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우울한 날에 서정윤 산이 자신의 그림자로 짐승들을 울리고 강은 깊은 흐느낌으로 조개들의 전설을 만든다. 낡은 서점의 잊혀진 책 속에서 자신의 신화를 캐내는 뼈아픈 민족의 그림자와 손잡고 걸을 수 있는 내 핏줄의 단군 할아버지 산 짐승들이 <우우> 소리 내어 태백산 어귀..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1 저 곳은 노인을 위한 나라가 못된다. 서로 껴안고 있는 젊은이들, 나무의 새들 - 저 죽어가는 세대들- 은 노래 부르며, 연어 폭포, 고등어가 우글대는 바다, 물고기, 짐승, 또 새들은 온 여름 내내 찬미한다. 온갖 잉태하고 태어나고 죽는 것을. ..
너를 잃고 김수영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 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 있는 너는 억만 개의 모욕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고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늬가 없이 사는 삶이 보람 있..
입춘 이도윤 흰 수염만 쓰다듬지 말고 봄이여 어서 오게 어서 와 문을 열게 대문 앞에 얼쩡이는 입춘대길로만 말고 큰 발걸음으로 그대 오는 소리 나면 장수대 대승령 너머 깊은 산골에 숨은 곰취, 맹이, 평풍인들 어찌 그대 마중 않겠는가 또 저기 녹슨 호미와 쟁기를 손질하며 울력을 기..
음식을 먹으며 김지영 진 실 을 꼭꼭 씹어 위장에 넘기고 심호흡 한 번이면 하늘이 핑핑 두 눈은 정면에 중심은 마음에 이제 시작이다 가장 가까워야할 진실이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면 무엇을 믿고 무엇을 따를 것인가? 속이고 속는 세상 속에서 속지 않고 살아가려면 의심스러운 것들에..
늙은 개 서정윤 늙은 개가 짖을 때 우리는 자신이 가진 가장 강한 모습을 보여주거나 아니면 늙은 개 나이만큼의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그 늙은 개의 신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홀로서기(1987) 개가 짖는다. 이유가 있다. 낯선 무엇이 다가오기에 미운 무엇이 다가오기에 본능적 경..
내 안의 적敵을 쫓아내다 전진탁 비굴한 놈 서넛 눈치보는 놈 두엇 경계하는 놈 하나 도둑질하는 놈 둘 이간질하는 놈 둘 염치없는 놈 셋 미워하는 놈 하나 간사한 놈 두엇 뒷소리하는 놈 하나 비웃는 놈 두엇 도망치는 놈 하나 이놈들 모두가 내 안의 적敵! 하나씩, 하나씩 쫓아내다 따스..
미완성 박이도 돌밭에 오면 나는 울고 싶다 짐승처럼 야성(野性)의 소리로 하늘을 찌르고 싶다 내가 누구인지? 길들여지지 않은 외딴 나라의 짐승 흙속에서 천년, 눈이 뜨이고 물속에서 천년, 귀가 터져서 생명을 얻었는가 미지의 대상 말없는 상면(相面)이 좋다 꾸밈없는 모습으로 숨어..
야행(夜行) 하종오 밤에는 모든 것이 낮아지고 모든 것이 삐뚤어지는구나. 바로 걷지만 길이 비틀거리고 바로 서 있지만 길이 내려앉는구나.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었던 땅에 눈을 뜨고도 갈 수 없고 알몸으로 설 수 있었던 땅에 옷을 입고도 설 수 없구나. 이상하여라. 밤에는 한 사람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