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담마빠다 (192)

열반은 죽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 담마빠다
진흙속의연꽃 2016.01.10 23:16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글입니다.
  • 삭제된 댓글입니다.
  • 2016.01.11 07:22
어줍잖은 저의 소견으론,

님의 의견도 옳고, 연꽃님의 의견도 옳습니다.

__()__
미디어 에 올렸데 또 올려야 되네....

<< 무상상님, 실론쥐와 시골쥐님, 다원님, 수부띠님께님..
‘진흙속의 연꽃’은 ‘미디어붓다’에 기고한 글“열반, 시퍼렇게 살아 성취하는 것”(2016.01.07.)에서, ‘이 생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자만이 죽어서 저 언덕으로 갈 수 있음을 말한다.’라는 저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글을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댓글로 알만한 분들에게 해설을 부탁하였으나, 아무도 답해주시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진흙속의 연꽃’은 자신의 블로그에 ‘열반은 죽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2016.01.10.)라는 비슷한 내용의 글을 또 올렸습니다. 이번 글에도 전번 글에서와 같은 오류가 교정되지 않은 것 같아 바르게 정리해 봅니다.                 [무상상님, 실론쥐와 시골쥐님, 다원님, 수부띠님께님.. 뎃글 중]>>

①‘이 생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자만이 죽어서 저 언덕으로 갈 수 있음을 말한다.’[미디어 기고 표현]
②‘열반은 죽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꽃님이 블러그 표현]

★[다원 왈]
위 두 가지 말은 오류가 아닙니다.
①의‘생’과 ‘언덕’은 ‘세간’의 개념이지만 ‘건넘’과‘죽음’은 법의 개념입니다.
②의 ‘죽음’은                 법의 개념이 아니고 세간의 개념입니다.
꽃님이는                 같은 단어를 사용 했을 뿐이고 맥락에서는 다르게 이해를 해야 합니다. 다르게 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변견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더 자세히 설명을 할 수는 있으나...

하나 예를 들지요. 대답하세요.
무지개 색을 둥글게 이어서 원을 만들면 빨강색과 보라색이 이어집니다. 그러면 색과 색 사이는 중간색이 있는데... 빨간색과 중간색은 무슨 색일까요???
고동색이지요?(여러 가지로 진갈색, 진밤색 옻칠 색 등?)

그런데... 사실은 빨강과 보라색의 중간색은 우주 존재에 없다고 하네요... 그러면 우리집 벽구석에 도배되 있는 고동색 벽지는 뭘까요? 이말 이해되나요?

물론 갑자기 묻는 소리에 백과사전도 아닌 당신이, 다 알고 있어야 되는 법은 없으니까. 당신이 모른다는 것을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알기 전까지는 ‘존재에 없는 색’이란 말 외에는 더 해줄 수 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나는 어떻게 알았냐구요? 아는 방법을 알려 주면 당신처럼 나도 알 수 있다? 라고 말하고 싶나요? 해 줄수는 있는데... 지금 그렇게 할려고 하려면 내가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당신이 모르는 것이 내 책임 아니잖아요... 언제가 알게 된다면 어디선가 혼자서 고개를 끄덕끄덕거리고 말겠지요... 그 때야 내 말을 이해 할거고...
저 꽃님이 표현도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언젠간 알게 될거 같아요. 의문이 많으니... 열심히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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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도 지웠네... 벌써 알아 먹었나보네...


<원글:         미디어 붓다/ http://www.mediabuddha.net/news/view.php?number=17439 >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수행승이여, 이와같이 수행승은
네가지 선정을 닦고
네가지 선정을 익히면,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나아가고 열반으로 들어간다.

-동쪽으로의 경, SN53:1-


시작은 숨챙겨 눈감고 앉는 것입니다.

중간은 감각적 욕망을 건너고
분노와 두려움을 건너고
흥분과 회한을 건너고
해태와 혼침을 건너고
의심을 건너가는 것입니다.

끝은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여윔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번째 선정에 들고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번째 선정에 들고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행복한 세번째 선정에 들고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한 네번째 선정에 드는 것입니다.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나아가고 열반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열반 = 고요 = 적멸 = 오온에대한 집착의 소멸 = 오온의 소멸 = 존재의 소멸

열반을 존재의 소멸이라고 왜 대놓고 말하지 못할까요...?
염세주의 또는 비관주의라고 공격 받을까봐 그럴까요...

왠지 불교도들마다 열반을 다르게 인식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만약 열반을 존재의 소멸이라고 인식한다면 열반을 지금 여기서 이루던(오온에 대한 집착의 소멸),
죽어서 이루던(반열반, 존재의 소멸) 중요한것 같지 않습니다.
진흙속의 연꽃님 ! 안녕하세요^^
석가모니 부처님 연기법의 향기를 따라 시나브로 여기에 이르렀내요!
은은한 연꾳들이 고즈넉한 이곳!
어느 절, 어느 산 보다 그윽함이 묻어나내요
친구 블로그 신청했는데, 손 잡아 맞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별도의 인삿말 적는곳을 찾지 못해서 여기에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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