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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전연 모용황의 고구려 환도성 침공로 “북도평활(北道平闊) 남도험협(南道險狹)”은 남과 북이 바뀌어 잘못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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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15.

윤여동설 - 전연 모용황의 고구려 환도성 침공로 “북도평활(北道平闊) 남도험협(南道險狹)”은 남과 북이 바뀌어 잘못 기록되었다

 

[고구려 목저성(木底城)으로 추정되는 지금 관청수고 서쪽의 진변성(鎭邊城)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6대 고국원왕 12(A.D.342) 조를 보면,

   2월 환도성(丸都城)을 보수하고 또 국내성(國內城)을 쌓았다.

   가을8월 왕이 환도성으로 옮겨왔다.

   겨울10월 연나라(전연) 임금 황(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입위장군 한(모용한)이 황(모용황)에게 청하기를, “고구려를 먼저 빼앗은 다음 우문을 쳐부수어야만 중원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고구려로 가는 길에는 두 길이 있는데,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며(北道平闊), 남쪽 길은 험하고 좁았다(南道險狹). 그리하여 군사들은 북쪽 길로 가자고 하였다.

 

[필자주 : 이 기록은 위 그림과 같이 “북쪽 길은 험하고 좁고(北道險狹), 남쪽 길은 평탄하고 넓었다(南道平闊)”. 따라서 이 기록은 남과 북이 바뀌어 잘못 기록된 것이다]

 

   (모용한)이 말하기를 적국이 우리의 대군이 반드시 남쪽 길로 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남쪽에 치중하고 북쪽을 가볍게 여길 것이니 왕께서는 마땅히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북쪽 길로 나가서 그들이 뜻하지 않은 때에 치게 되면 남쪽의 성들은 칠 필요도 없을 것이며, 따로 소부대를 남쪽 길로 보내면, 다소 실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심장부가 이미 무너졌으므로 팔다리는 꼼짝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황(모용황)이 이 말을 따랐다.

   겨울11월 연나라임금 황(모용황)이 친히 강병 4만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나와서 모용한과 모용패로서 선봉을 삼고, 따로이 장사 왕우 등을 보내어 군사 15천명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나와서 침입하게 하였다.

   (고구려 고국원왕)이 아우 무를 시켜 정예부대 5만을 거느리고 남쪽 길을 방어하게 하고, 자기는 약한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길(필자주 : 이때 고국원왕은 목저성(木底城)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전한다)을 방비하고 있었다.

   이때에 모용한 등이 먼저 와서 교전하고 황(모용황)이 대군으로서 잇따라 쳐들어오므로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좌장사 한수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를 죽이니 모든 적군들이 이긴 틈을 타서 드디어 환도성(丸都城)으로 들어왔다,

   왕이 초췌한 모습으로 단웅곡(檀雄谷)을 향하여 도망하니, 연나라 장군 모여니가 뒤쫓아 와서 왕의 어머니 주씨와 왕후를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갔다.

   이때에 왕우 등은 남쪽 길에서 우리 군사와의 전투에서 모두 전사하였다.

   이로 인하여 황(모용황)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 왕을 초청 하였으나 왕은 가지 않았다.

(모용황)이 돌아가려 할 때에 한수가 말하기를 고구려 땅을 수비군을 두어 지킬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그들의 임금이 도망하고, 백성들은 흩어져 산골짜기에 숨어 있으나 우리 대군이 돌아간 뒤에는 반드시 다시 모여들어 전쟁 뒷수습을 할 것이니 이것이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왕의 아버지의 유골과 살아있는 어머니를 포로로 잡아가지고 돌아갔다가 고구려왕이 제 발로 와서 사죄하기를 기다렸다가 돌려주어 은혜와 신의로써 무마하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하였다.

   연나라 왕 황(모용황)이 그의 말에 따라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의 유골을 싣고, 대궐 창고에 있는 역대의 보물들을 탈취하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허물어 버리고 돌아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15년(A.D.406) 조를 보면, “겨울 12월 연나라 임금 희(모용희)가 거란을 습격하려고 형북(陘北)까지 왔는데, 거란의 군사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그냥 돌아가려다가 군수품들을 버리고 경병으로서 우리나라(고구려)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연나라에서 3천여 리를 행군하여 왔으므로 군사와 마필이 피로하고 얼어 죽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의 목저성(木底城)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연나라와 거란의 중간쯤에 목저성이 위치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거란은 내몽골 오란찰포, 상도(商都) 부근에 위치했었고, 연나라는 하북성 탁주, 역현 부근에 위치했었다. 따라서 목저성은 그 중간지점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일 수 없다.

