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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를 정복하라! 고구려의 후예들 발해와 제나라 | 역사
화성인 mars 2009.04.20 11:07
당나라는 이세민에 의해 중흥의 바탕을 잡았으나 당시만 해도 위태로웠던 형국입니다. 북쪽 돌궐의 무리를 억눌렀다지만 안심을 할 수 없고, 서쪽에는 토번(티벳)이 있죠. 그리고 동쪽은 고구려가 웅거하고 있었습니다. 당나라는 사방에서 강한 적을 맞을 수 있던 상황이었죠. 특히 토번의 세력은 강대하여 그 위세가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서 머지않은 곳까지 미쳤습니다. 오죽하면 당의 이세민이 조카딸을 토번으로 보냈겠습니까? 그것도 여러번이나 사절을 보내 간청을 해서 말입니다. 만약 토번이 당나라로부터 고구려만큼의 거리로 떨어져 있었다면 이세민은 어떻게든 전쟁으로 그들을 정복하려 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장안의 위치가 너무 서쪽으로 치우쳐 토번과 가까이 있어 그들도 토번을 크게 의식할 수 밖에 었었습니다. 흉노계 선비족 왕조 당나라의 이세민은 매우 간악한 자였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자기의 조상이라고 선전하는 노자老子가 주창한 도교를 숭배하게 하는 한편, 불법佛法 또한 숭상하고 있는 모양새를 취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나라들에 전쟁을 벌이기에 앞서, 도교 혹은 불교를 먼저 침투시켜 그들의 정신을 무기력하게 만들려 했습니다. 실제로 문성공주는 토번에서 불교를 전파하는데 앞장섰으며 그녀가 당나라 조정에 부탁해 토번(티베트)의 수도 라싸에 불상을 안치할 사원인 '라모체 사원'을 짓기도 하고 토번왕인 송첸감포에게 부탁해 토번의 풍습 중 여러가지를 금지케 하기도 했죠.
당적 이세민은 고구려의 태왕 고건무에게 화친의 뜻을 담아 도교를 전파하려고도 했습니다. 이는 이미 고구려의 불교가 당나라보다 더 수준이 높고 고구려 고유의 선도仙道가 뿌리깊게 자리잡은 것을 흔들어 놓기 위한 이간책이었습니다. 곧 이세민은 겉으로는 평화를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었던 것입니다.
토번은 거칠지만 그들은 무武를 숭상하고 하늘을 믿었습니다. 다만 예禮를 몰라 걷지 못하는 노인들을 스스로 죽일 정도로 무지하기도 했지만 이 모두가 거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들 고유의 생존법이라 할 수 있죠. 그런데 이세민이 간청해 토번왕에게 시집보낸 그의 조카 문성공주는 자신과 함께 불법을 가지고 토번으로 들어가 토번에 절을 세우고 불교를 전파했습니다.
본래 문성공주가 결혼한 사람은 실제로는 토번왕 송첸감포가 아닌 그의 아들인 공첸이었지만, 공첸은 643년 젊은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이에 문성공주는 그를 추모하기 위한 사원을 짓기 위해 이세민에게 부탁했고, 이세민은 불상을 보내주었습니다. 이후 토번의 대영웅 송첸감포는 며느리인 문성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649년 사망했습니다.
송첸감포에게는 정비인 네팔공주를 비롯해 4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송첸감포 왕은 토번왕국을 통합하고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초석 위에 놓은 위업으로 티벳인은 그를 자비의 보살이며 티벳의 수호신 첸레지의 화신으로 여기고 있으며 문성공주는 라마교의 존상尊像이 되었죠.
이후 송첸감포의 죽음으로 토번의 정복사업은 중단됭었으나 이후 송첸감포의 유업에 따라 657년 송첸감포의 둘째아들 친룽과 대신 카르둥첸이 당나라에 출정하였고 659년에 친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던 토곡흔엽합과 토번간의 전쟁이 발발했으며 670년에는 대비천 전투에서 당의 고종이 보낸 설인귀의 18만 군대를 대파하고 그를 사로잡았죠. 당시 당의 최고 용장으로 불리던 설인귀는 이 패배로 서인庶人으로 강등될 정도로 당은 토번에게 혼쭐이 났습니다. 즉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트리고 동쪽을 제압한 당나라는 전전긍긍하며 신라와의 전쟁에서 대패한 것에는 이 토번의 힘이 작용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또 678년 토번이 날로 강성해지자 측천무후는 토번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중서령 이경현을 선봉장으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토번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토번의 명장 가르친링은 당군을 청해호 부근으로 유인하여 승풍령 근처에서 크게 승리를 거둡니다. 그러나 이때 당에 투항했던 백제의 유민 흑치상지 장군이 결사대 500을 이끌고 가르친링의 진영을 습격하는 바람에 이경현과 다른 장졸들을 놓치고 맙니다. 그러나 당군은 이 전투에서 수십만의 병력을 잃었습니다. 이외에도 692년 당은 20만에 가까운 병력을 토번과의 전쟁에서 잃어 옛 고구려의 땅에서 발해가 건국되고 돌궐이 재건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이렇듯 당시 토번은 강했습니다. 티베트에   불교를 전파한 것은 송첸감포가 문성공주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왕비로 삼았던 네팔공주가 먼저였고 실제 역사에서 당나라를 강하게 압박했던 토번을 흔들리게 한 것은 이세민이 보낸 문성공주라기 보다는 8세기 이후에 벌어진 내부의 분열이었습니다.결과적으로 본다면 토번에서 이세민의 계책은 실패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토번은 불교가 들어온 후 점차 약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지배층과 피지배층 가리지 않고 불교에 너무 빠져들어 국력이 약해지고 결국은 내전 그후 승리한 불교측에 의하여 전투력 상실, 전국민의 불교화와 자멸...
한때는 장안을 점령하며 당나라를 몰아부쳤지만 현실에 불교를 너무 반영해서 국력을 말아먹죠.
고구려처럼 토번 기병도 강해 당시 강대국으로 군림했던 토번이지만, 그들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토번이 흥하고 수십년 후 돌궐 제2제국이 일어나 부흥하여 당나라를 위협할 수 있었던 것은, 수나라와 당나라에 걸쳐 70여년간 벌어진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사실상 당나라는 엄청난 국력을 소모하고 붙들려있어 가능했던 일입니다.
당나라에 있어 고구려는 수나라의 원한을 갚고 당의 천하를 이루기 위한 최대의 걸림돌이자 제일의 주적이었습니다. 토번과 돌궐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고구려가 운이 없었죠. 당나라와 서로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 힘은 다 빼놓고 그 영광은 이들이 차지했으니...
그래도 고구려가 수와 당을 붙들어 놓아 토번이 큰 덕에 이후 발해가 건국하게 되었으니... 역사란 참...
  
