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과 소주 / 박수서 시내버스에서 내려 담배 사러 편의점 문을 열다 펴지는 우산처럼 나오는 사내의 두 손에 들고 있는 초콜릿과 소주를 보았다 얼마나 사는 일이 힘들면 백주대낮에 저럴까 어물이다 초콜릿과 소주의 궁합을 조금은 알고 있는 나는 오래전 동해항에서 블라디보스토..
중국집에서 점심이나 때우자고 겨울비였나 봄비였나 촉촉이 말하던 날 당신과 나는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 아무래도 양이 적을까 싶어 자장면 곱빼기 시켰지 양파와 김치, 단무지를 번갈아가며 면발과 한 참 등을 밀다보니 면은 사라지고 춘장의 고기와 야채만 수북했지 밥 한 공기 쓰..
새빨간 거짓말. 거짓말 [박수서] 분명 사천 짜장을 시켰는데 칠천 원이다 때 지난 점심, 냉장고 벽 위 매미처럼 붙어 있는 찌라시를 바라보며 신중하게 고르고 고른 것인데 맵다 여러 말할 것 없이 그냥 맵다 숯가마에 든 것처럼 땀이 흐르고 안경을 들썩거리고 머리를 벅벅 긁고 배롱나무..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92) 감나무 — 박수서 감은 익지 않았는데 감잎은 익어버렸다 다행이다 나는 아직 덜 익었다 세상 곁에서 어떻게 익어갈지 감나무에게 묻는 날이다 감이 익는 과정을 보면 참 묘하다. 하긴 자연의 변화는 모든 것이 오묘하지만, 감은 다른 열매와는 조금 다..
설거지 박수서 사내가 돈벌어주고 밤일 잘하는 것 말고 아내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일이 뭔가 생각하다 밥도 해보고 국도끼리고 반찬도하고 청소도하고 빨래도 널고 음식물쓰레기도 버렸지만 설거지는 못할 일이다 늘 돈 주고 돈 내놓으란 식이다 물기가 덜 말랐네 세제가 남아있네 밥..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쓰는 일 - 안도현의 시「애기똥풀」- 박수서(시인) 시인 안도현 하면 뭐 알만한 분들은 다 아실 이름입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뜨거운 사람이었느냐”「너에게 묻는다」시와 어른을 위한 동화『연어』로 유명한 시인이지요..
짖다외 1편 박수서 사랑을 부르는 짓은 화살나무 열매처럼 붉음의 알갱이를 입 밖으로 설레게 뱉어내는 일이 아니다 사랑이 도망가려 하는 날은 높은 산을 올라 아무리 내려 보아도 보이지 않는 어디 저 건너 세상에 소리 소문 없이 숨어사는 백발마녀에게 소원을 빌며, 세상 사랑이란 사..
범인은 게으른 겨울 햇볕 - 유강희의 동시「고드름붓」- 박수서(시인)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 있다. 작고 통통한 웃음이 소년 같은 유강희 형. 봄날 입맛 없을 때 혀를 살리는 나물 같은 사람이다. 대학 6년 선배인 시인은 지금도 독신이다. 시인 입장에서 독신이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
‘벚꽃’도 좋고 ‘푸른 솔’도 좋을 뿐인데 - 김지하의 시「새봄」- 박수서 내가 교과서에서 시를 공부할 시절은 지금처럼 많은 교과서와 현시대에 가까운 다양한 시편들이 실리지는 않았다. 현대시로 분류되어지는 초창기 시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몇몇 추억의 시인들이 교과서를 점..
박수서 시집 - 『슬픔에도 주량이 있다면』 (북인, 2013) 시단 데뷔 10년 동안 벌써 세 번째 시집을 출간할 정도로 활발하게 시를 쓰고 있는 박수서 시인의 시집 『슬픔에도 주량 이 있다면』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 첫 번째 특징은 여러 음식의 이름을 제목으로 차용한 시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