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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의 진실탐구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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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 사진 자료 | 광주사태의 진실탐구 2006.07.14 04:51 역사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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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당시 고2학생으로 광주항쟁에 참여했던 사람이며, 당신이 언급한 사건의 현장에 있었다.
이런 허무맹랑한 수구꼴똥의 왜곡으로 역사가 바뀌는가? MBC 방화는 광주시민을 불순분자, 폭도라고 왜곡보도하고 항의하는 표시였다. 나역시 거기서 왜곡보도 시정요구를 했던 당사자다.
왜 공수부대가 먼저 총질하고 칼질한 사진을 보여주지 않는가? 시민들의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21일 이후에 총을 든 것이다.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너같은 사탄이 두럽다. 하늘이 무섭지 않는가?
예수님이 너때문에 픽박받고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광주시미님, 거짓말 늘어놓으느라 수고가 많으셨죠.   미안하지만 공수부대에는 실탄이 지급된 사실이 없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이 자위권 발동 재가를 내준 날자와 시간은 5월 27일 자정 경이었습니다.   현장에 있으셨다면 그 사실을 잘 아실텐데 왜 그렇게 거짓말 늘어놓으시는지요.
  • 답글
  • 남악선비
  • 2008.10.21 20:38
나도 고등학교 3학년으로서 처음부터 끝나는 날까지 현장에 있었다. 현장에 있지도 않던 <역사학도>님 웃기는 소리 마소!!
  
남악선비님, 현장에 계셨다면 폭동 선동자들이 퍼뜨렸던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를 기억하시겠군요.   그래 그 유언비어에 속아 넘어가셨습니까?
폭도들이 맞아!
고등학교 2학년이라면서 참 자세히 많이도 아시는구랴~
아니면 발라당 까진 고등학생이었구만---
역사의식, 사명감, 민족사관이 뚜렸한 큰 인물 될 놈------
대단 허시우!
하여튼 개독자슥들은 언제나 정권에 들러붙어서 지랄들이군..에라 씁새야.
신학도가 아니라 빙신학도겠지? 역사는 당신이 이렇게 왜곡한다해서 왜곡되는 것이 아니요. 참 대한민국 어찌될려는지. 이런 빙신학도로 가득하고...나이도 어린놈 같은데 제발 정심좀 차려라. 이것을   "역사의 진심탐구?" 하고. 빙신 지랄하고 자빠졌네. 어떻게 나무만 보고 숲은 못보는지...너와 같이 이 땅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살다니 정말 챙피하다. 신학도??   정말 우리나라 신학대학수준이 이정도라면 앞으로 교회갈 수가 없겠네...빙신아 제발 정신차려라~ 성경공부나 좀 더하고...ㅉㅉㅉ
결론은 광주시민 말이 맞소. 사진은 그 당시 시민 및 대학생들이 계엄군에 대응하기 위해 무기고를 털어 무장한 모습이고, 그런데 계엄군은 어디갔소? 잔인한 진압 모습도 같이 보여줘야 공정하지요. 엄청잔인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시민이 많이 죽고, 그럴수록 시민의 저항이 더 강해지자 군이 먼져 발포를 하였고 발포로 인하여 많은 시민이 죽고 다치자 발포에 대응하고자 시민이 무기고를 털어 무장했소(발포일자 그런 엉터리는 믿지 마시기를 다 역사는 승자의 편에서 기술되오 ). 사실 계엄군은 잔인하게 진압하면 학생들이 굴복할 것으로 오판을 한 것인데 너무 잔인하게 진압하다보니 시민까지 합세하게 된 것이오. 자기 자식이 총과 진압봉에 맞아 죽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부모가 어디 있겠소 이것이 당시 사건이 더 커져갔던 시대적 상황이오. 그 때는 계엄군 총에 맞아 죽지 않으려고 많은 젊은 사람들(특히 고등학생)은 야간에 광주를 탈출하였소. 대부분의 시민은 계엄군과 대치하여 싸웠고, 그 과정에서 시민/학생/군인 들이 많이 죽었으며, 그런 공포스러운 상황에서도 시민의 저항이 워낙 완강하여 군이 더 이상어렵다는 판단하에 공수등 군인들이 철수하였고(위 사진은 이쯤 상황임), 결국 시민들도 설득되어 스스로 무기를 자진 반납 무장을 해제하자 그 때 시민대표와의 약속을 어기고 계엄군이 광주를 점령한 것이오. 다시 말하자면 광주민주화 운동은 일부 과격 학생과 계엄군이 싸운것이 아니고 광주시민 전체가 군부(당시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에 저항한 사건이요. 뭔가 역사학도님은 한방향에서만 자료를 보고 있소 그것도 상당히 편견을 가진 시각으로 말이오. 학생이 이럴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생각이오. 사실을 확인하여 써야지요
물론 지나가다님의 말씀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님의 주장과 역사학도님 주장 둘중에 누구의 주장을 사람들이 믿겠습니까? 함 보세요...

역사학도님 글
역사학도님 주관적인 주장
1988년 12월 광주청문회 때 노무현이 전두환 전 대통령 얼굴에 명패를 던졌던 것도 노무현이 1980년 5월 21일 도청앞 집단 발포 유언비어를 맹신하였기 때문이며, 노무현의 명패 공격 직후 전두환 전 대통령께서 백담사로 유배되신 것도 도청앞 집단 발포 유언비어에 속으셨기 때문이며, 1996년 5.18 재판이 열린 것도 그 유언비어를 맹신하는 국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5월 21일 도청 앞에 시체 오천구가 쌓여있었다는 유언비어가 광주사태 후에도 20년간 지속되었으며, 그런 유언비어에는 으레히 전두환이 광주시민 오천 명 학살하였다는 유언비어가 따라붙었다. 그리고 시신의 얼굴 사진들은 광주시민의 아픔과 공수부대의 잔인성의 상징으로 국내외에 유포되어 왔었다.