문성공주만 하더라도 그 당시 반출이 엄격히 금지되던 누에를 토번(티베트)에 바치고서야, 문성공주를 보내는 것이 그것도 소실로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또 티베트의 강성함은 당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중일전쟁시까지도 쥐나 서부의 소수민족들은 전부 티베트의 지배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 쥐나공산국 서부지역 전역과 사천성의 읿부까지 티베트의 지배권이 미치고 있었습니다. 20세기 초까지의 여러 기행문들을 보게 되면 한결같이 나오는 사실들입니다. 티베트가 20세기 들어 중원에 점령당할 때가지 과장하면 한번도 한족 왕조에 패전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흉노계 몽골족 원나라와 고구려-발해의 후예 청나라의 지배를 빼고는 오히려 중원이 티베트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무협소설에 언제나 티베트가 악으로 언급되는 것은 짱골라들의 패전의 역사 탓이 아닌가 합니다.
왕소군이나 여타의 이야기를 미루어봐도 중원왕조가 흉노나 타국으로 공주를 보낼 때는 힘으로 누르지 못 했을 때 주로 쓰는 방법이었죠. 이후의 기록으로 보아도 토번은 수십만 단위릐 전쟁에서 당나라를 여러번 격파합니다.
그리고 문성공주는 본래 송첸감포의 아들에게 시집을 갔다가 후에 그 아들이 3년만에 죽자 송첸감포가 다시 맞아들였는데 그에게는 이미 3~4명의 아내가 있었으니, 소실은 소실이겠죠. 과부가 된 며느리를 아내로 맞는 것은 유목민의 전통에서는 형사취수나 미망인이 된 부모의 첩을 아내로 맞는 등의 전통이 있었으니... 흉노계 선비족 왕조 당나라도 그래서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죠. 고종과 측천무후의 관계나 당현종과 양귀비의 관계가 그러하죠. 측천무후는 고종의 아버지의 마누라였고 양귀비는 원래 당현종의 며느리였죠. 이것도 유목왕조의 전통이겠죠.
dd
딱히 중국무술 옹호하려는건 아닌데 한눈에 봐도 영춘권 하는 사람 몸에 근육 없는거 보이네염 -_-

영춘권도 오래한사람들 보면 근육이 있습니다. 일본인이 가라데가 짱입니다 라면서 유튜브에 올린 영상중 하나군요.

그 사람이 올린 동영상중에 가라데가 진 영상이 하나도 없었죠. 유파도 제 기억으로는 극진가라데 아니었던거로 기억하구요.
내용이 여러개로 복잡하여 읽기가 어렵습니다.
복사가 허용되면 주요내용으로 다시 나누어 정리하여 읽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