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람과의 여행

정용주 2009. 1. 11. 16:06

오늘은 무지 추운 날씨이다.

휴일 집사람과 바람쐴겸해서 송추 어머니 산소를 들려 평양면옥 냉면 한그릇 먹고

근처 절이나 한군데 다녀오기로하고는 길을 나섰다.

오랬만에 둘이 나서는 길이다.

기름값이 도체 너무 올라 우리 스따일대로 조금 멀리 한번 다녀올라치면 자동차가 족히 20만원은 잡아묵는다.

못다녔다..

에혀... ㅎㅎ

 

어머니 산소 봉분위에 낀 이끼가 꽃을 피웠다.

살을 에이는 한 겨울 추위속에...

예쁘신 분... 내 어머니...보구싶다......어으헝헝헝헝~~~ 

 

 

 

 

 

 

김신조루트 우이령의 지금 모습이다..

왼쪽의 넓은 운동장은 유격이라는 비석이 세워진 군부대 유격장이다.

외줄타고 개울을 건너가는 교장이었다.

정작 그 눔의 외줄을 언능 타게하면 좋으련만......

오전 내내 주구장창 PT체조만 허벌나게 시키는 그 단내나는 유격훈련..ㅎㅎ

이 곳은 일반에게 폐쇄된 40여년 동안 군 유격장으로 쓰였는가 보다.

 

내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중학교 2학년이었던 68년이었다.

음력 6월달 무지하게 더웠던 여름날.. 위암으로 고생하시다 올망졸망 5자식을 놓고 돌아가신 울 엄마..

38세... 지금 내나이 쉰중반에 들어 생각하니 참으로 꽃다운 나이에 어찌 눈을 감으셨을까..

가심이 또 아려온다..

 

김신조이야기를 하려는데 공연히 엄니생각이...

그동안 못느끼고 살았는데 엄니 돌아가신 해와

같은 68년의 사건이었다..  

 

그 해 벽두인 1월 21일 이른아침

지금의 청운동 고갯길을 느닷없이 20여명의 육군 장교들이 무장을 갖춘 채 줄을 맞추어 구보로 넘어오고 있었다.

마침 출근시간에 그 곳을 넘어오던 종로경찰서장인가가 언듯스쳐지나가다 모두 초급장교들만 뭉쳐서 뛰는게 무언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돌아서서 길을 막고 물었다고 한다.

-잠깐!! 어느 부대소속인데 어디를 가는것이오??

-???(에이 이 쌍 간나새끼...)........한마디 대답도 없이 그자리에서 바로 탕탕탕!!!

경찰서장을 사살하고 잠시 뒤

청운동 모랭이를 돌아 나타난 시내버스를 공비들은 총소리를 듣고 출동하는 군인들로 착각을 하고는 버스에 총을 쏘고 수류탄을 까 넣는다.

 

그들의 목적지였던 청와대 담장과는 불과 수백미터거리의 지척이었다.

이름하야 1.21사태다.

 

그 들은 이북의 124군부대 출신으로 스물 몇명 전원이 함경도 출신으로 구성된 특수부대...

당시 남한군에서는 상상할 수없는 빠른 속도의 산악구보로 이동했기 때문에 포위망을 비웃었던...

 

그 124군부대 그 들의 훈련소 위치가 내가 근무했던 김포 하성의 한강하구에서 빤히 건너다 보이는 개성쪽의 관산포라 했던걸로 기억한다.

한강 물위에 띠엄띠엄 떠있는 초소가 있던 전류리 강상초소...

아마도 그 강상초소도 1.21사태 이 후로 생겨났으리라.

지금도 자유로 오두산전망대 조금 못미친 곳에 강 가운데 덩그라니 1개인가 2개인가 남아있다.

 

1.21사태가 만든 또 하나가 향토예비군이다.

당시 향토예비군의 대표구호가 "싸우며 건설하자"였으니...

온 국민의 무장을 불러온 1.21사태..

당시 공비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였던 김신조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있을까...

맞다.......고등학생들 교련도 그 때 생겼구나...

 

그 때 박정희가 얼마나 놀랬을까.

 

문득.....

혹시나해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역시나

1.21사태가 낳은 또 하나가

우리나라도 서둘러서 각 군별로 대북테러를 목적으로하는 특수부대를 설치하게된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실미도부대는 공군산하의 특수부대였다.

1.21사태 3년 후 실미도에서 특수훈련도중 폭동을 일으켜 교관을 사살하고 청와대로 항의하러 간다고 무장탈영한  요원들은 인천서 버스를 탈취 서울 노량진 유한양행 앞에서 끝내 모두 사살당한다.