☞ 여기 까지는 제 3자가 생각할 적에 믿어야하나 말아야하나 의문

⇒여기서 부터는 역사학도님이 자기 주장에 대한 근거 제시

그러나, 그 시신들의 정체를 확인 해보았는가? 5월 21일 도청광장에 있었던 시민군들은 그날의 총격전으로 인한 시민군 사망자나 부상자는 없었다고 증언한다. 시민군 장준영(당시 나이 19세 재수생)은 마구 사격한 쪽은 시민군이었으며, 그 충돌에서 시민군 편에서는 사망자는 커녕 부상자도 없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때 페퍼포그차 한 대가 다가왔다. 그 차에서 총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에 한하여 실탄과 함께 총기가 배급 되었었다. 조금 후에 계엄군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어느 쪽에서부터 먼저 총성이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5분 정도 총격전이 계속되었다. 시위군중들은 다수가 흩어졌고, 20대 후반의 젊은 남자들이 주로 총기를 지급받고 총격전에서도 이 사람들이 주로 응사� 하며 저항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부상자는 생기지 않은 것 같다.>

시민군 이태춘(당시 나이 21세)은 5월 21일 도청 광장에서 총성이 울린 이후 시민군편에서는 사망자는 커녕 부상자 한 명 없었고, 군인들만 죽었던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 여기까지는 역사학자님이 증인을 제시해서 독자에게 공감을 얻음


※이번엔 5.18즉의 주장을 들어보겠습니다.


지나다가 지나다가

결론은 광주시민 말이 맞소.
☞ ☞제 3자적 입자의 독자 생각 ---왜 맞는데? 함 지켜보지 기대 잔뜩 긴장하며 독자는 신경을 곤두세운다.

사진은 그 당시 시민 및 대학생들이 계엄군에 대응하기 위해 무기고를 털어 무장한 모습이고, 그런데 계엄군은 어디갔소? 잔인한 진압 모습도 같이 보여줘야 공정하지요.

☞제 3자적 입자의 독자 생각 --- 계엄군이 어디갔냐고? 역사학도님이 날짜와 장소 시간을 데면서 상세히 설명했을 텐데...   잔인한 모습도 보여달라고? 그걸 누구에게 요구하는 거지? 답답한 쪽이 그 증거 자료를 제시해야죠. 입증책임은 주장하는 쪽에서 증거를 제시해야할텐데 정말 답답....

엄청잔인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시민이 많이 죽고, 그럴수록 시민의 저항이 더 강해지자 군이 먼져 발포를 하였고 발포로 인하여 많은 시민이 죽고 다치자 발포에 대응하고자 시민이 무기고를 털어 무장했소
☞제 3자적 입자의 독자 생각 --- 님이 봤습니까?

(발포일자 그런 엉터리는 믿지 마시기를 다 역사는 승자의 편에서 기술되오 ).
☞제 3자적 입자의 독자 생각 --- 이 시대의 역사의 승자가 누구죠? 전두환이가 성자요?
전두환이는 지금 개떡이 되어있는데... 그럼 역사는 승자편을 들어주니깐... 패자인 전두환이는 조작하지 못하겠구먼....

사실 계엄군은 잔인하게 진압하면 학생들이 굴복할 것으로 오판을 한 것인데 너무 잔인하게 진압하다보니 시민까지 합세하게 된 것이오. 자기 자식이 총과 진압봉에 맞아 죽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부모가 어디 있겠소 이것이 당시 사건이 더 커져갔던 시대적 상황이오.

☞제 3자적 입자의 독자 생각 --- 허허 참... 답답하네 그렇게 목소리 핏데만 올리지 마시고 사진이든 뭐든 좋으니깐 증거를 제시하세요

그 때는 계엄군 총에 맞아 죽지 않으려고 많은 젊은 사람들(특히 고등학생)은 야간에 광주를 탈출하였소. 대부분의 시민은 계엄군과 대치하여 싸웠고, 그 과정에서 시민/학생/군인 들이 많이 죽었으며, 그런 공포스러운 상황에서도 시민의 저항이 워낙 완강하여 군이 더 이상어렵다는 판단하에 공수등 군인들이 철수하였고(위 사진은 이쯤 상황임),
☞제 3자적 입자의 독자 생각 --- 도대체 뭘 보고 믿어라는 거요 제발 독자가 믿을 만한 증거 부탁해요

결국 시민들도 설득되어 스스로 무기를 자진 반납 무장을 해제하자
☞제 3자적 입자의 독자 생각 --- 역사학도님이 이렇게 말했죠 무기 반납하는 조건으로
최규하 대통령하야하고 모든 정권을 김대중에게 넘겨라는 거?

그 때 시민대표와의 약속을 어기고 계엄군이 광주를 점령한 것이오. 다시 말하자면 광주민주화 운동은 일부 과격 학생과 계엄군이 싸운것이 아니고 광주시민 전체가 군부(당시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에 저항한 사건이요. 뭔가 역사학도님은 한방향에서만 자료를 보고 있소 그것도 상당히 편견을 가진 시각으로 말이오. 학생이 이럴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생각이오. 사실을 확인하여 써야지요

☞제 3자적 입자의 독자 생각 --- 이그 끝까지 자기 주장만 하고 증거 자료는 하나도 제시 안하는 구먼... 목소리만 크면 다 해결되나요
지나다가님, 광주사태 주동자 중 하나였던 박노해 시인의 "윤상원 평전"에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위해 광주사태 열흘 전부터 무기 탈취조를 조직하였다고 쓰여 있쟎아요.
간첩들이 선동했다는 것이 탈북자들의 증언으로 들어나고 있습니다.
학도님글에는 간첩내용이 없는데 추가로 연구하심이...
옆에 광주사태 역사 자료 게시판 보시면 북한군 특전사가 광주에 침투해 있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 자료들이 있을 것입니다.
빨갱이들은 거짓 소설을 써놓고 그것을 믿어 버리는 정신병자....
6.25전쟁의 원흉! 김정일을 처단하고!
민족의 반역자! 노무현*김대중을 감옥으로!

