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조건을 생각한다. 그것은 수평적으로는 경계를 만들고 수직적으로는 계급을 만든다. 조건이란 다양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무겁지 않다. 없어도 상관없는 그림자처럼, 무심하게 흘려버리거나 의식하지 않는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경계와 계급이 조밀하게 만드는 ..
‘피로사회’로 잘 알려진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느닷없이 땅을 예찬한다.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땅의 예찬’이라는 제목은 그가 시리즈처럼 펴내는 철학책 내용에 관한 상징적 제목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는 정말 3년간 정원을 일구면서 일기처럼 그 과정을 써 내려갔다. 땅을 ..
무의식적으로 비껴 서려는 나를 발견한다. 함께 있으면서도 논지를 회피하려는 심리가 자연스레 생긴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작은 자괴감에 빠진다. 그것은 내가 싫어했던 선배나 동료 의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 어쩔 수 없이 그런 모습으로 수렴되어 가는 건가 ..
지난 일주일은 텃밭에 앉을 일이 없었다. 할 일이 없나 골똘히 생각하며 바라볼 일도 없었다. 병원 일이 바쁘고 진료시간도 일시로 조정되어 아침부터 밤까지 병원에 있어야 하는 신세여서 텃밭을 생각할 겨를도 없긴 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실제 텃밭에는 일거리가 없었다. 제..
머리 위로 신열이 뜰 만큼 피로하고 짜증이 이는 시간이 지나고 있다. 이 신열은, 내가 스스로를 쥐어짜는 일이라면 묵묵히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외부 또는 타인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예상하거나 종잡을 수 없는 앞으로의 시간이 더해져서, 스트레스는 극에 달하..
영화를 한 번에 다 감상할 수 없었다. 조용하고 묵직하게 가슴을 눌러오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겹으로 쌓이는 기분 때문이었다. 감독은 주인공을 처음부터 버리기로 작정한 듯 했다. 항상 주인공을 비추는 화면은, 보는 사람에게도 버려짐의 기분을 충분히 선사했다. 마치 나락으로 떨어..
집 뒤편의 너른 밭에 이른 아침부터 몇몇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장갑과 토시와 엉덩이방석을 착용한 노인들이 누렇게 바래고 마른 콩들을 거두고 있었다. 넓다란 밭 서너곳에 하얀 비닐장판이 깔렸고, 그 위에서 뽑아 온 콩들을 일일이 거두고 있었다. 가을볕 쨍하고 건조한 날 이틀..
진료실에서 나와 마주앉은 환자들은 각자가 저마다의 고통을 나에게 쏟아낸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때로는 설명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의 고통을 온전히 알 수 없다. 나이가 점점 쌓이는 요즘에는 나도 몸의 곳곳이 아파온다. 특히 오른쪽 무릎이 때로는 힘들 정도로 ..
1. 신애는 격렬한 혼란 속에 빠져버린다.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해주러 간 자리에서, 이미 회개하고 용서받았다는 그의 목소리에 표정은 급격하게 얼어붙고 혼란스러워진다. 용서의 주체는 누구인가, 대체 내가 아니면 내 자식을 죽인 살인자 놈을 누가 용서할 수 있는가. 신애..
텃밭에는 다시 정적의 시간이 흘렀다. 깊어진 가을 볕에 좀 더 바짝 말라 황량해졌다. 땅이 드러나고 시야가 좋아지니, 마당의 반려견은 텃밭 가장자리를 따라 돌아다니는 동네 길고양이들에 예전보다 자주 흥분했다. 따지 않고 남겨둔 귤들은 더욱 노래졌고, 두릅나무는 갑자기 이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