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길순 타투 안으로 들어온 새 미녀를 치장해서 새장 속에 가두고 날마다 한 가닥씩 깃털을 뽑던 왕이 죽었다 새장 밖으로 나온 왕비는 슬픔과 기쁨이 반반 섞인 알록달록한 새가 되었다 부리로 톡톡, 새는 바늘 끝에 와서 논다 허물을 벗는 뱀처럼 몸이 꼬였다 새벽을 깨우는 소리 들어봤..
봄/ 오규원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집 개의 똥 하나, 그래 모두 이리와 내 언어 속에 서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
4.3 제주, 사건? 항쟁? 역사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그 사회적 의미의 평가와 관련이 깊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아직까지 대다수가 ' 제주 4.3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본다. 물론 이전의 ' 여순 반란사건' ' 4.3 반란사건 ' 에서처럼 ' 반란'이라는 용어는 떨어져 나갔지만 그렇다고 ' 항쟁'이라..
데스밸리/ 길상호 눈을 속이듯 비가 지나가면 목말랐던 짐승이며 사람이며 황야를 떠돌다 죽어간 바람까지 다시 깨어나는 시간이란다 사막이 갈라진 입술로 영혼들을 하나씩 불러내는 것, 그들은 먼저 퍼니스크리크에 모여 관절마다 낀 소금부터 씻어낸 뒤 제 발자국을 찾아 흩어진단다 ..
다시 봄이 돌아오니/ 문태준 누군가 언덕에 올라 트럼펫을 길게 부네 샛길은 달고 나른한 낮잠의 한 군데로 들어 갔다 나오네 멀리서 종소리가 바람에 실려오네 산 속에서 초록잎이 수줍어하며 웃는 소리를 듣네 봄이 돌아오니 어디나 산맥이 일어서네 흰배를 드러 낸 제비는 처마에 날아..
산수유국에 들다/ 문성해 그 곳 서방정토의 삼월에는 꽃 이름을 앞 세운 국가들이 나뭇가지마다 열린다네 단 하나의 시조설화도 없이 산수유국 목련국 진달래국 매화국이 가난한 가지마다 봉긋봉긋 솟아 오른다네 향기가 없으면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는 나라 향기로운 코 하나로 누구..
냉이꽃 / 안도현 네가 등을 보인 뒤에 냉이꽃이 피었다 네 발자국 소리 나던 자리마다 냉이꽃이 피었다 약속도 미리하지 않고 냉이꽃이 피었다 무엇 하러 피었나 물어보기 전에 냉이꽃이 피었다 쓸데없이 많이 냉이꽃이 피었다 내 이 아픈 게 다 낫고 나서 냉이꽃이 피었다 너의 집이 보..
아직 별의 울음소리는 도착하지 않았다 송재학 꽃차례처럼 별이 운다 밤이니까 더 가까이 운다 별보 다 더 맑은 소리는 별들 사이에 있다 거울도 어둠도 견디 지 못하면서 금 가도록 운다 되돌아 오지 않는 소리를 머 금고 운다 맨살과 맨살이 부딪치는 게 얼마나 서러운지 울고 있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