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일본 전국시대 배경설명(4)-갑옷과 전투진영 한 방에 정리하기 | 일본
Uesgi 2011.01.27 23:02
구마모또성(물론 시멘트 재건축이지만)에서 본 갑옷이 매우 작아서 모형인지, 아니면 정말 당시 군인이 그렇게 작았는지 의문스러웠는데, 후자였군요. 이시가루들은 왜소했다고 쳐도, 잘 먹고 잘 자란 장국들도 그렇게 왜소했는지 궁금합니다.
150cm를 넘는 사람이 대부분 사무라이들이었겠죠, 사무라이였기에 좀 더 잘 먹었거나 체격이 좀 더 좋아서 사무라이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일반 잡병들은 굶어죽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었으니까 훨씬 작았을 겁니다.
당시 일본은 쇠고기를 먹지 못했습니다. 쇠고기를 먹는 조선을 보고 경악했을 정도로 소는 중요한 산업시설(?)이었습니다. 고기는 물론이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몇 세대가 지나다 보니 사무라이들도 유전자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세력가였던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청년시절 식사가 현미, 소금된장국, 생선 한마리, 무짠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모두 다 체격이 작은 것은 아니고 위에서 설명했듯이, 간혹 거구(?)의 사무라이들이 탄생하고 전장터를 주름잡게 됩니다.
체구가 작다는 핸디캪을 개개인의 전투력 강화와 역량의 강화로 극복했다고 생각해도 좋을까요..??
근데..당시 일본의 쌀 생산량은 조선보다 많지 않았나요~~~??(못먹어서 덩치가 작은것 같지는 않은거 같아서요~~^^)
왜란당시 조선과 전투를 회피하고 바로 만주쪽으로 나갔으면 어떤결과가 나왔을 까요~~~^^
제가 알기로 쌀 생산량은 전국시대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시기에 우리보다 훨씬 많아졌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통은 추수철이 되기 전에 공격을 나가 상대가 추수를 못하게 만들고, 공격을 받는 쪽은 반대로 상대의 공격이 예상되면 곡식이 익기도 전에 추수를 하는 것이 기본전략이었습니다. 일본 중부의 비옥한 농경지대가 후방이 되고 경제감각을 가진 다이묘들이 토지개척에 나서면서 급증했을 겁니다. 물론 이건 제가 그동안 알고 있던 내용이니까 다른 전문가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확인해봐야합니다.
못 먹어서 체구가 작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두 나라의 밥그릇 차이만 봐도 놀라울 정도입니다.

임진왜란에서는 우수한 개인화기, 경험에서 우러난 전투력, 무장의 지휘능력 등등으로 우리를 압도했었죠. 문경새재와 같은 전략요충지를 버리고 탄금대에서 야전으로 맞선 신립장군의 오판처럼 초반의 실수가 너무나도 컸습니다. 하다 못해 문경새재를 포기했으면 8,000명의 병력으로 한강이라는 천혜의 요새를 방어했어도 되었는데 '우리는 알되 적을 몰랐으니' 1승1패를 할 수 밖에요. 문제는 우리가 먼저 1패를 당했고 우리 땅에서 당했다는 것이지만요.
(수군의 압도적인 전력차, 의병의 궐기 덕분이지만) 조선을 제압하지도 못했는데 만주로 나가 명나라와 붙는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겁니다.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면서부터 일본군은 완전 수세에 올리기 시작합니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일본의 기동력은 거의 0에 가깝고 일본 현지에서 보급을 가져와야 하는 보급로가 너무 멀어서 만주였다면 더 일찍 참패를 했을 겁니다. 그리고 일본군의 방한장비가 워낙 열악해서 북한 지역에 간 일본군들은 동상에 걸릴 정도였는데, 만주였다면 더 했겠죠. 따뜻한 일본에서 평생을 지낸 일본군은 북한 지역의 겨울은 큰 충격이었을 겁니다. 기동력 0의 일본군은 그 추위를 그대로 맞았을 겁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찾아보니 당시 두 나라의 측량기준이 달라서 혼선이 있지만 임진왜란 시점에서는 2000~3000만석으로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전국시대가 치열했을 때에는 일본의 생산량은 절반 수준이하라고 보면 되겠죠.
제가 체질의학쪽에 관심이 있어서 8체질이란 걸 좀 공부했습니다.