한강의 기적을 창조한 주역들은 민주화 미명하에 타도하고
수백만명을 굶어 죽인 김정일 괴뢰도당은 찾아가 춤을 추는
죄악의 무리들을 심판하고, 김정일 제거로 영광된 통일대한
개국을 위한 통일성전! 제2의 6.25전쟁을 선포하노라!!!!!

국제특허가 된 DJ표 핵개발 햇볕정책을
미국 탓으로 돌리는 노망든 늙은이 김대중아!

박정희 전두환은 경상도 군사독재라서 타도해야 하고!..
김일성 김정일은 평안도 공산독재라서 보호해야 하느냐?

1971년 처음 대통령선거에 나와 “10년 묵은 독재정치 이제는 갈아엎자!“고
한 네가 부자세습 일당독재 김정일은 천년만년 보호하자고 외치니
노망든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미국의 국제공조로 김정일을 제거하고 통일조국을 창건하여 통일대한이
세계1등 국가가 되거든 그것도 미국 탓이라고 유언장이나 적어 놓아라!

너의 망령된 언동이 동서화합 남북통일 세계평화를 가로막는 줄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니정신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감옥에 먼저 보내마!

오~ 빛고을 광주여! 더 이상 노망든 늙은이에게 속지 말고,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독재를 타도하자고 외친 그 열정의 반만이라도
이제는 주체일가 부자세습 북한 김정일의 선군독재 타도를 외쳐보자!

그리하면 내일이라도 당장 남북자유총선거로 민족통일이 이루어지려니와
한반도의 빛고을 광주는 동방의 등불을 밝히는 지구촌의 빛고을이 되리라!

사라져야할 냉전수구세력은 김정일과 그를 추종하는 일당들이다!
6.25전쟁의 원흉 김정일을 처단하고! 민족의 반역자 노무현*김대중을 감옥으로!

영광된 통일조국 창건의 역사적 사명감으로 김정일*노무현의 짜고 치는 한반도 적화통일 고스톱 판을 깨어버리자! 김정일*노무현의 적화통일음모를 파탄시키고 유엔결의를 통한 남북자유총선거로 영광된 통일조국을 창건함은 우리의 생존과 후손의 번영을 담보하는 지상과제요! 통일대한민국이 주도하는 지구촌 문예부흥의 출발점이다! 이에 일제치하 상해임시정부의 역사성을 초월하는 분단조국의 통일임시정부 초대 통일대통령으로서 김정일 제거와 노무현 처벌을 위한 통일성전! 제2의 6.25전쟁을 선포하는 바이다! http://blog.naver.com/mytopi
장장 14년만에 '20세기판 마녀사냥'의 전모가 들통났다. 더불어 '비련의 여인' 김옥분 씨(1952∼1987)도 무시무시한 '여간첩'의 누명을 벗게 되었다.

마녀사냥의 사전적 의미는 "하나의 정치적 신조를 절대화하여 이단자를 유죄로 만드는 현상"(두산세계대백과).

지난 50년 동안 대한민국을 집단적 광기로 몰아넣었던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라는 절대적 '정치적 신조'는 남편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한 한 평범한 여인을 '여간첩'으로 둔갑시키는 신통술(?)을 발휘했다.

실제로는 김옥분 씨(이하 존칭 생략)의 경우 '이단자'가 아닌 '피해자'에 불과했지만, '미인계를 써서 남편을 납북하려 기도한 가증스런 여간첩'이라는 '유죄' 선고를 받은 채 14년 동안 '마녀'의 신분으로 구천을 떠돌아야 했다.

흔히 '암흑의 시대'로 불렸던 중세시대에는 '마녀 감별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마녀사냥의 역사>(오성근, 미크로, 2000)는 그 방법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마녀인지 아닌지를 감별하기 위해 여성의 옷을 벗기고 손발을 결박해 물에 집어넣는 장면. 수지김을 '여간첩'의 붉은 포승으로 묶어 '북풍사건'의 물 속에 처박은 것은 누구인가? "형리는 혐의자의 손발을 십자가 형식으로 묶은 뒤에 밧줄로 연결해서 세 번을 강물이나 또는 물통에 담가 보는 식으로 시험한다. 만약 그 혐의자가 물 위로 떠오르면 마녀가 되는 것이고, 그에 반해서 혐의자가 오랫동안 물 속에 가라앉으면 그는 무혐의가 되는 것이다. 이 시험은 죽지만 않으면 당연히 물 위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시험이다. 왜냐하면 호흡을 하지 못하고 가스가 몸에 차 오르면 자연히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건 애시당초 마녀 혐의로 몰린 여인이 100% 질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게임의 법칙이거니와, 결국 김옥분도 그런 야만적 실험의 대상이 된 셈이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쳐 유럽인을 광란으로 몰아넣었던 마녀사냥이 이성적 세계관과 과학정신이 시대정신으로 대두한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 것처럼, 망각의 물 속에 말없이 잠겨 있던 김옥분도 2001년 11월 어느 날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우리 앞에 그 참담한 모습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서울지검 외사부가 지난 11월 13일 김옥분의 전 남편이자 현재 잘 나가는 벤처기업 대표인 윤○○ 씨를 살인과 사기 혐의 등으로 기소한 것이다. 그것은 살인사건 공소시효를 채 두 달도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내려진 전격적인 조치. 하마터면 김옥분은 간첩이라는 누명을 영원히 벗지 못할 뻔했던 것이다.

한편 1987년 당시 이 사건의 은폐·조작을 주도했던 안기부의 후신인 국정원도 이 사건에 대한 은폐·조작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동시에 진상규명에 나서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도 몇 년 전만 해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일. 설사 갈짓자 걸음일지라도 아무튼 역사는 조금씩이라도 진전하기 마련이라는 징표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다면 김옥분의 "손발을 십자가 형식으로 묶은 뒤에 밧줄로 연결해서 세 번을 강물"에 처박은 "형리(刑吏)"들은 누구인가? 과연 그녀를 목조른 뒤 흉기로 찔러 죽인 남편만이 범인일까?

