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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령 시인 정덕수의 어제 시작한 사랑처럼 세상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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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같은 긴 이야기 ‘류춘수 건축가와 한계령에서’ | 이야기마당 2008.03.18 04:59 寒士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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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잘 읽었습니다.
한계령 휴게소의 큰 문과 '흰지'가 왜 생각키는지...
바람많은 한계령에서 바람같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쉬게 할 생각이셨겟지요!
발코니 데크에서의 커피 한 잔은 참, 커피자 아니라 감로수라 할 만하구요.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세칸님 안녕하세요.
어떤 말씀이신지 잘알겠습니다.
아~ ‘흰지’는 ‘휜지’겠지요?

저는 우선적으로 세세한 부분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 한 게 아니라 자연과 어우러진 미적 감각과 환경을 덜 파괴한 부분에 국한하여 이야기를 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보는 이의 시각이나 여러가지 다양한 지식과 안목에 따라 평가는 충분히 바뀌리라 생각합니다.
언젠가 한 번 뵙고 싶은 분 중에 한 분이 세칸님입니다.
늘 감사합니다.
때로는 위대한 예술가가 동시에 악랄한 독재자이기도 합니다. 이공건축에서 이직한 동료를 통해 들은 류춘수씨의 모습은 또 다르더군요. 건축설계판이 다 조건이 열악하긴 하지만 이공은 그 정도가 좀 지나치더군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도 한 때 건축가를 지망하며 건축사보조원으로 일했었지만 한국의 내노라하는 건축가들 가까이서 실상을 보면 때론 그리 존경하기 어렵게 됩니다. 멋진 건축가의 외면만 보지 마시고 그 밑에서 고통 받으며 고생하는 이들의 피땀도 함께 봐주시길 바랍니다.
양면성이 늘 공존하겠지요.
만약 어떤 기자가 그 분을 만나도 그 분의 또 다른 면은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단 이런 부분은 분명히 알 수 있지요. 내용에 있는 김대중 대통령의 표현부분을 살펴보시면 이 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건축가와 현장의 노동자에는 생각의 차이가 상존합니다. 저도 현장에서 일을 해 보지만 역시 마지못해 그 일을 하는 사람과, 감사하는 마음과 배우려는 열정으로 하는 사람의 차이는 상당하더군요.
제 오해였길 바랍니다만 마지막에덧붙이신 글이 마음에 걸려서 다시 덧글을 남깁니다. "마지못해 그 일을 하는 사람과, 감사하는 마음과 배우려는 열정으로하는 사람의 차이는 상당하다"고 하셨는데 혹시라도, 만에 하나 건축사보조원들을 지칭하신 것이고, 그들이 감사하고 배우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라면 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그게 건축가 본인을 지적한 것이라면 토를 달 생각이 없지만요.
제가 90년대 초 건축사사무실에 취직했을 때 처음 받은 월급은 35만원이었죠. 이미 15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당시도 대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해도 한달에 20만원은 받을 수 있을 때였고, 공고생도 도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 상당한 수입을 올리던 시절이었죠. 당시 유명한 작가주의 건축가들도 많았는데 그들 사무실에 일하는 사람들 얘기를 들으면 겉으로는 진보를 외치는 사람들이 자기 사무실 직원들에 대한 태도는 전혀 달랐다고합니다. 직원에 대한 대우는 오히려 다른 사무실보다도 더 박하고, 쉽게 들을 수 있는 얘기가 '너희들은 배우는 처지에 월급을 받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라. 과거엔 한푼도 못 받고 일했다'운운이었다죠. 사실은 저도 우리 사무실에서 비슷한 얘기를 들었기에 그 말이 신빙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게다가 모 사무실에선 맘에 안 들면 직원들을 옥상에 집합시켜 빳다로 팼다는 말까지 들었답니다. 당시 5년차 7년차도 100만원에 간당간당한 월급으로 살고있었구요, 전 첫 1년동안 주말에 쉬어본 기억이 없답니다. 야근이 없는 날도 1년 365일 중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구요. 객관적으로 형편없는 처우를 강요하면서 밖으로는 노동자를 걱정하는 진보적인 인사를 자처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기가 막히죠. 저는 처음부터 악덕인 기업인보다도 겉으로 아닌채 아름다운 말을 늘어놓으며 속으로는 그렇지 못한 사람을 더 증오합니다. 일종의 지적 사기라고 생각됩니다. 류춘수씨가 인상이 깊었던 것은 직원이 일해놓은 성과물을 직원 없을 때 와서 찢어놓고 간다든지, 거듭된 철야,야근(이 경우는 아예 사무실에서 숙식)에 지친 직원이 집에 '갔다 오겠다'고 하자 집에 상이 난 것도 아닌데 왜 집에 가려고 하냐고 물었다는 일화였죠.
지금은 다른 모든 건축가들이나 류춘수씨도 많이 변했을 거라고 믿고싶군요. 하긴 이젠 대졸초임도 100만원은 돌파했다고 하더군요... 어떤 사람의 일면만 보고 찬사를 보낼 때, 자신이 모르는 면도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실망하는 일이 종종 있지요.
아, 그리고 감사와 열정에 대해 야기한다면 그 당시 건축사보조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열정은 이미 차고 넘쳤다고 말씀드릴 수 있구요, 모 유명 사무실에서 진짜 1년동안 무급으로 일한 사람도 알고있답니다. 건축사사무실에서 일했던 우리 모두 진짜 밤을 낯삼아 일했던 것 기억나구요... 그리고 만약에 건축가들이 마음은 안 그런데 진짜로 돈이 없어서 못 주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그들이 평소에 옷, 차, 술값 등으로 쓰는 돈을 봐서는 절대로 그런 말이 나올 수 �다는 것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네, 그렇지만 제가 드린 말씀은 사무실의 분위기나 모습이 아닙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현장에서 작업을 하다보면 정말 내가 왜 피같은 돈을 주며 저 사람을 써야 하나 싶은 경우도 많습니다. 제가 사회생활을 시작 한 것이 1977년부터인데 그 당시엔 월급은 꿈도 못 꾸었고 먹고 자는 일만 해결되면 만족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늘 맞거나 기합을 받지 않을까 걱정도 했고요. 제 프로필을 보시면 그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아 물론 여기에서 이 정도는 말씀 드리지요. 류춘수 선생께서 한계령의 설계도를 그리실 때가 79년도로 30대라고 하십니다. 정말 박봉이라 다른 일로 전업을 꿈꾸었다고 하더군요.
제가 쓴 한계령이 1981년 10월3일인데 그 당시 전 여전히 10대입니다. 18살이었지요. 막노동판에서 받을 수 있는 일당이 6,000원에서 9,000원 사이로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기능공들이야 더 받았겠지요. 얼마간 한계령 도로포장, 봉화와 철암간 도로 포장 현장에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고 받을 수 있는 60,000원(이것도 분신한 전태열 사건의 계기로 청계피복노조가 결성된 때문에 가능한 보수였습니다.)의 월급으로는 더 많은 걸 할 수 없었기에 잠시 외도를 한 탓입니다. 이 시절 가난한 이들의 꿈은 푹 쉬고 싶은 거였습니다. 어느 분야나 모두 마찬가지 상황이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명목과 자신들도 기능인들에게 그런 대우(그보다 못한 열악한 조건에서 배운 이들이 더 많았던)를 받고 기술을 배웠던 탓이었습니다. 일제하에서 일본인들에게 배운 이들이 당시의 업주고 사장들이었습니다. 게중엔 그들에게 기능을 습득한 이들이 창업을 한 경우가 많았구요.

