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진화 - 심보선(1970~ )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내 방에는 조용한 책상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 세계여! 영원한 악천후여! 나에게 벼락 같은 모서리를 선사해다오! 설탕이 없었다면 개미는 좀더 커다란 것으로 진화했겠지 이것이 내가 밤새 고민 끝..
간단한 부탁 -정현종(1939~) 지구의 한쪽에서 그에 대한 어떤 수식어도 즉시 미사일로 파괴되고 그 어떤 형용사도 즉시 피투성이가 되며 그 어떤 동사도 즉시 참혹하게 정지하는 전쟁을 하고 있을 때, 저녁 먹고 빈들빈들 남녀 두 사람이 동네 상가 꽃집 진열장을 들여다보고 있는 풍경의 감..
돌 -김윤성(1925~2017) 달팽이가 돌 위에 올라앉은 아침 뒷발을 뱀에게 물린 개구리가 버둥대며 마지막 보는 돌 삼분지 일쯤 땅에 묻혀 있는 늘 그날이 그날 같은 돌의 생애 나뭇잎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돌 한 번도 사람 손에 닿아본 적 없는 잡초 속에 호젓이 굴러 있는 돌 (…) 아..
네모를 향하여 -최승호(1954~) 은행 계단 앞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땡볕에 지쳐 축 늘어져 있다 이 여름 도시에선 모두들 얼마나 피곤하게 살아오고 또 죽어가는지 (…) 자라나는 빌딩들의 네모난 유리 속에 갇혀 네모나는 인간의 네모난 사고방식, 그들은 네모난 관 속에 누워서야 비로소 네..
시의 시대 -이창기(1959~ ) 라면이 끓는 사이 냉장고에서 달걀 하나를 꺼낸다. 무정란이다. 껍데기에는 붉은 핏자국과 함께 생산일자가 찍혀 있다. 누군가 그를 낳은 것이다. 비좁은 닭장에 갇혀, 애비도 없이. 그가 누굴 닮았건, 그가 누구이건 인 마이 마인드, 인 마이 하트, 인 마이 소울을 ..
야간 통행 금지 -폴 엘뤼아르(1895~1952) 어쩌란 말인가 문은 감시받고 있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갇혀 있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거리는 차단되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도시는 정복되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도시는 굶주려 있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무장 해제되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
섬 비금도(飛禽島) -강기원(1957~ ) 날고 싶은 섬 한 마리가 있다 지느러미 없이 헤엄쳐 가고픈 섬 한 마리가 있다 덫에 걸린 매처럼 때때로 푸드덕거리는 섬 연자맷돌을 메고 비상하려는 섬 일몰의 두근거리는 선홍빛 명사십리 바다도 어쩌지 못하는 섬 한 마리 내 안에 있다 새가 나는 모..
페르소나 -장이지(1976~ ) 동생은 오늘도 일이 없다. 열심히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동생 몰래 정리해본 동생의 통장 잔고는 십오만 원. 서른세 살의 무명 배우는 고단하겠구나. 학교에서 맞고 들어온 이십여 년 전의 너처럼 너는 얼굴에 무슨 불룩한 자루 같은 것을 달고 있는데. 슬픔이 인..
빅 풋 -석민재(1975~ ) 군함처럼 큰 발을 끌고 아버지가 낭떠러지까지 오두막집을 밀고 갔다가 밀고 왔다가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스텝을 맞추며 말기 암, 엄마를 재우고 있다 죽음을 데리고 놀고 있다 죽을까 말까 죽어줄까 말까 엄마는 아빠를 놀리고 있다 아기처럼 엄마처럼 절벽 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