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금강경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구(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의 근거는? | 대승경전
진흙속의연꽃 2015.11.09 11:54

논사들이 세존의 말씀이라고 '경'을 편집하고
이상적인 인간상을 '보살'이라고 세운게 사실이라면

이는 사실에서 견해가 나온게 아니라
견해를 가지고 사실이라 주장하는 것이기에
사실지견이라 볼수 없습니다.

진리에서 견해가 생겨날 수는 있지만
견해로 진리를 만들 수는 없기에
그런 가르침에 대하여
깊은 숙고가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말씀이 경이 되고
인간이 세존이 될 순 있어도
경으로 말을 만들고
보살이 인간이 될 순 없으니
대승비불설에 대해 한 마디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무아, 오온도 무아, 그러므로 설법도 무아로 보아야 합니다. 즉 친설 비설이란 구분은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의에 합당하고 법에 합당하면 그것은 불설이 되며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은 고따마의 친설이 아니므로 경전이 아니다 한다면 불교의 궁극의 교리체계가 부정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은 논리가 다릅니다

초기경전은 사성제를 핵심으로 보나.

대승경전은 공사상을 핵심으로 봅니다.

또한 대승경전은 초기경전의 가르침을

전면적으로 부정합니다

유마경에서 부처님의 제자인 아라한을 저주한다던지

반야경의 사성제를 부정한다던지 등

경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죠

그리고 보살은 신화속에 등장하는

이상적인 인간인데다 실제 역사적으로 존재한적이

없습니다

업에 따라 펼쳐지는것이 세상인데

중생구제를 위해 지옥에 간다는 보살사상은

납득하기가 어렵죠



불교는 초기경전 만이 부처님 가르침이고, 금강경은 초기경전을 방편적으로 편집한 것에 공감합니다.  
또한 한자로된 공사상, 여래장등 반야계열의   중국식 한자식 경전은 더이상 불교가 아니라고 봅니다. 잡탕 힌두교에서 나온 중국식 조사불교에 다름아니라고   봅니다.

왜 부처님 근본 가르침 4부 니까야 근본경전을 무시하고 엄한데 가서 부처님을 찾는지 .. 그러고도 부처님을 애기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생각되며 금강경 반야계열을 따른다면 아예 불교자를 쓰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왜 부처님을 자신들 편한대로 찾는지 엄연히 근본 가르침 말씀이 있는데도요..   타종교두 자기 경전은 목숨걸구 지킵니다.
대승불교 이야기가 나와서 글을 적어 봅니다

대승불교

그것도 중국에 전파되면서 노장사상과 결합된 선불교

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하여 적어봅니다

1. 중국무술의 의권은

힘을 얻으려면 힘을 얻으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이완상태에서 길러지는 '자연력'을 기르라고 합니다

2. 장자의 일화에서 등장하는

도살업자 이야기를 보면

처음 3년간은 고기 살만 보였다가

나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고깃결을 따라 칼이 움직여져서

자기는 베어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3. 아나빠나사띠에서 호흡을 통해

몸을 극도로 이완시켜놓고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라는 가르침은

자신의 의지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봐라

그래서 대상에 대해 집착하지 마라는 가르침이 아닌가 합니다

4. 뭔가를 계획하고 너무 잘하려고 집착하면,

더 어색해지고 몸이 굳어져서 바보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특히 발표할때가 그렇습니다. 허나 욕심을 버리면

자연스러워집니다.

이러한 욕심이 앞서서 어색해지고 몸이 굳고

잡생각이 넘쳐나고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

무아의 경지에 이르면

편안해지고 자연스러워지며

사회에서 말하는 달인의 경지를 성취합니다.

이러한 경지를 찾는 것을

선불교의 깨달음이고

그로인해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취득한다는 비유를 드는게

아닌가 합니다

초기불교 부처님의 깨달음과는 깊이 측면에서

차이가 있겠지만

사회생활 하면서도 삼매를 잠시나마

맛볼수 있다는 측면에서

진정한 의미의 대승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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