체질의학에서 주장하는 게 채식을 해야하는 사람이 있고 육식을 해야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마다 식생활이 달라야한다는건데 일본같은 경우 수백 년 동안을 육식을 금하다보니 육식을 해야만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라지고 채식에 적합한 사람이 살아남았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일본인들 중에 채식주의자 비율이 우리나라보다 높다는 논리죠.

그런 주장이 다 맞다는 건 아닌데 과거의 채식과 육식의 차이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옛날 한국사람도 육식을 얼마나 했겠습니까만은 현재도 한국사람 중에는 육식을 해야하는 사람이 많고 일본에는 채식을 해야하는 사람이 더 많은 차이가 결국 체격차이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일본이 육식을 금한 것은 전국시대 통일 이후 도꾸가와 막부때 일입니다. 그 전에는 육식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요. 그래도 우리나라는 평화가 오래 지속되어 빈부의 격차가 극심하기는 했지만 육식을 할 수 있기는 했습니다.
체형이나 체질이 채식과 소식에 맞춰 변한 것은 맞을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요즘에는 일본인이 체격이 더 좋은데, 소식하는 식생활은 여전하더군요. 우리와 그들의 식사량을 보면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이런 종류의 글 정말 좋아합니다ㅎㅎ

그나저나 많은 분들이 일본도를 살점을 베는 칼로 착각하시는데, 일본 사무라이들(역사상 가장 많은 육탄전을 벌인)도 서양 나이트의 플레이트 메일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철과 가죽과 경화제 먹인 질긴 끈 등으로 온몸을 감싼 중갑을 입었기에 상대방의 살점을 베는 칼이 아닌 갑옷을 쪼개고 때려잡는 칼이었다고 하더군요. 글고 서양도 기사들이나 그런 무장을 했지, 일반 병사는 가죽 옷 위에 금속 조끼를 입고 손목발목만 쇠로 감쌀 정도의 무장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리고 크게 차이나지 않는 수준의 무장을 갖춘 보병용 검인 일본도와 바스타드 소드를 비교해보아도, 일본도가 바스타드 소드보다 좀 짧긴해도 무게는 거의 같았으며 마찬가지로 충분히 두툼했다고 들었습니다. 전에 중딩 때 검도 사범님이 해주신 말씀이 어렴풋이 기억나네요. 격살.
다만 일본이 유신 이후에 칼을 갖지 못하게 했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칼싸움 할 일이 거의 사라졌으니 일본도는 얇고 아름답고 잘 베어나가는 식으로 발전하였다 들었습니다.

p.s. 그래서 CS사의 일본도는 아주 튼튼하고 강하며, 흡사 예전 전국시대의 칼 마냥 두툼하고 큼직하다 합니다...;;
당시의 제철기술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얇고 강도 높은 칼을 만들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당시 역사기록에도 상대의 너무 큰 칼을 갈아서 짧고 가볍게 만들어서 자신이 가졌다는 내용도 나옵니다.

제게 일본도에 대한 책이 있기는 한데 일본도자체는 관심이 없어서 눈여겨 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전투용 도검은 크고 두터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통일되고 사무라이들이 가지고 다니는 칼은 손목을 더 빨리 베는 용도로 사용했으니까 짧고 가벼웠을 것으로 보이고요.

나중에 관련자료를 찾게 되면 다시 업데이트하겠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이미 일본군들도 잘아는 학익진인데
왜 이순신장군한테는 당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진법이나 전술면에서는 전혀 일본도
꿇릴일이없었네요
훨씬 강력한 함선과 무기가 있었기 때문에 진형은 큰 의미가 없었고 왜군은 해군없이 해적과 육군이 선단을 이룬 것이기 때문에 해전에서 진형을 차릴 수준이 안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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