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많아지는 것보다, 일상이 바뀌는 것이 더 힘들다. 지난 일주일 동안 병원 의사 한 사람의 휴가 공백을 메우기 위해 아침부터 출근해서 번갈아가며 야간진료를 이었다. 휴가공백 진료일정은 원장님의 배려가 보이긴 했지만, 역시 일상이 바뀌는 것이 나에겐 힘든 일이었다. 다행히 평..
냉장고 파먹기는 일종의 괴식이다. 보통의 음식들은 레시피를 보고 필요한 재료를 준비한 뒤 조리과정을 거친다. 냉장고 파먹기는 냉장고 안의 재료들을 살핀 다음 결과적으로 만들어 낼 음식을 생각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은 된장찌개나 생선구이같은 보편적인 음식으로 탄생하기..
차트에 60대 후반으로 나이가 적힌 여자는 진료실에 들어오면서부터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다. 평범한 인상에, 약간은 부옇게 뜨고 주름의 밀도가 늘기 시작한 얼굴이었다. 몸살이 났으니 약하고 주사라도 놔 달라고, 목소리역시 들어오던 걸음 그대로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
일상은 정신없이 흐르고, 마음은 격렬하게 요동친다. 몸은 고요하게 분주한데, 생각은 끓어오르며 잔잔하다. 바쁘게 몸을 놀리며 안주할 시간을 찾고, 튀어오르는 생각들을 지그시 눌러 줄 묵직한 무언가를 찾는다. 이율배반, 합이 없는 미완의 변증법적 상태, 그게 내 요즘의 상태다. 진..
양력 3월 1일이 되자마자, 나는 호미를 잡았다. 제주에서 골갱이라 부르는, 돌이 많은 땅을 파고들기 좋게 날이 가느다란 호미를 들고 텃밭으로 들어섰다. 주저 앉은 자세로, 이랑을 뒤덮은 잡초들을 흙을 고르며 뿌리채 뽑아내었다. 이미 덤불이 된 잡초들 사이로, 겨우내 웃자란 쪽파들..
한 달 만에 다시 배를 탔다. 타이라바 선상낚시였다. 서울에서부터 20여년 연을 맺은 낚시형님이 휴가차 오셔서 배를 탄다길래 나도 즉흥적으로 같이 갑시다 했다. 사실 봄이 시작된 이후의 주말은 당분간 마당일에 집중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일만 하기엔 억울해서 하루 결심을 한 것이다...
오토바이 사고는 치료자를 항상 긴장하게 만든다. 그리고, 대부분의 환자가 젊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안타깝다. 응급실에서 만난 그도 마찬가지였다. 30대 초반의 그는 오토바이 운전 중 차를 피하다가 넘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슴에 충격을 받았는데, CT를 찍어보니 우측 갈비뼈 하나..
학회에 다녀왔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주말 오후에 비행기를 타고 제주를 떠났다. 도착한 서울의 저녁은 미세먼지가 많이 걷혀 있었고,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서울에도 봄이 올라오고 있구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짐이 많은 이유로 택시를 타고 처가로 향했다. 여기저기 벌어진 공사..
사소한 경험이자 사소한 만남이었다. 대학시절을 보낸 그 도시 중심가의 지하 주차장은 여전했다. 그러나 그 주차장을 만드는 공사장에서 수없이 반복했던 나의 삽질은, 흔적도 없는데다 나의 기억마저도 가물거릴 정도로 사소해졌다. 사무실 어두운 벽 안쪽에 걸린 안전모를 받아드는 ..
책 읽는 일을 좋아한다. 사람의 목소리가 들어있지 않은 음악을 CD 플레이어로 조용히 틀어놓고 책을 읽는 순간을 사랑한다. 요즘엔 아침 일찍 일어나 동이 트는 순간을 즐기며 책을 읽는다. 책을 읽은 지는 오래되었다. 15년도 더 된 오래 전,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남해의 상수리나무 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