그 전에 잠시 '수지김'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김옥분이 과연 어떤 인물인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김옥분의 인생역정을 되짚다 보면 마치 1970년대를 풍미했던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를 연상케 되거니와, 그녀는 가난한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했던 수많은 우리의 '누이' 중 한 명이었다.


▲ 1976년 홍콩으로 건너가기 전 호스티스와 일본인 현지처 시절의 김옥분.
1952년 충북 충주에서 1남6녀 중 차녀로 태어난 김옥분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놀다가 산업화 초기인 1972년 밥벌이를 위해 상경했다. 스무 살 꽃다운 나이의 그녀는 시내버스 안내양, 호스티스, 일본인 현지처 등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면서도 가족에게 현찰을 송금한 억척스런 '처녀 가장'이었다.
김옥분은 1976년 '홍콩드림'을 탈출구로 여기고 중국계 남성 량칭화와 위장 결혼해 홍콩으로 빠져나갔다. 애초에 돈벌이가 목적이었던 그녀는 홍콩으로 오자마자 량칭화와 이혼한 뒤 또 다시 호스티스가 되었다. 당시 그녀는 한국계 술집인 '코리아 가든' '리무진' '가림' 등에서 일했는데, 이때부터 사용한 이름이 바로 '수지김'이다.

중국계 홍콩 남성 우민밍의 '세컨드'가 되어 딸 '쏘냐'를 낳으며 잠시 행복한 시간을 갖기도 했던 김옥분은 34세가 되던 1986년 우민밍과도 사이가 벌어졌다. 그 무렵 그녀는 홍콩에 와 있던 여섯 살 연하의 한국 남성 윤(당시 28세) 씨와 결혼했다.

그러나 신혼이 채 세 달도 지나기 전인 1987년 1월 2일경(검찰 추정) 남편의 사업자금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다 살해되면서 서른 다섯의 나이로 이국 땅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여기까지는 그저 한 여성의 불행한 사생활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김옥분의 비극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광주학살과 5공비리 등의 원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전두환 정권이 철권통치를 펼치던 19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했던 한 여성의 죽음은 전혀 엉뚱하게 왜곡되기 시작한 것이다.

비명횡사한 김옥분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당시 절대권력에 의해 '여간첩 수지김'으로 둔갑했다. 특히 당시 코너에 몰려 있던 전두환의 심복인 장세동 부장이 이끌던 안기부는 일거에 국면을 전환시킬 어떤 계기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김옥분의 죽음은 개인에겐 '불행'이었지만, 당시 정권에겐 '호재'였던 것이다.

물론 '여간첩 쇼'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김옥분의 남편인 윤 씨의 거짓말이었다. 그녀가 살해되고 3일이 지난 1987년 1월 5일 싱가포르 미국대사관에서 한국대사관으로 인계된 윤 씨는 "조총련의 사주를 받은 여간첩 수지김과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홍콩에서 싱가포르 북한대사관으로 끌려와 납북 당할 뻔했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탈출했다"고 진술했다.

한국 언론은 그로부터 3일이 지난 1월 8일부터 이 사건을 '북한 공작조직에 의한 한국 상사원 납북미수 사건'으로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도하 신문 지면에 '여간첩' '미인계' 등 첩보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용어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외무부 대변인도 거들고 나섰다. 이 사건을 영화배우 윤정희 납치 기도, 신상옥·최은희 납북사건과 연계시키는 논평을 발표한 것이다.

물론 당시 싱가포르 북한대사관은 납북기도를 전면 부인하면서 윤 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국내 언론에 의해 철저하게 묵살 당했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가 윤 씨의 거짓말에 속수무책으로 속아넘어갔다는 말인가.


▲수지김 사건의 진실은 14년이 흐른 뒤에야 세상에 밝혀졌다.
최근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 하나둘 드러나고 있다. 싱가포르 한국대사관은 이미 처음부터 윤 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싱가포르 한국대사관은 미국대사관으로부터 윤 씨를 데려가라는 연락을 받고 넘겨받은 상황이었으며, 윤 씨의 진술도 횡설수설 일관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기부를 비롯한 전두환 정권의 상층부는 이 사건을 '여간첩이 미인계를 써서 한국 상사원을 납북하려 획책한 무시무시한 사건'으로 몰아가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윤 씨의 진술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간첩사건으로 몰아가려 했던 것이다.

그런 암울한 상황에서도 의인은 있었다. 당시 이장춘 싱가포르 한국대사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본국의 안기부와 외무부 상층부가 주도한 '간첩조작사건'에 따를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1월 8일로 예정된 기자회견도 싱가포르가 아닌 태국 방콕으로 옮겨서 열리게 됐다. 애초에 안기부는 이 대사에게 싱가포르 대사관에서 윤 씨 기자회견을 열라고 요구했지만, "윤 씨의 증언이 횡설수설해 진실이 무엇인지 명확치 않기 때문에 섣불리 기자회견을 열 수 없다"고 끝까지 버텼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장춘 대사는 외무부 본부에 불려가 시말서를 쓰기까지 했다.