그 실미도부대의 창설일이 1.21사태 후 불과 3달만인 68년 4월이라 부대 명칭이 684부대였다고 한다.

그 때 김신조일당이 통과해서 북한산루트로 올라선 곳이 바로 이 곳 우이령이었다.

우이령은 우이동에서 고양 송추로 넘어오는 고갯길이다.

그 때 이 후 김신조가 이 길을 막아놓은지 벌써 40년이 됐구나.

최근에 고양시민들이 주축이되서 통행재개를 요구하는 운동을 벌인다고 한다.

 

하지만....이제는 오랬만에 보는 비포장 길이 한편으로는 정겹기까지하구나.

 

 

 

인터넷에서 퍼온 실미도부대의 휘장과 구호가 섬뜩하다.

우리의 신조.... 백골

 

 

석굴암 주차장에 도착해서 올려다보니  암봉들의 모습이 준엄하다....

오봉산의 다섯봉우리 중 마지막 관음봉 이란다.

석굴암은 깎아지른 벼랑같이 좁은 터에 자리잡고 있었다.

 

 

 

대웅전 금당과 어우러진 암봉...

 

 

 

지촉인 수인으로 보아 석가모니불과 지장보살 관세음 보살을 모셨다. 

 

 

이 절의 메인인 석굴.

석굴암... 나한전이란 현판을 걸었다.

 

 

집사람과 석굴암의 문을 여는 순간.....펼쳐진 광경에 그만 넋을 잃을 정도였다.

컴컴한 동굴속으로 뻗어들어가는 햇살로 법당 안에 신비스런 모습이 연출되었다.

맑은 햇살이 깊숙히 법당안으로 뻗어들어와 바닥 장판에 반사되어

마치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처럼 주존불인 나반존자상을 환하게 비추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놀라워 집사람과 한동안 말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다.

햇살은 바닥에 부딪혀 산란되면서 직접 쪼이는 햇살처럼 광포하지도않고 아주 부드러운 최고의 빛이였다.

나중에 사진을 보고야 알았지만 우리가 문을 연 순간이

마침 햇살의 방향이 가운데 정면으로 나반존자를 비추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햇살은 천천히 오른쪽 나반존자쪽으로 옮겨진다.

마치 성스러운 장면을 목격한 것과 같은 기분으로 절을 올렸다.

 

아...오기를 잘 했구나.. 싶은 그런....

마침 어머니 성묘를 하고 온 길이라서 더욱 그러하다.

평생 절에 다니신 어머니가 보시고는 참 좋아하셨겠다 싶은 마음에 감사를 올렸다.

-어머니.. 부디 편히 계세요...

 

 

 

 

 

 

 

 

 

 

 

햇살가득 한 나반존자상那畔尊者像..

여러 아라한 성자들의 모습이 익살스럽다..

 

인터넷에 의하면

나반존자’로도 불리는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을 줄인 말로 의미하는 바는 ‘살적(殺賊), 응공(應供), 응진(應眞)’등으로 해석된다. 살적은 “수행의 적인 모든 번뇌를 항복 받아 없앤다”는 뜻이고, 응공은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마땅히 받을 만한 자격을 갖췄다”는 뜻이며 응진은 “진리에 상응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삼성각에 독특하게도 금동 지장보살상을 모셨다.

어쩌면 독성탱을 나한전의 주존으로 모셨기 때문일까?

 

 

북한산 능선넘어 석양이 눈부시다. 

멋지다. 

 

 

 

 

석굴암 요사채인듯 싶다. 

 

 

 

 참으로 맑은 하늘아래 암봉이 힘차다.

 

 

 

석굴암은 아직 민간인 통제구역 안에 있다.

그동안 석굴암이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리라.

들어갈 때 초병에게 주민증을 맡기고 나올 때 찾아 나왔다.

이 부대가 얼마전 내변산 산행을 함께한 종왕이가 이 곳 사단장을 끝으로 예편한 그 부대이기도 하다. 

 

 

 

 

 

 

 

 

 

 

 

 

 

 

 

 

1968년 1월 말 아주 혹독하게 추운 겨울날, 124부대가 청와대근처까지 왔었지~! 그래서 생긴 것이 향토예비군. 그래서 그곳은 오랜세월동안 통제가 될 수 밖에. 기행문에 걸린 사진, 문장에 건축가다운 예술적 세련미가 있다.
1월초의 추위속에서도 핀 이끼꽃이 신기하기만 하네요.
우이령 아래로 터널을 뚫겠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더이상 북한산에 터널을 둟어도 안되고 도로를 내어도 안됩니다.
그냥 사람들이나 넘나들게 등산로나 개방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