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에서
이반 일리치가 생각한 공생의 도구는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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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200)

안녕, 안녕 / 박남수 | 시(詩)를 읽다
언덕에서 2015.12.08 06:00
시인의 아픔의 원인을 알수는 없지만 떠날 수 밖에 없다는 현실과 떠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드러내긴 부족함이 없는 시같습니다, 정년퇴직의 나이라면 시인의 55세 즈음인 73년 쯤 이라 생각했는데.. 75년 미국으로 가셨군요. 동아일보 1975년 4월 16일 자에 미국 이민가는 박남수 시인에 대한 기사가 나와있네요.( 그런데 기사에는 시인의 나이를 62세로 표현하고 있군요..? 동아일보가 시인의 나이를 착각한듯     ).. 꽃지게라 표현한 것은 다른 사람과 같이 할 수 없는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걸 꾸민 표현같은데.. 고향땅을 떠나 미국으로가는 기분이 사실은 꽃가마마냥 거의 산채로 저 세상가는 기분임을 표현한 듯하네요.그것도 자신이 자신의 상여를 맨 기분으로. 왜 미국으로 가셨는지 이유도 올려주시면 시를 이해하기 더 좋을 것같은데 너무 오래전 일이라 쉽지 않겠지요?
동아일보가 기사를 잘못 쓴 것으로 보아야겠습니다.
왜 미국으로 이민을 가야했는지에 대해서는 시원하게 설명하는 곳이 없으니
결국은 상상에 의존해야 할 듯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판단하는 것처럼 '경계인' 체질이 원인일 수 있고
1975년 당시의 답답한 군사독재의 탓일 수도 있겠지요.
위의 시에서 등장하는 '자유'라든가 '아픔' 같은 단어들을 보면서 해 본 생각입니다.
경계인이라는 삶... 정말 힘든 것인데 특히 70년대 한국처럼 반공이 표면적 국시였던 시절엔 시인들에겐 자신 만의 메타포를 쓰고 싶어도 쓸 수없는 한계상황이었을 꺼라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월남한 시인이니.. 그때 움추려들고 억압되었던     표현들이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문학과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같습니다..마치 감았던     철사를 풀어도 올바른 성장이 불가능한 분재들처럼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마음이 아프네요..그 떠나는 노시인의 뒷모습이 연상되면서..시대유감을 느낍니다
박남수 시인의 이 시를 읽으면 최인훈의 소설 <광장>이 생각납니다.
광장의 주인공 명준도 경계인이었습니다.

철학도 명준은 진정한 광장을 찾아 월북, 남하, 전쟁 중에 포로가 되지요.
남한과 북한을 오가면서 남한의 나태와 방종, 북한의 부자유수러운 이념적 구속에 환멸을 느끼고 진정한 광장을 찾아
중립국을 선택하여 인도로 가다가 결국 삶의 참된 가치에 의문을 느끼고 배 위에서 투신 자살하지요.
박남수 시인과 이명준은 오버랩되는 것은 왜 인지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새롭습니다.
'언어를 캐던 하얀손으로'라는 표현이 비장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의사선생님이었던 걸로 제가 잘못 알고 있었네요.검색을 해보니 인문학 강의를 하셨고 '사상계'편집위원을 하셨네요.
문학사를 장식한 대시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분이 조국을 등진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부인 강창희씨는 피아니스트라고 들었습니다.
아침 이미지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만난 시지요.
그보다도 진솔한 시인의 이야기를 읽는 것 같아서 마음이 짠합니다.
부인은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날 것을 대비해서 남편에게 밥하는 법,
빨래하는 법 등을 가르쳤다는 글을 익은 기억이 납니다.
그런 것도 짠한 것이지요.
"비유는 시와 삶의 남다른 시간의 굴절과 공간의 이동을 직접 체험해 온 시인의 새처럼 날아보았으면 하는 자유로움......"

부끄럽지만 처음 대하는 시 같습니다.
1951년 월남, 1975년 미국으로 이주...... '비유'에 대한 설명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 시인이 적지 않은 나이에 미국으로 이주했던 것은 오로지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고
그렇다고 하면 이 시인은 탁상에서만 자유를 외친 것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도구는 물론이고 철학적 행동으로써 자유를 추구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비유나 관념을 묘사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써내려간 시에서 보여지는 비장함이 슬프게     느껴졌습니다.
즐거운 듯 얼굴 가득 웃음을 지어라.
어깨를 쭈욱 펴고 심호흡을 한 뒤 노래를 부르자.
노래가 아니라면 휘파람이라도 좋다.
이렇게 즐거운 듯 행동하면, 우울해지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은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데일 카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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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하루되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1951년 월남이라면 월남 하기 전 지옥 같아지는 이북에서의 생활, 월남하는 동안의 고초, 와서도 그 고초 참으로 힘드셨을 겁니다.
1975년 미국으로 이주 하셨다는 58세의 연세, 월남해서 20년이 더 지나도 시인은 나라는 혼란스럽고, 그동안 내날이구나, 내 나라이구나란
생각을 못하셨지 싶습니다.

저가 살아 보니 이러쿵 저러쿵 해도 젊어서는 남편은 울이 되었고, 정년 퇴직을 하고 처음 몇해는 그래도 기개가 살아 있지만,
점점 아내가 남편의 울이 되어 가던데요.
아내가 가신지 그 2년을 세상사에 강하지도 못하시고, 세상사에 잘 대처할 유연성도 없으신 시인께서는 참으로 낭감한 혼자인
생활이셨을 겁니다.