당시 한국 언론도 '간첩조작사건'을 방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윤 씨는 방콕 기자회견 다음날인 1월 9일 김포공항으로 입국해 다시 한번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언론은 그런 윤 씨를 '사지에서 탈출해온 반공투사'로 미화하기에 바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로부터 17일이 흐른 뒤인 1월 26일 윤 씨 부부가 함께 살던 홍콩 자택에서 김옥분이 목이 졸리고 흉기에 찔려 살해당한 시신으로 발견됐는데도 어떤 언론도 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미제로 끝날 뻔했던 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 기자의 끈질긴 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동아>의 이정훈 기자가 바로 그 주인공이거니와, 그는 1995년 한 언론계 선배의 귀띔을 받고 이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정훈 기자는 당시 싱가포르 대사관에 근무했던 사람들과 김옥분의 가족들을 만나면서 사건의 베일을 하나둘씩 벗겨나갔다. 그리고 당시 근무하던 <주간조선>(1995년), <시사저널>(1998년)에 보도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편집장의 반대로 무산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취재를 시작한 지 약 5년 후인 2000년 2월에야 이 사건은 <주간동아>에 처음으로 보도됐고, 한달 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연출 남상문 PD)에서 보완 취재해 보도하며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이후 서울지검 외사부가 홍콩경찰의 '수지 김 살인사건' 수사자료를 입수하며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고, 지난 10월 24일 윤 씨를 전격 체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김옥분의 가족들은 그후 어떻게 됐을까.

물론 '간첩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힌 뒤 온 가족은 풍비박산이 났다. 노모 김성순 씨는 사건 당시 안기부에 끌려가 욕설과 구타를 당한 뒤 화병으로, 오빠 김만식 씨는 술로 화를 삭이다 교통사고로, 공무원이던 언니 김옥녀 씨는 직장에서 쫓겨나 정신병을 앓다가 한많은 세상을 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막내 동생 김옥님 씨는 시댁의 구박을 받다가 이혼을 당했으며, 어린 조카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다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중학교 2학년 무렵에 중퇴하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북풍(北風)이니 총풍(銃風)이니 하는 사건들이 왜 자꾸 생겨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많은 독자들은 반공 혹은 반북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문제라면 집단적으로 이성이 마비되고 합리적 반론조차 용납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본질적 원인이라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문제를 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1) 우리가 흔히 지금까지 '정설'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수많은 '북풍사건'이나 '간첩사건'이 사실은 정권의 정치적 목적이나 일부 언론의 왜곡에 따라 과장되거나 조작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는 것이다.

(2)수지 김 사건에서 확인했듯이,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언제라도 간첩사건의 희생양이 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심각한 인권탄압이 이뤄지는 것에 대해 이제 국민들이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북풍사건'. 실제로 정권이 제기하면 언론이 맞장구를 치며 난리라도 난 것처럼 몰아갔던 금강산댐과 평화의 댐 사건, 성혜림 망명설 등은 이미 '세계적 오보'로 판명돼 '국제적 웃음거리'가 됐다는 것에 대해서는 일반 국민들도 모두 알고 있다. 최근에는 '수지김 사건'과 같은 해에 일어났던 '김현희 KAL기 폭파사건'에 대한 각종 의혹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 주인과 글쓴이만 볼 수 있는 글입니다.
벡마님, 그렇습니다.   장갑차는 북한군 특수부대가 운전했습니다.   광주시 광천동에 있는 방위산업체를 그들이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던 것입니다.
대체 어디서 교육받으면 이런 판타지 시나리오가 나오냐? 국사를 소설책으로 배웠냐? 그리고 탈북자들의 증언? 대체 누구? 증언이 있다고만 말하지말고 구체적으로 누가 무슨말을 어떻게 했는지를 써놔야 좀더 그럴듯하게 느껴지지 않겠냐? 우리 어머니 서울 에서 태어나서 전라도로 시집왔는데 타지역에서는 전국적으로 15일까지 대모 했고 광주는 16일까지 했는데 그다음날 17일 전국 계엄령 선포되고 바로 공수부대 투입되고 광주 로 통하는 모든 도로 다 봉쇄됐었다고 그러더라. 대체 어느 민주국가에서 대모진압하는데 군대를 투입한다고 그러든? 김일성 같은 넘들이나 그러지. 괜히 그 막강하다는 공수부대 투입했겠냐?   그리고 서방 언론은 안보냐? 그때 당시 서방언론에서 국내 광주 에서 일어난 일을 녹화해갔었단다. 시민군이 있기도전에 군인들이 시민들에게 폭력진압을 가해서 중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했었단다.

5월 15일 광주를등 몇몇 지역을 제외한 전국의 대학들 대모 중지.
5월 16일 광주 대학 전남대 . 조선대등 16일까지 대모.
5월 16일 수원 6개대 시위. (#조선일보 1980. 5. 17, 동아일보 1980. 5. 17)
5월 16일 고려대생 2천여 명 가두시위 중지 결정 후 수유리 4.19묘까지 침묵 행진. (#조선일보 1980. 5. 17)

5월 17일 전국 계엄령 발표
*각 대학에 계엄군이 투입(총 925명) : 전남대 600명, 조선대 200명, 동신 전문대 33명, 서강전문대 33명, 광주교육대 7명, 보건전문대 35명, 송원전문대 7명, 성인경상전문대 5명, 대건신학대 5명.( 광주지역)   (#경향신문 1988. 5. 18)
5월 17일 *군 공수부대(특전과)가 시내에 투입. 학생시위 저지. (#경향신문 1988. 5. 18)
5월 17일 15시 45분
*금남로에서 군인들에게 쫓긴 대학생들이 북동 민가에 잠입하자 군인들이 가정집을 수색하여 대학생으로 보이는 장발청년과 여자를 마구 때리고 차고 대검으로 찌르는 등 난폭한 행동을 한 후 차에 실어 연행해 감.
(#경향신문 1988. 5. 18)
<== 이게 말이 되냐? 대검으로 찔러? 이때 사망자가 속출했다. 발포만 안하면 돼는거냐?