 

☆ 신당서 고구려전을 보면, “건봉3년(A.D.668) 2월에 이적이 설인귀를 이끌고 가서 부여성(필자주 : 옛 북부여성이었던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을 말하는 듯하다)을 빼앗으니 다른 30여성이 모두 항복하였다.

방동선과 고간이 신성(新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남건이 군대를 보내 습격하였다. 설인귀가 고간을 구원하려고 금산에서 싸움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고구려군이 북을 울리며 진군하는데, 예봉이 날카로웠다. 설인귀가 측면을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어 5만 명의 머리를 베었다.

남소성, 목저성, 창암성 3개성을 빼앗아 군사를 이끌고 그 땅을 점령하고 이적과 합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남소성이 언급되고 있어 신성과 목저성은 가까이 근접해 있는 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리]

 

모용황이 옮긴 전연(前燕)의 도읍 용성(龍城)은 지금의 북경 방산구 유리하진(琉璃河鎭)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국내성(國內城)은 지금의 연경구 영녕진(永寧鎭)을 말하는 것이고, 환도성(丸都城)은 지금의 북경 북쪽 회유구 발해진(渤海鎭)을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목저성(木底城)은 지금의 관청수고 서쪽 진변성(鎭邊城)으로 비정된다.[목저성은 국내성, 환도성, 신성과 근접]

따라서 전연의 도읍 용성(龍城)에서 고구려의 환도성(丸都城)으로 가려면, 옛 요동(遼東)인 지금의 북경을 지나는 길과 옛 요수(遼水)인 지금의 영정하를 타고 올라가 관청수고에 도착한 후 동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연경(延慶)을 지나는 두 길이 있을 것인데, 지금도 영정하를 타고 올라가는 협곡은 아주 험하고 좁은데, 협곡을 지나면 그곳에 국내성을 지키기 위하여 옛날에 축성했을 고구려의 목저성(木底城)이 위치했을 것이다.

따라서 북도평활(北道平闊) 남도험협(南道險狹)”북도험협(北道險狹) 남도평활(南道平闊)”의 오기임에 틀림없다.

이는 환도성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고는 정확한 침공로를 찾아낼 수가 없는 것인데, 옛 요동이 지금의 북경 부근, 고구려 환도성이 북경 북쪽 회유구 발해진 부근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전연 모용황의 환도성 침공 기록 중 남쪽 길과 북쪽 길이 바뀌어 기록되어 있음을 밝혀낼 수 있었다.

 

 

[참고]

☆ 북사 고구려전에도, “을불리(미천왕)가 죽고 아들 쇠(고국원왕)가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북위 건국4년(A.D.342)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이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남쪽(필자주 : 북쪽의 오기) 좁은 길로 쳐들어가 목저(木底城)에서 쇠의 군사를 대파하고 추격하여 환도(丸都城)에 이르니 쇠는 혼자서 도망하였다. 모용황은 쇠의 아버지(필자주 : 미천왕이다) 무덤을 파헤치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진귀한 보화를 노략질하고 남녀 5만 명을 사로잡았으며 그의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허문 뒤 돌아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목저성(木底城)은 고구려 서북방의 요충지인 신성(新城)에서 국내성(國內城), 환도성(丸都城)에 이르는 교통로 상에 배치된 중요한 성의 하나이다.

목저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신성이 축조된 뒤인 4세기 초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목저성이 문헌에서 처음 확인되는 것은 342년(고국원왕 12)에 ‘남도(南道)(필자주 : 북도의 오기)’를 통하여 고구려를 침공해온 전연(前燕) 모용황(慕容皝)의 4만 군사와 고국원왕(故國原王)의 1만5천의 군사가 목저(木底城)에서 격전을 벌인 기사이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이 패배하여, 결국 환도성이 함락당하고 왕후와 고구려인 5만 명이 전연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또 406년(광개토왕16)에는 후연(後燕)의 모용희(慕容熙)가 거란(契丹) 침략에 실패한 후 고구려 목저성을 공격한 바 있다.

고구려 말기에 당(唐)과의 전쟁 과정에서 667년(보장왕 26)에는 당군이 남소성·목저성·창암성을 공략한 바 있고, 668년에 남생(男生)이 국내성 등 9성과 10만여 호(戶)를 이끌고 당에 투항할 때 목저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록은 목저성이 국내성 방어선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고구려 멸망 후 당은 고구려 영역을 9도독부 42주(州)로 다스렸는데, 목저성은 그 중 42주의 하나로 편제되었다.[출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