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손금 양현주 국도처럼 굽은 생명선과 툭하면 흔들리는 감정선 나무가 나무를 낳고 잎 하나 달아놓는 것은 태초부터 계획된 것일까 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리기 전 당신은 가파른 숲 속을 혼자 돌다 넘어지고 곁가지는 시끄러웠다 나무의 손금에는 접근금지 팻말이 놓여있다 제 몸..
물고기자리별 양현주 마지막 페이지에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아침이 되면 죽어 나오는 서간체의 감정들 그리운 것들은 쉼표도 없이 더디다 진도를 내지 못한다 당신의 뜰에 과꽃이 피었다는 편지 새해에는 마지막 연가가 되어 그대에게 가리라 손가락을 꼽다가 밤늦도록 종이를 찢고 마..
어둠과 사귀다 양현주 어둠이 잘 보이도록 개안 수술을 했다 천지에 빛들이 환하여 내 눈 비로소 허름한 시장 바닥이 보였다 눈코 뜰 새 없이 빛을 먹어치우는 사무실 드륵- 드르륵 복사기가 던져주는 검은 글자 불빛 끝자리에 어둠을 인쇄하는 동안 내 손은 잠들지 못했다 한 줌 쌈지 빛..
단풍나무 생각 양현주 감정의 진행 속도가 빠를수록 잎의 살결은 붉다 숲은 낮게 몸을 숙이고 두 번째 변성기가 찾아온다 뾰족하게 벌레 먹은 구멍은 날카롭고도 굵게 한 번 또는 서너 번 갉아 먹힌 갈림길, 바짝 목이 타 들어갔다 그는 늙어서도 무릎 꿇고 웃을 줄 안다 나뭇잎에 찍힌 붉..
걷지 않는 바다 양현주 노을이 문턱에 차오를 때까지 나무 벤치에 앉아 공원을 떠나지 못했다 비 오는 날에는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먼 바다를 기다리다 미끄럼 타고 내려왔다 꽃나무가 보고 싶었지만 다리를 가진 수천의 나무는 걷지 않았다 수평선에 걸린 돛단배를 지키던 어부들 선술..
달팽이는 달팽이 양현주 바다에 닿는 것은 내 생애 불가능한 일 한참을 걸은 것 같은데 쉴 곳이 없다 나를 지켜보는 바람의 등, 넓힐 수 없는 보폭에 한 발짝 늦게 목적지에 당도했다 제자리 뛰기 같은 걸음걸이 앞만 보았으므로 아무것도 볼 수 없고 토마시의 공격을 피하려고 정교하게 ..
나무공장 양현주 눈을 감은 것은 나무 잠들지 못한 건 너에게서 태어난 한 잎이다 오래 기억에 남는 나이테의 숨소리를 생산하고 싶었다 야간을 강행하던 난산 가슴에 불이 붙어 머리에 닿고 뿌리까지 촉수를 뻗었다 억만년 거슬러 뱃속에 꽃이 피고 바람 든 가지 끝에 노란 별이 주머니 ..
갈잎 소리에 그대가 그립다 양현주 홍시로 익을 때까지 가지에 매달린 것은 오랜 기다림이다 눈물을 내주고서야 오래 참음이 필요하다는 것 숲을 헤집는 갈잎 명치끝에 걸려 고갯마루를 넘지 못한다 별이 흔들고 지나 갈 때면 삭은 나뭇가지처럼 툭, 툭 갈라지다가 다시, 감꽃이 피고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