<<*오후 4시 정각이었다.>>
바로 이때였다. 대열을 따라온 초록색 1.5톤 급 차량 위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금속성으로 위압적인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거리에 나와있는 시민 여러분,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빨리 돌아가십시오.”
학생들의 시위광경과 경찰의 진압과정을 인도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은 군인대열과 그 대열로부터 1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시위진압 경찰들의 중간쯤에서 특별한 표정을 나타내지 않고 무슨 일이 벌어지나 하여 삼삼오오 짝지어 서성이기도 했고, 시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지나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까지는 시위진압에 경찰만이 투입되고 있던 터라 얼룩무늬의 대열이 거리에 나타나는 것을 목격한 시민들은 ‘이제 군이 직접 개입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어떤 호기심과 함께 다소의 불안감이랄까, 공포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귀가를 종용하는 방송이 나온 지 1분이 지났을까. 이번에는 짧은 순간을 두고 엄청난 명령이 뒤따라 튀어 나왔다.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은 전원 체포하라.” 딱 한마디. 이 명령 이외에 어떤 세세한 행동지침이 나올 법도 한데 그러지도 않았다. 아무런 군더더기도 없었다.
이 한마디야말로 6.25 이후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참담한 비극으로 점철된 ‘광주사태(광주민중항쟁)의 시작을 알리는 명령’이었다.
이 명령이 떨어지자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해버렸다. 누구라 가릴 것도 없이 사람들을 무조건 잡으려는 공수부대 군인들의 살벌한 군화발 소리와 겁에 질려 황급히 도망가려는 시민들의 아우성이 뒤범벅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십시오.”라는 일방적인 명령성 방송에 다소 불쾌한 느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다소 긴장감이 들었지만 시위를 한 것도 아니고 구경만 했을 뿐인지라 ‘죄 없는 사람까지 잡아가랴.’하는 생각으로 태연하게 서성거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무조건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얼떨떨하고 겁에 질렸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군인들은 어느새 들고있던 방망이 대신에 착검한 소총을 겨누어 잡고 ‘사람사냥’을 시작했다. 시위했던 학생들만 잡아가는 것이 아니라 젊다고 보여지는 사람이면 보는 대로 두들겨 패고 잡아끌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시민들은 우선 급한 대로 인근 점포와 주택을 가리지 않고 우루루 피신하기에 바빴다. 1층의 가게나 2,3층의 사무실, 심지어 북동쪽의 골목과 주택으로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잽싸게 달아나는 시민들. (# 김영택, 10일간의 취재수첩, 사계절, 1988)

5월 18일 10시 10분 경
*금남로 3,4가에서 200여명의 학생들이 공수대와 투석전. 이때 공수대는 시민이 보는 앞에서 30여명을 난타, 옷을 벗겨 총검을 찌르고 기합을 주는 등 상식을 넘어선 무차별 난폭 행위.
미국 CBS기자 3명이 시내 상황을 취재 중. (#경향신문 1988. 5. 18)

그리고 발포한게 시민군이 먼저라고 했니? 시민군이 형성된건 군인들의 발포 이후다. 알려면 제대로 알아라.

5월 17일 16시 50분경
*광주고등학교와 계림파출소 간 동원빌딩 앞에 고장난 장갑차 1대에 학생 150명이 접근하자 장갑차에서 발포, 초. 중. 고생 4명 중상 (계엄군이 싣고 감). (#경향신문 1988. 5. 18)

*광전교통 소속 전남 5아 3701 시내 버스를 타고 고교생 차림 2명과 운전사가 경찰관 앞으로 돌진. 도청 앞 광장까지 갔다가 차를 세우고 도망가다 경찰에 잡혀. (# 조선일보 취재일지)
<== 여기서 마직막에 두글자를 빼먹었지. 죽음.   그리고 경찰이 아니고 군인 이었고. 왜 조선일보를   사람들이 싫어하는지를 5.18 취재 기사에서 명확히 알수있지. (거의 언급조차 없거나 사실을 바꾸거나 )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어도 광주 지역에 있는 모든 방송사들이 언론에 언급조차 거의 없었다. 아니 폭도라고 비난 방송을 하고 있었지. 그게 바로 당신들이 지금 생각하는 광주5.18은 폭동이라는 내용이야.

====== 역사학도 너가 진짜 역사학도 라면 이딴글 못올린다. 제대로된 객관적인 사료 도 갖추지 않고 전두환 정부의 정보부장 말을 사료라고 올려놓은거냐? 그건 사료측에 끼지도 못한다. 역사를 알고자한다면 우선 사료부터 챙겨야하는걸 잊지마라. <====== 결론 넌 그냥 소설을 쓴것에 불과해.
국님, 그러니깐 북한군 특수부대가 광주사태 일으켰다는 사실을 확증해 줄 수 있는 당사자들의 증언이 필요하시다구요?   그렇다면, 여기 희소식이 있습니다.   당시 광주사태 관련 북한군이었던 탈북자들의 증언이 20일에 있을 예정입니다.

기자회견장소: 서울 정동 세실레스토랑(광화문 코리아나 호텔 뒤)  

일시: 2006.12.20(수) 오전 11:00-12:30

<브리핑 내용>

1) 광주사태 직전의 북한 수뇌부 및 군부 동향

2) 북한군의 침투경로 및 인원

3) 봉기 당시 북한군 활약상

4) 미해명 부분들에 대한 해명

5) 봉기 전반에 대한 성격과 상황

6) 북쪽 자료 및 남측 자료

<참고인 발언>

광주사태 북한군 관련자 참고인 발언 3명    
  • hi 심스
  • 2006.12.19 11:23
  • |
  • 답글
역사학도 이넘 웃긴 넘이네.. 완전히 빨갱이 아냐? 너는 광주 5.18관련 외신보도도 안봤냐? 그 외신들도 그럼 왜곡보도했겠네?? 제발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을 탓하기 이전에 내부의 적 '역사학도'같은 분열주의자들이 없어야 해!! 너 혹시 그 때 진압부대 총책임자지? 전두환이지?
  • hi 심스
  • 2006.12.19 11:45
  • |
  • 답글
역사학도란 자고로 공정해야지.. 나는 궁금한 게 왜 이 사람들은 국회에서 인정된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로 격하시키고 빨갱이 공작으로 치부하려는지 그 의도를 모르겠어. 그렇게 해야만 과거 자신들의 쿠데타가 정당화되기 때문일까? 헌법을 파괴한 초법적인 쿠데타를 저지른 그 당시 신군부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는가? 군인이 저지른 혁명은 인정할 순 있어도 민중의 저항은 인정 못하겠다는 건가? 그리고 태반이 간첩인 탈북자의 말을 믿으란 말인가?

