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의 약속 문태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을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별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견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늙은 꽃 문정희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필 때 다 써 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송이도 없다 피 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메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방심 손택수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 버렸다 ..
오십 세 문정희 나이 오십은 콩떡이다 말랑하고 구수하고 정겹지만 누구도 선뜻 손을 내밀지 않는 화려한 뷔페상 위의 콩떡이다 오늘 아침 눈을 떠 보니 글쎄 내가 콩떡이 되어 있다 하지만 내 죄는 아니다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시간은 안 가고 나이만 왔다..
손에 강 같은 평화 2 장경린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다가 안경알을 깼다 항암제를 투약하면서도 도수를 높여가며 집착하던 안경이었다 점점 흐려지는 세상을 그저 그러려니 밀쳐두고 살았다면 암에 걸리지도 않았을텐데 아쉬워하면서 깨진 안경알을 치우다가 손을 베었다 스스로 불러들..
편지 고향에서 혼자 죽음을 바라보는 일흔 여덟 어머니에게 문정희 하나만 사랑하시고 모두 버리세요. 그 하나 그것은 생이 아니라 약속이예요. 모두가 혼자 가지만 한 곳으로 갑니다. 그것은 즐거운 약속입니다 어머니 조금 먼저 오신 어머니는 조금 먼저 그곳에 가시고 조금 나중 온 우..
홀로 우는 방 문정희 새로 이사 와 집수리를 하며 부엌 옆 작은 방 하나를 홀로 우는 방으로 정했다 그 방에서 홀로 울 일로 나의 미래는 벌써 빛나는 시인 밤새워 달그락달그락 남몰래 비단 짜는 학이 되었다가 우렁각시가 되었다가 새벽에 누군가 약력을 쓰라고 하면 나의 고향은 눈물 ..
미안하다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 미안하다 ...................................................... 감상 기억이 있는 ..
못 윤 효 가슴에 굵은 못을 박고 사는 사람들이 생애가 저물어가도록 그 못을 차마 뽑아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기 생의 가장 뜨거운 부분을 거기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 감상 벽에 페인트 칠을 하고 보니 구멍이 보인다. 못이 있었던 자리, 못 위에 걸린..
조용한 일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 볼 일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감상 버스에서 내렸을 때 볕바른 그녀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
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 잎 몇 장 더 얹어 뒤란으로간다. 저녁만큼..
...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내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 젖히고 -손택수시인의 시 중에서- 이곳은 나의 대청마루 같은 공간입니다. 다녀가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글 내용과 관계없는 댓글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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