이젠 상황이 많이 바뀌었지요.
배움이 부족한 직원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조금만 처우가 열악해도(심지어는 본인들이 회사를 망칠 정도로 태만하고 게을러도) 당장 노동사무소로 고발을 해댑니다. 요즈음은 소규모 창업은 꿈도 못 꾸는 현실입니다. 당장에 저도 작년에 당한 일 하나만 공개를 하지요. 제작년 연말 봉제업을 시작하려고 준비를 해서 연말에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직원들이 들어와서는 3~4일 일을 하고 슬그머니 나오지 않고 그랬지요. 그런 과정에서 납기일이 급한 일로 양해를 구하고 택시비며 다양한 명목으로 비용을 써가며 이틀간 밤 11시까지 작업을 하게 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물량은 외주로 뺐고 외주업체에서는 새벽 3시에도 물건을 제작하여 퀵서비스로 보내왔습니다. 당연히 전 혼자 그런 물건들을 모두 받았고, 완성을 했습니다. 10여일을 그렇게 일을 하고 난 뒤 제겐 이익이 남은 게 아니라 빚만 200여 만원 남더군요. 야근까지 해 가며 그가 제작한 건 3일간 30장 정도의 물건이었습니다. 그 후 그가 제작한 물건은 한달간 80장도 되지 않은 물건이었지요.
80장의 물건을 모두 10,000원식 공임을 준다고 해도 800,000원밖에는 되지 않지요. 월급은 일단 회사가 크던 작던 회사가 정한 월급날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유독 자신의 월급을 입사를 한 날자가 13일이니 12일날 내 놓으라고 하더군요. 빚이라도 내서 20일에 월급을 줄 생각으로 이야기를 해 놓았는데 황당한 경우가 아닌가요. 그길로 그는 노동부에 고소를 했습니다. 17일 노동부에 들어가 보니 정말 당황스럽더군요. 저와 같은 일을 당한 업주들로 노동부 사무실은 빈 공간이 없었습니다. 노동부사무소(서부지청) 담당자 이야기가 참으로 슬픈 현실이랍니다. 그런데 법이 그러니 결국은 조정에 실패하여 검찰로 송치할 수밖에 도리가 없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설에도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오지도 못하고 지내는데 그들에겐 단 얼마라도 보너스를 줘야 하는 현실!
결국 지난 여름 사업을 접었습니다. 도산하는 업체가 넘친다죠. 경기 회복이 어려운 이유 간단하더군요. 일자리가 없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일을 할 사람도 없고 사람 구하기 어려운 현실은 어떻게 설명을 하나요? 90년대 초 건축사 사무실에 첫 취직으로 35만원이면 같은 시기 다른 업종에서 보조원들이 받던 20만원 정도의 월급에 비할바가 아닙니다. 기능인(숙련된 기술자)도 50만원이면 엄청난 월급을 받는 걸로 인식 될 때였습니다.

