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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칠지도(七支刀)의 최초 제작년도는 서기 346년 병오년(丙午年)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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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20.

윤여동설 - 칠지도(七支刀)의 최초 제작년도는 서기 346년 병오년(丙午年)이 확실하다

 

 

  칠지도(七支刀) 명문 중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태화4년5월16일병오정양)”에서

  태화4(泰和四年) : 서기 346년 병오년(丙午年)

  516(五月十六日) : 음력 5월 갑자삭 16일 기묘일(양력 621)로서 이날의 오시(午時)는 경오시(庚午時)

  병오정양(丙午正陽) : 병오년 하지(夏至)날이라는 의미  

 

  따라서 칠지도(七支刀)

  백제 12대 계왕 3년인 서기 346년 병오년 음력 516(양력 621) 기묘일 하지날에 완성된 칼인 것이다.

  옛 사람들은 병오년 하지날이 많은 하지 중에서도 특별한 하지라고 인식했던 듯하다. 

 

  칠지도(七支刀)는 대륙백제 12대 계왕 3년인 서기 346년 병오년 하지날(음력 516, 양력 621)에 완성된 칼이었고, 12대 계왕이 3469월에 죽자 그 아들인 무광왕(武廣王)이 왕위를 이었고, 그에게 즉위기념으로 바쳐졌던 의미 있는 칼이었다.

  그런데 근초고왕이 무광왕의 왕위를 빼앗아 가자 무광왕과 근초고왕 사이에 20여년에 걸쳐 왕위찬탈전이 발생하게 되었고, 365년경에 최종으로 무광왕이 패하게 되자 승리한 근초고왕은 대륙백제의 왕위를 잇게 되고, 패한 무광왕은 대륙을 떠나 한반도의 지모밀지로 와서 다시 백제(반도백제)를 세우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백제는 대륙백제와 반도백제 두 백제로 존재하게 되는데, 대륙백제는 중국 북조의 나라들과 국교를 맺게 되고, 반도백제는 남조의 나라들과 국교관계를 맺게 된다.

  이후 한반도의 반도백제는 빠르게 강국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대륙백제는 쇠약해지게 되어 100여년 후인 반도백제 모도왕(牟都王) 때 이르러 드디어 반도백제가 대륙백제(삼근왕 때)를 흡수통합하게 된다.

  그리하여 반도백제 모도왕은 둘째 손자인 모대(동성왕)를 대륙백제로 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고, 후일 동성왕이 대륙백제에서 시해 당하자 모도왕의 장손자로서 당시 반도백제의 왕위에 올라 있던 남제왕이 다시 이복동생인 사마를 대륙으로 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는데 이가 곧 무령왕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동성왕 이후의 대륙백제의 왕들은 모두 이 반도백제 무광왕의 후예들이고, 반도백제의 왕위계승에 대하여는 전해지지 않았다.

 

☆ 지금 한반도 전북 익산의 왕궁리 유적은 무광왕(武廣王)이 자리 잡은 반도백제의 도읍 지모밀지(枳慕蜜地)로 비정되는 곳이고, 제석사지는 한반도 최초의 절터로 보이는 곳이며, 익산쌍릉은 반도백제의 왕릉으로 비정해 볼 수 있고, 익산 미륵사지는 바로 이 반도백제 남제왕 70세 때인 519년 기해년에 그의 장수를 염원하기 위해 지어진 절이다.

 

  지금 칠지도의 최초 제작시기에 관한 주장들이 분분한데 필자가 보기에는 모두 잘못된 주장들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학자들이 병오정양(丙午正陽)”의 의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병오정양(丙午正陽)”이란 병오년 하지날이라는 의미인데, 그를 모르고 자꾸만 엉뚱한 방향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칠지도의 최초 제작시기를 명쾌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 학자들의 주장으로 칠지도 명문 속의 泰和(태화)와 중국연호인 太和(태화)를 같은 연호로 보고, 또 七支刀(칠지도)와 일본서기 신공황후 52년(A.D.372) 조의 "七枝刀(칠지도)"를 같은 칼로 보아 칠지도가 369년(근초고왕 24년)에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연호의 글자 자체가 다르고, 칠지도의 글자 역시 서로 달라 동일한 칼이라고 단정할 근거가 부족하고, 369년은 기사년이고, 음력 5월 16일은 을미일이며 이날의 오시(午時)는 임오시(壬午時)이고, 양력 7월6일이므로 병오정양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일부 학자들의 주장 중에 406년 병오년 제작설도 있긴 있으나 이 해의 음력 516일은 양력 617일 경인일로서 하지날이 아니므로 정양(正陽)이라고 새긴 의미를 설명할 수 없고,

  408(전지왕 4) 병오일 제작설이 있으나 이는 음력 516일을 음력 1116일로 보고 그날이 마침 병오일이기 때문에 대두된 주장일 것이지만 그날은 양력 1219일로서 동지날도 아니다. 따라서 이 주장은 병오(丙午)는 병오일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으나 정양(正陽)이라는 명문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466년 병오년 음력 516일도 양력 614일 임인일로서 역시 하지날이 아니다.

  또한 526년 병오년 음력 516일 갑인일은 양력 611일이고,

  586년 병오년 음력 516일 병인일은 양력 68일이며,

  646년 병오년 음력 516일 정미일은 양력 74일로서 하지와는 관계가 없다.

  병오년이며 음력 5월 16일(양력 6월 21일)이 하지날과 겹치는 해는 오직 서기 346년뿐인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기 때문에 필자가 칠지도(七支刀)의 최초 제작시기가 서기 346년 병오년 음력 516(양력 621) 하지(夏至) 날이 확실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칠지도 명문 전문 해석]

 

泰和 四年 五月 十六日 丙午 正陽

태화 4년(A.D.346) 병오년 5월 16일 하지날에

造百鍊鐵 七支刀

백번을 제련한 쇠로 칠지도를 완성하였다.

世辟百兵

왕이 백병을 거느리고 왕위에 올랐을 때

宜供供侯王☆☆☆☆作

공후왕이 .............를 시켜 만들어 바쳤던 것인데

先世以來未有此刀

선세 이래 이러한 칼은 없었다.

百濟王世子奇生聖音

(그런데 그 후) 백제 왕세자가 성음을 터트리며 기이하게 태어나

故爲倭王

왜왕이 되었으므로

旨造

칙지로서 글자를 새겨

傳示後世

후세에 전하여 보이도록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