심지어는 다 성인된 자식들에게도 안 부모는 그들의 기분도 알고, 되도록이면 하나 마나 한 말이 자식들에게 스트레스가 된다 싶어서
하지 않으려하게 되는데, 불쑥 불쑥 한다는 말이 자식들과는 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주로 그러지 말라는 뜻의 말을 하니
결국은 자식들에게도 아내를 통해서 이어지는 듯 하게 살아들 가고 있습니다.

그런 저런 세상과 나이들어가면서의 세상과 비교 해 보니 시인의 맘이 전해 집니다.
준서할머님의 시 해석을 만일 박남수 시인이 보았다면
어쩌면 자신의 삶과 마음을 그대로 꿰뚫어 보고 있느냐며 놀라할     것 같습니다.
표현하신대로 1951년 월남과 1975년 미국으로의 이주는 그분이 '경계인'으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것 같습니다.
일찌기 맑스나 프로이드도
인간이란 대체로 다 비슷비슷하며, 같은 종류의 심리적, 경제적 멍에를 지고 울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주신 댓글을 읽으니 새삼 그러한 면들이 이해가 되고
저 시인의 마음 역시 전해져 옵니다.
감사합니다.
준서할미가 부산에서 살다가 국민학교 4학년 신학기에 아버지 고향으로 갔었고, 고등학생인 때에 부산으로 다시 왔었습니다.
그러니     50년대 초 살기 어려워서 이웃간에 엄마들이 싸웠다 하면 머리꺼댕이 댕기면서 싸우고, 그 때만 해도 월사금이 있어서
몇달을 못 내는 학생들이 많아서 학교에서는 내라고 조르고, 집에서는 내일 준다해라 하고 학교 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아이를
문 밖으로 쫓아 내면 문 앞에서 울고 버팅기고, 물빨래방망이 들고 쫓고, 도망가고 그렇게 하다보면 학교까지 가는 길 반쯤은 가게 되고,
그 쯤에서 엄마는 돌아 가시고, 아이도 학교로 갑니다. 선생님 눈치 슬슬 보게 되지만, 선생님도 하교시에 월사금 독촉을 하셨으니
하루 공부는 멀쩡하게 다 하게 되었지요.

육이오 전쟁 후, 50년대 초반의 아주 어려웠던 부산도 보았고, 국민학교 3년, 중학교 3년을 시골에서 보낸 것이
일을 뜸질할 정도로 많이 했지만, 제 정서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고등학생 시절에 미군사지 바지 염색한 것으로 동복 바지 맞추어 입었지요.

고등학교 1학년 시절에 시인이신 50대 후반의 국어선생님이 계셨지요.
국어를 제대로 가르치실 실력이 못 되셔서 늘 1학년만 담임 하셨던 분이셨는데, 이상님의 시도, 이중섭님의 그림이야기,
부산으로 피난 오셨던 시인, 작가님들의 삶의 이야기도 자주 해 주셨지요.

그 때 그 국어선생님의 혼자 먼산 바라 보시던 모습처럼 아마도 박남수 시인님께서도 슬픈 생각으로 하늘과 먼산 바라 보셨지 싶습니다.
60년대 초...
제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부산의 변두리 마을도 머리끄댕이 잡고 싸우는 일을 보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아, 아...
저의 경우, 국민학교에서 월사금 못내어서 수업시간에 집으로 쫓겨가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고 ... 수업료 안주면 학교 안가겠다고 앙버텼던 기억이 많습니다. ㅜㅜ
그러니까 수업을 제대로 받질 못한 셈이었지요.
당시 교대를 막 졸업한 여선생님은 여덟살 국민학교 1학년인 제게 어찌나 가혹하게 대하였든지요...
그 분은 지금 60대 중후반일텐데 그때 왜 그렇게 하셨냐고 묻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박남수 시인은 평탄하지 못한 삶을 미국에서 마무리하며 세상을 떠나셨지만
위의 시는 후세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준서할머님 말씀처럼 슬픈 시선으로 하늘과 먼산을 보셨겠지요.

은퇴시점의 나이에 고국을 등 진 시인의 마음이어땠을까.
글을 읽으며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본에서 법문학부를 졸업한 깨인 지식인으로 당시의 정치상황을 감내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싶고, 학력에 어울리지 않게 특별한 직업도 없이 학교의 시간강사로 전전하며 어려운 생활을 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이북에서 월남한 선생이 남한생활에서 겪었을 좌절감이 시인으로 하여금 고국을 등지게 하지 않았을까   추측이 됩니다.
김규동, 김광림 시인도 월남하신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고루지 못햇던 그분의 고달픈 생활이 그분으로 하여금 고국을 떠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시를 읽으면 마음이 찹찹해 집니다.
시인이 비통해하며 조국을 떠나야 했던 이유는
위의 시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는 듯합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 나오는 이명준과 같은 경계인이라고 정의를 해야하는 건지
아니면 또다른 무엇이 있는 건지...
철학자 로널드 드위킨(Ronald Dworkin)의 표현처럼 우리가 직면하는 한계와 역경이 무엇이든 간에,
인간은 삶의 주인공으로서 자율성과 자유를 유지하고 싶어하기에
그러한 판단과 행동을 한 것이겠지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시였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잘 보고 가요.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여기는 지금 비가 내립니다.
옷 따뜻하게 입으시고 감기 조심하세요.
방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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