열흘, 한 달이 넘지 않아서 굶주리고 피로하여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강한 군사로서 쳐 나아가면 우리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왕이 옳게 여기고,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니 한(後漢)나라 사람들이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장수와 병졸들이 굶주려서 퇴각하는데, 이때 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坐原)에서 교전하니 한(후한)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대단히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坐原) 질산(質山)을 주어 그의 식읍으로 삼았다.

   15(A.D.179) 가을9 국상 답부(명림답부)가 죽으니 나이가 113세였다. 왕이 친히 가서 조상하고 7일간 조회를 중지하였으며, 곧 예를 갖추어 질산(質山)에 장사지내고 20호의 묘직이를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좌원과 질산이 언급되고 있고, 질산에 고구려 신대왕 대의 재상 명림답부의 묘가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조를 보면,

   “6(A.D.184) (후한)나라 요동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공격하였다. 왕이 동생 계수를 보내어 치게 하였더니 이기지 못하매 왕이 친히 정예기병을 이끌고 가서 한(후한) 군사와 좌원(坐原)에서 싸워 그들을 쳐부수고 적군의 머리를 벤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16(A.D.194) 가을7월 서리가 일찍 내려 곡식들이 죽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나라의 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제하였다.

   겨울10월 왕이 질산남쪽(質陽)에서 사냥을 하다가, 길에 앉아서 울고 있는 사람을 보고서 어찌하여 울고 있는가?’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저는 살림이 빈곤하여 품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하여 왔는데 올해에는 흉년이 들어 품팔이 할 곳도 없어, 곡식 한말, 한 되의 식량도 구할 수가 없어서 우는 것입니다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슬프다, 내가 만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들을 이렇게 극한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허물이로다하고는 그에게 옷과 음식을 주어 위로하고, 서울과 지방의 관청에 명령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 늙고 병들고 가난하여 스스로 살 수 없는 자들을 널리 탐문하여 구제하게 하고,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 사이에 관가의 곡식을 내어 백성들의 식구 수에 따라 차등 있게 하여 꾸어 주었다가 겨울 10월에 가서 갚게 하는 것을 법[필자주 : 이를 진대법(賑貸法)이라 한다]으로 정하니 모든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고국천왕이 질산의 남쪽(質陽)에서 사냥을 했다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왕들은 도읍을 비워두고 아주 멀리 떨어진 곳까지 사냥하러 가지는 않는다.

   나라에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신속히 도읍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산(質山)은 당시 고구려의 도읍인 국내성(國內城)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일 수 없다.

   그리고 또한 10대 산상왕(山上王) 조에도,

   “3(A.D.199) 가을9월 왕이 질산남쪽(質陽)에서 사냥하였다.”라고 다시 질산(質山)이 언급되고 있는데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질산은 당시 고구려의 도읍인 국내성에서 가까이 위치하였고, 대대로 고구려왕들의 전용사냥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고구려의 도읍 국내성은 지금의 어디였을까?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고구려의 첫 도읍 졸본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적성현 후성진, 국내성은 북경 북쪽 연경구 영녕진, 환도성은 북경 북쪽 회유구 발해진으로 밝혀졌고,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 일원, 현토군은 장가구시 서남쪽 회안현 회안성진이었다.  

   따라서 좌원이나 질산은 국내성과 현토군, 요동군의 중간지역인 지금의 관청수고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질산, 좌원은 국내성인 지금의 북경 연경구 영녕진으로부터 서남쪽 방향인 관청수고 부근으로 비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