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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의 진실탐구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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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의 소극적 가해자 정웅 광주향토사 사단장 | 광주사태의 진실탐구 2004.02.18 08:42 역사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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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동석
  • 2007.08.07 19:17
어느 분이 작성하신지 99% 공감이 갑니다. 저는 그 당시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   중위한동석입니다.   저는 그 당시 1980년 5월 18일 며칠 전에 광주문화방송국(MBC) 경계근무 명령을 받고 출동하여 5월 20일 밤 9시 30분경 시위대의 방화로 구사일생으로   MBC를 탈출하여 도청광장까지 후퇴했다가 다음 날인 5월 21일 오후 1시 경 도청 광장에서 발포가   있은 직후에, 불행중 다행으로 도청 광장에 포위되어 있다가   저희 31사단 병력 (40 여명)만 헬기(UH-1H)로   31사단 연병장으로 탈출한 소대장입니다.   저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상황이   위에 기록하신내용과 일치 합니다.   다만, 저가 알기로는 나중에 부임한 전교사 사령관 소준열 장군도 호남출신(전남 구례(?) 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이 글은 제가 4년 전에 자료들을 좀 수집한 후에 쓴 글인데, 요 며칠간 한동석님의 증언을 들은 후에 지금 다시 읽어보니 당시 상황이 보다 명료하게 이해되고, 또 제가 그때 상당히 사실에 근접하게 썼음에 놀라게 됩니다.   인터넷에 5.18관련 소중한 자료들이 나타났다가 빨리 없어지는 것을 보고서 자료 보존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작년인가 소준열 장군님 별세 소식을 듣고 그 시대의 증인이 또 한 분 세상을 떠나셨음을 몹시 안타까이 여겼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당시 상황을 명료하게 서술해 주시는 한동석님의 증언을 듣게 되니 정말 큰 도움이 됩니다.   소준열 장군 역시 호남 출신인 줄은 제가 모르고 있었는데, 즉시 정정하겠습니다.


<이것은 처음 4일간은 광주 폭동 진압이 광주 출신 군부에 있었으며, 비호남 출신 군인사로 작전 지휘권이 넘어간 시점이 5월 22일 10:00였음을 의미한다.>를 ------------------>

<이것은 처음 4일간에도 폭동 진압 주체가 호남 출신 장성이었을 뿐만 아니라, 5월 22일 10:00부로 육군본부로 작전 지휘권이 넘어간 후에도   폭동 진압 주체가 호남 출신 장성이었음을 의미한다.>로 정정.  
  • 스티브
  • 2007.09.19 10:19
흠, 흥미롭네...
5월 17일에 계엄령이 내려졌었는데
그 며칠전에 이미 이미 군인들이 주요 시설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말인데...

그리고 호남 출신 장성을 계속 강조하는 이유가 뭘까?
군인들은 명령에 복종하기때문에 광주 항쟁시에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군인들이 현지 지휘관이 호남사람이었네 어쨌는데 하는 이율배반적인 주장을
펼치는 이유는 도대체 무슨 수작일까?
스티브님, 만약 5월 17일에 계엄령이 내렸다면 어떻게 5월 15일~16일 시위 구호가 "최규하 물러가라" "최돼지 물러가라" "직선제 개헌 반대" "계엄령 해제"였는지 설명 바랍니다.   미개인들에게는 계엄령 내리기도 전에 "계엄령 해제" 구호 외치는 재주가 있었는가요?
  • 스티브
  • 2007.09.19 10:23
신학도라?
똥물교회 선교단의 아프간 납치사건에서 박은조를 통해서 한국 개신광신도들이
아집이 넘친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기도 박은조 같은 인간이 있었군...

진짜 신학도라면 공인된 성경을 기반으로 믿음을 행하고...
진짜 신학도라면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문서 (법원의 판결문
검사의 기소장)을 통해서 광주항쟁을 조명해 보길 바란다...
  • 늘봄
  • 2008.08.01 16:07
oo학도 아가는 말하기를.. 노태우 정부때 1990-08-06 (法律 第4266號) 光州民主化運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자랑하던데
---▶ 그넘 참, 인민군대의 사명 및 북한 정보만 퍼 날라오는 (빨갱이, 간첩)같은 아가가.. 별일 이드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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