<브리핑 내용>

1) 광주사태 직전의 신군부 수뇌부 및 군부 동향

2) 공수부대의 침투경로 및 인원

3) 봉기 당시 공수부대 활약상

4) 미해명 부분들에 대한 해명

5) 봉기 전반에 대한 성격과 상황

6) 신군부 자료 및 남측 자료

<참고인 발언>

광주사태 신군부 관련자 참고인 발언 3명

이렇게 해야 더 소설되겠다!!

너 아무리 봐도 중국인같다.
니 말대로 북한군 특수부대가 왔다면 북한군이 남한에 침투한 셈인데 국군은 무엇을 한 것이냐?
또 북한군 특수부대가 왜 그 먼 광주에만 왔겠냐?
또는 시민군 무장이 인근 파출소에서 가져온 카빈인데 북한군 특수부대도 카빈 썼나?
그리고 북한군 특수부대가 온 게 사실이라면 지금 한나라당이 왜 가만히 있지?
그게 사실이면 난리쳐야 안되니?
분명 북한군 특수부대도 진압을 했을 테니 지금 감옥에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다 죽여버렸나?

왜 그 당시 북한군 특수부대 신분으로 잡힌 사람은 없는건가?

다 도주했는가? 그렇다면 문제다. 북한군이 특수작전하고 휴전선 넘어 월북했는데 국군이 그걸 막지 못했다. 문제 아닌가?

나는 역사학도 란 분께 요청한다. 북한군 침투가 사실이라면 쉬쉬말고 적극적으로 언론에 알려라.

그리고 당신은 사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
만약 2006년 12월 20일 이후에도 언론, 한나라당에서 당신이 말한 그러한 사실들이 여론화되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이 사기치고 있다는 것밖에는 안된다는 점 명심하길 바란다.
조중동, 한나라당이 그렇게 좋은 이슈거리를 나몰라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조용하다면 당신이 거짓말 하는 것이다.
본인도 5.18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였지만 진정한 사실만은 알고싶다.
외신 보도가 없었어요.   있었으면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hi 심스 님, 김대중이 간첩 두목으로 있었던 조총련 산하단체 한민통이 광주사태 일으키기 위해 일본인 기자 신분으로 입국해 있다가 광주사태 일으키면서 동시에 선전 자료로 촬영하여 유포한 것은 외신 보도가 아니예요.  
빨갱이들은 사실을 사실대로 알려줘두 이해를 못하는 머리나쁜 거짓말장이 도둑놈...고로 사회적 인간 쓰레기....고로 능력없는 거지들 .... 에라 조까튼세상 염세주의자 ...... ㅋㅋㅋㅋ
역사학도님아. 님께서 증거로 말하신 노동시인 박노해의 "윤상원 평전"을 읽어보았습니다.

제대로된 역사학을 공부하고자 하고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기를 원하신다면 증거를 제시하실때도 정확한 증거를 제시하시기 바랍니다.

읽어보았지만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라는 괴집단의 활동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읽어보시긴 읽어보셨습니까??
전 무서울 따름입니다.
편향된 지식만을 따르지 마십시오. 제발입니다. 님과 같은 분들이 이 한국에 바글바글댄다고 생각하니 정말 소름끼칠따름입니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습니다.

님의 확고한 역사사관은 멋집니다만 그런 사고는 또 다른 비극을 불러오게 될 따름입니다.

