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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을 읽다 (203)

고대소설 『방한림전(方翰林傳)』 | 古典을 읽다
언덕에서 2019.02.26 06:00
"이갈리아의 딸들"이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가령 이렇습니다.

「결국, 아이를 보는 것은 맨움이야」브램이 보고 있던 신문 너머로 아들에게 책망하는 눈길을 던지며 말했다.
그녀가 화를 참기 힘들어 하는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난 지금 신문을 보고 있잖니」화가 난 그녀는 다시 신문을 읽었다.
「그렇지만 나는 뱃사람이 되고 싶다구요! 난 아기를 데리고 바다에 갈거예요!」페트로니우스가 당돌하게 말했다.
「그러면 그 아이의 엄마가 뭐라고 하겠니? 안 돼. 인생에는 참아야만 하는 것이 있는 법이야. 때가 되면 너도 알게 될거다.
우리 사회와 같은 민주 사회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똑같을 수는 없는 거야.」

지금 브램이라는 여성이 아들을 책망하는 장면입니다.
우리 사회로 말하면 아버지가 딸에게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 타이르듯
어머니가 아들에게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제 머리가 자꾸 남성 중심 사회로 되돌아가는 걸 느꼈고,
양성평등의식에 관한 한 아직 나는 멀었구나 싶었습니다.
요즘 이 블로그에서 소개되는 이런 작품들을 접하면서 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저런 온갖 얘기를 다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얘긴 다 접어두고
저 옛날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니,
이런 점에서는 그 얼마나 선진적이었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두 주인공은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이상적인 부부관계를 보여줍니다.
아내인 영혜빙은 남성에게 얽매이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성혼을 선택했다고 말하지요.
소설 속   ‘방한림전’의 서술자와 등장인물인 황제는 ‘기괴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이자 기특한 일’이라며 위로합니다.
제가 보는 관점에서 이 이야기는 조선 후기 서서히 싹트기 시작한 주체적 여성의식을 반영해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동성혼을 완성하지 않았는가 합니다. 실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비록 소설의 내용이지만 사람의 삶이 과거나 지금이나 비슷했다는 생각입니다.
아마 천 년이 더 흐른 뒤라도 당대의 사람들이 다 드러나지 않은 감추인 지금의 문화를 엿본다면 비슷하지 않을까요.
어쨌든 그 오래 전에 동성혼을 다룬 이야기가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19세기부터 주체적인 여성의식이 조금씩 감지되기 시작했다고 봐야겠지요.
소박맞은 여성이 오히려 이혼을 요구하는 문서를 관에 제출했는데,
그가 내세운 이혼 사유는 놀랍게도 남편이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거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변화된 여성의식을 수용하지 못한 사또가 실정법을 무리하게 적용하면서 악인으로 전락한 ‘춘향전’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흐름에서 고전소설은 변화하는 여성의식을 수용하고 흥미를 더해 영웅을 만들어내는데,
비로 <방한림전>같은 소설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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