창업을 해 보세요.
그러면 창업자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전 류춘수 선생을 개인적으로 만나면 먼저 그 분의 직원들의 태도부터 살필 듯 합니다. 진정 스승으로 그 분을 따르고 배우려 노력을 하는지 말입니다.
한사님의 멋진 글을 대하니
갑짜기 한계령으로 나들이 가고싶어집니다..

류춘수님은 철학이 뚜렷한 설계사더군요.

철학이 뚜렸함은 때로는 많은 적을 만들기도 하고 더러는 오만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낟추고 낟추어도 여전히 강하고 튀어나오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저 부터 많이 조심을 할 뿐 방법이 없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방문에 감사드리며 이번 만남 반가웠습니다.
저는 그 분의 말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조화'였습니다. 사람이 잘만들었다해도 주변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진정으로 아름다와질 수 없다는 것. 세상의 모든 일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예술품을 창작하든, 비즈니스를 진행하든지 주변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결국은 홀로 외로워진다는 것.
네, 조화로움 참 중요한 일이죠.
무엇을 하든 조화를 이룬다면 더 할 나위없이 좋은 일이겠지요.
늘 찾아주시는 이향선님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 자신이 컴퓨터쟁이인지라 프로그램을 제작 하면서도 하나하나 신경써서 프로그래밍을 하지 않으면 사용하는 사람이 디자인을 싫어 하기도 하고, 사용하기가 난감해지기도 하는 통에 여러모로 골몰하다 보니 가끔 예술하시는 분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마도 건축가나 시인도 크게 틀리지 않은 듯하네요. 뜻하지 않게 좋은 글 읽고 갑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모든 일이 다 규칙과 법칙이 존재합니다. 그런 규칙 속에서 치열한 고뇌 끝에 새로움을 창조하는 게 예술인 것이지요.
컴퓨터에 사용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나 시, 건축, 미술, 음악 어느 거 하나 더도 덜도 아니라 봅니다.
모두가 탄탄한 기초와 노력과 창의성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요.
감사드리며 종종 들려 주시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누구나 좋아하고 즐겨찾는 웹 서비스를 만드는 것이 꿈인 제게도 많은 것을 생각케 한 강연이었습니다. 나중에 따로 정리해서 트랙백 날려보겠습니다. 암튼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Kong님 반갑습니다.
행사장에서 인사를 건네자 반가워 하시던 모습 선명합니다.
자주 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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