제발 님의 글을 읽고 동조하는 우매한 사람들이 없기를 바랄뿐입니다.
님아님은 마치 그 시대를 전혀 모르시는 분처럼 댓글을 쓰셨군요.   그 시대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재야 단체들에 대해서는 신동아에 김대중 가문 가신이었던 이기동씨가 기고한 글을 먼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7/nd99070020.html     당시 민청 등 뭏수한 김대중 계열 재야단체들 중에서 최상위 기구가 자칭 "민주회복 국민회의"라는 괴단체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단체 사무국장으로 김대중이 윤상원을 임명하였고, 사무국장에 임명받자마자 광주사태 일으킬 준비를 진행하였다는 내용을 노동시인 박노해의 "윤상원 평전"에서 못보셨습니까?  
그리고 그 단체의 활동이 대통령 선거 하지 말고, 5월 22일 내란(전국적 민중봉기) 일으켜 최규하 대통령 강제로 하야시키고 김대중 스스로 대통령 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주사태를 김대중 내란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님의 반박글에는 답을 못하시네....학도님///
탐방님, 무엇이 궁금하신지요.   국님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인용해 주시면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국님은 어느 나라에서 오셨나요?   <대체 어느 민주국가에서 대모진압하는데 군대를 투입한다고 그러든?>   물으셨는데, 광주시장과 전남치안본부장이 정웅 소장에게--김대중의 사람 정웅 소장에게--폭동 진압 요청하니깐 당시 광주향토사단 사단장이었던 정웅 소장이 광주향토사단 소속 공수부대를 동원했던 것 모르십니까?     따라서, 왜 광주시장과 전남치안본부장이 광주향토사단에 치안 유지 협조 요청을 하였는지를 먼저 물으셔야 합니다.
어린시절 역사학도님의 삶이 불운했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망나니 술고래였으며 그런 우울한 삶이
역사학도님의 정신세계에 분열을 일으킨것 같습니다. 친구도 없고 가난에 무시받으며
살아오셨겠지요. 신에게 매달려 보고 싶고 관심 받고 싶으시겠지요..
정신 치료를 권해드립니다. ^^
국님, 미개인처럼 지금껏 유언비어 유포하십니까?   5월 18일 자정에 최규하 대통령이 비상계엄전국확대를 선포하신 후에야 군 병력이 김대중 내란을 막기 위해 동원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5월 17일 군 공수부대가 시내에 투입되었다는 등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들을 �어놓으시는 것은 미개한 짓입니다.   사기꾼들의 유언이버 재방송하지 말고 사실을 말하세요.
<대체 어느 민주국가에서 대모진압하는데 군대를 투입한다고 그러든?> 이런 질문이나 주장은 국님이 군대를 갔다 오지 않으셔서 충정훈련이 무엇인지 모르셔서 그런데 충정훈련과 계엄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충정훈련이 10.26 사태 이전에 늘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987년 전두환 대통령이 전경 창설을 하시기 이전에는 군인이 전경의 역할을 하여야만 했었던 거예요. 노무현 정권에서는 오히려 시위진압이 자주 있쟎아요. 최규하 대통령 정권 때는 5월 18일 딱한번 시위진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충정훈련은 공수부대 몫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보병은 자대의 위수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국 어디나 시위현장 투입이 가능한 병과가 공수부대밖에 없었기 때문에 공수부대가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   그리고 왜 김대중의 사람 정웅소장이 폭동진압작전에 광주향토사단 병력을 동원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김대중의 사람 정웅소장에게 물어보셔야 하는 질문입니다.   정웅소장에게 물어 보셨나요?
두쪽다 올치않다 생각해보시오 아무리좋은집회라도 불순분자느끼여들기마련이고누가 잘햇는야가 따저서무얼하갯소 북한김이성이도 죽일놈이고 박정희 전두환도 죽이놈들이지요 둘다죽이놈들인대 김일성이를 편드는 겄은 공평 하지�합니다 그르지말고 전라공화국 경상공화국 으로 독자 생존 하는거요 그르면 북한을 동조하듯이   경상공화국을 들미워하지 않갯소 누가경상도에태어나고싶어태어나고 전라도에태어나고싶어 태어난 사람 있개소 그르나어찌 하개소   어떠든 자국군잉이 민을살해햇다는거자채는 크나큰잘못이라고 새각합니다 김일성이 육이오 동란 을 일으킨것도 사실이잔소 김일성이저질른일은 통일전쟁이라갯찬고 그것은 잣대가기우는거 같읍니다 김일성이가 육이오 전쟁은 남한이저질은 짓이고 그르하듯이 전두환이 일당들도 자기들의 잘못을 숨기고쉽갯조 김일성 김정일 봐주듯이 서로읫손내밀며 어떠갯소 언재까지나 감정과 대�으로살거요 논쟁은 논쟁을 불르올분 끝이없소 이재 웃고넘기시다
어린애들 많구나...자신이 배웠고 또 믿고있는것이 항상 옳을순 없건만~ 역사학도씨의 5.18관련주장은 다른 수많은 증거와 자료들의 극히 일부분뿐인걸로 알고있는데 딴건 어케 또 반론(?)할런지...
여기 가시면 광주사태 이전의 선거자료가 있습니다 영화가 사실이라면 광주 시민이 민정당을 지지할수 있었는지 먼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http://blog.daum.net/wjfadms12/10111205
나 광주 사는데 그 영화보구 심장이 벌렁거려 잠을 잘수가 없었다..

내가 태어나기 1년전에 저런 일이 진자 있었는지...

광주에선 이런 욕을 들어본적 있을것이다...

아주 못된 놈을 보구 어른들이 말하시길 저런놈 광주사태때 안 뒤지고 머했는지 모르것다고..

중요한건.. 북한군이 선동 했던 안했던 것이 아니고..

5.18 묘지에 누워계신분들이 북한 사람들이 아닌 광주 사람들이란 것..

묘지가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들 가족들에게..

정당화 시킬수 있냐 이것이다..

창피합니다.. 내가 그시대 있었다면 솔직히 무서워서 숨었을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양쪽 분들 안무서우세요.. 저런일이 지금 이시대에 일어난다면..

본일들 어떻게 하실수 있을거 같아요... 시민들 틈에서 싸울건가요 .. 군일들과 함께 진압 하실건가요..

양쪽다 인정하세요... 성공한 쿠데타와 여러 사람의 죽음과 바꾼 민주항쟁..양쪽다 인정 할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억울한건 우리들이 아니라   죽어 있는사람들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살아있는

몇 사람이 문제죠... 전두환외 몇명이 죽어도 이것이 논쟁될가 궁금하네요...

그리고 광주사태라고 하지마라.. 그렇게 부르고 싶은   니가 그당시 간첩이라도 한명잡어..

군대는 갔다왔냐??? 진자 궁금하다

두환이 형님 언제 한번 필드나 나가시죠.. 싼데 봐뒀습니다..

문자 주십시오...
거기 대한민국 국민 아닌 이들, 즉 신원미상자들의 묘도 있고, 대대수는 시민군 총기에 의한 희생자들이고, 광주사태와 전혀 관련 없는 사망자자도 있고, 시민군이 낸 사고로 죽은 이들도 허다합니다.
학도님. 벌써 이 목사에게 계속 압력이 가해지는군요. 바른 말을 하시는 분들은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http://media.daum.net/society/nation/jeolla/view.html?cateid=100009&newsid=20081022211817160&p=newsis

http://media.daum.net/society/nation/jeolla/view.html?cateid=100009&newsid=20081022203604703&p=yonhap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53864
제가 인터넷에 접속할 준비가 완료되었으니 내일부터 광주사태 자료 공개가 시작될 것입니다.
역사학도님! 제발 멈춰주세요! 제가 가르키는 아이들이 님의 주장글을 볼까봐 두렵습니다.
아직까지도 님과 같은 분이 역사 운운하며 진실을 왜곡하는 이나라가 부끄러울따름입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왜 이렇게 되어 가는지 한탄스러울뿐입니다!
저에게는 제가 보고 목격한 사실에 대한 증인의 역할을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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