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눈으로 웃으시네 정희야 윤희야 순이 경이 주야 불러도 오지 않는 아이들 부르다 지쳐 소리조차 사라졌네 사라진 소리에 눈빛만 깊어졌네 병상의 여섯 해 일흔 달을 쉭쉭 거뜬하게 날 들어 올리던 에어매트도 작아진 내 몸 내려놓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네 떠나갈 시간이 자꾸 미뤄졌..
청청 무우청 푸른 잎 위에 홍고추 고운 꽃을 얹는다 검푸른 다시마 파도 타는 춤사위와 반짝이는 은멸치의 점프도 넣고 참나무에 기댄 표고아씨와 논두렁 아래 숨은 우렁각시도 불렀다 부글부글 속끓임이 오래여야 사는 맛도 깊어진다 누런 땅 빛 으깨어진 콩물에 녹아 뜨겁게 풀어지는 ..
오씨네 술집 앞 구두 수선집 해 저물도록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맨발의 참새떼만 이팝나무 흰 꽃 사이로 오르락 내리락 몸통이 홀쭉하다 얘들아 이리 와라 수선집 할아버지 쌀알 한 움큼 쥐고 나가 단골손님을 맞는다 햇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하얀 쌀알들 후루루룩 쏟아져 내리는 어린..
낙타를 보러 갔다 그의 등에 높이 앉아 사막을 건너려 했다 날마다 새로 펼쳐지는 막막한 캔버스에 바람이 지우는 그림을 그린다 낙타는 왜 여기에 터를 잡았으며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들어왔을까 휘황한 꿈을 꾸었던 돈황은 이제 막고굴의 그림으로만 남아있다 부처를 사모하여 석..
산길 산 아래 집 좁다란 산길을 가르마처럼 이고 있다 동문을 열고 아침을 들인다 산길위로 날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저 길 따라가 해를 맞이해야지 마음먹은 지 오래 밤새 눈이 내려 산길을 지웠다 골바람은 쌓인 눈을 날려 올리고 강아지와 함께 찍은 새벽발자국 눈보라 속에서 눈길..
블라맹크의 밀밭 추수가 끝난 밀밭을 따라 길을 걸어간다. 밀이삭을 세워 말리려고 밀단을 묶어두었던 것이 추수를 마친 후 밭에 버려져 있다. 황토밭은 너르고 구름이 가득 낀 하늘이 밀밭을 내리누르고 있다. 밀단은 처음 서 있던 모양새로 묶인 채로 서 있거나 쓰러지거나 흐트러져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