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졸필
철이의 시집 1,2,3,
그렇게 울었다
참 교사상 일간지 3 회연작
졸업논문
한국 교회교육의 문제점과 교회학교의 방향설정
1949년 늦은 삼월
생산모퉁이에서 핏덩이 얼려 꿈툴대다가
경기 양평 구둔 초가에서
두주먹 불끈 쥐고 초성을 발하며
남사당패 자식으로
태여난
나
일찍이 홀로 될것을 안 것처럼 너무 많이로 울었다
세살되는 삼월 어머니를 앞산에 심고
네살되던 해에 아비를 뒷산에 심어
동리의 아낙의 젖동냥으로
두눈이 크게된 메마름에
굶주림에쩌른
유아의
나
두형과 누나
거동 불편한 큰 할머니
그래도 죽을수 가 없어
거친돌 되여
밀가루말고 밥 달라며 투정타가 큰 형에게 죽도록 맞고
밤눈이 어둡다고 토끼똥 삶아 먹던
유동의
나
할미 죽고
큰형 군대가고 육개월 후 작은형 군에가고
허기진 배 물로 채우고 송진 산나물 칡뿌리 진달래꽃잎 옥수수대
심지어 진흙까지 허겁지겁 입에 넎어
그렇게도 누나를 우리던
철 모른 5-6살의
나
밑 터진 솜 바지 초 여름 에도 입고
아렛배 불룩 나오고.
큰 형은 카츄사 둘째 형은 5 사단 행정병
휴가 몇개월전 부터 건빵 모으고
복중에도 군복 두세벌 껴입고 헐떡이며 집에와
그옷 팔고 화목해다 팔고 품 팔아 쌀 사주고
눈물로 퉁퉁부은 다리 질질 끌며
잘 있어야 돼
몸부림치듯 통곡하며 가는되
신나게 건빵 입 터지게 물고
고개만 꺼덕이던
나
14세의
성냥 장사라고 하고
갱엿사다가 열을 열서너개 만들어
고구마 감자 바꾸어다 동생만 먹이고
기운없어 쓸어지면서도
눈치 콧치 외면하며
동리 어느집 제삿날이 오면 날 업고 찻아가는
누나
힌 쌀 밥에 눈 뒤집혀
처먹고 또 처먹던
나
부모 제삿날 잊고 있다가
큰형 제대후 찻아왔다
삼월 어머니 제 상에 물한그룻 떠놓고
어서오시라고 구복 배아하다 설음 폭판이 터저
형은 젯 상머리
나는 삽짝거리
누나는 부엌에서
그간 울지못한 설음의 봇물을 바닥을 봐야했다
얼굴도 모르는 엄마 을 부르다
동리 모두를 울리던
초년의
나
어느
이른 봄 삼월
검정 팬티 하얀 런닝
<엣 시골 국민학교 운동회복>
깡마른 형 손잡고
새벽 칙칙폭폭 곡간 열차에 몸을 실고
굴을 지날때마다 검댕이 두집어쓰며
그래도 서울간다 좋아하며
추운 서울역에 내린
국교 졸업생인
나
<당시 시골에서 풀칠할수 없어 무작정 상경하였음>
낮엔 아이스케끼 외치고
기분이 안 좋으면 받아 온 아이스케끼 한 입에 다 넎어 버려 오늘도 적자
해 떨어지면 책 가방 들고 성경 구락부 에 간다
마포나루 어부아들 따라
주낛으로 뱀장어 잡고
수영자랑하다 그친구 수장시켰다
학력인정 못받는되 배우면 뭘해
땡땡이 이골 나서
중도에 포기한
희망없는
나
이곳도
내가 천덕 꾸러기로 더 붙어 있을수 없어 구둔으로 쫏겨 왔다
나뭇짐도 져 보고 벼도 심고 논도 매고
겨우내 고구마 로 끼니 를 때웟고
여름내 시래기죽과 감자로 연명했다
주일이면
일 안하고 교회 간다며 큰형한테
지게 작대기 삽자루가 뿌러지도록 두둘겨 맺았고
서울에서 전근 온 역무원의 딸 아리다운 소녀에 미쳐
입도 안대본 술내기로 술집아들에게 빼았겼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이 그제같은 나날을 ,,
그래도 시인이라며
긁적대는
청소년의
나
***********
다시
무작정 서울행을 탓고
노점상하는 형을 찻아 염천교 부근을 헤메였다
거리에서 추운밤 몇일을 지새우다 행랑자 쉼터를 알게 됐고
쉼터에서 주는 사과 한알로 하루를 산것이 보름이지났다
구구절절 끝에 형을 찼았고
구로동 구호주택1026호
단칸방에 조카옆을 비집고 자리 하였지
길에서 쩌 파는 고구마
조카에게 먹인다고 입술에 무지르고 뺏아먹던 모습
형수에게 들켜 버린
천덕 꾸러기의
나
형
따라 행상을
커튼 레일을 메고
서울 전지역을 요비링 을 누루고 커튼 레일 다세요 골목을 휩쓸렀다
옆집 구로공단 처녀에게 동정 드리고
첫 그님은 어디롯가 가 버려 가슴알이 했고
풍금을 잘 치는 노량진의 미용사에게서 첫자식 중도에 버렸다
래도
의지하고 기댈곳이 하나님 뿐
저녁 댓시간 기도만 하는
탕아의
나
성결교회
예쁘지도 않은 처녀집사
내가 얼마나 요망 했으면 목사님이 날 하고 울부짖어
신앙찻아
주변 남도교회 수요예배 삐즈미 들어가는되
이교회는 들어가자는 사람도 없어
함께 들어가시죠
책도 없어요
제것 가지고 들어가시죠
왜 남자가 예배 끝날때 까지 울기만 해요
지금의 옆지기를
만난
나
2013 05 26 02시
그땐
나를 내가 몰랐다
여름성경학교땐 바지가랑이에서
육즙이 흐르도록 뛰였다
중고등부 부흥회엔
성령님이 직접 인도하심을 알게 하셨다
말씀준비 하나도 못하고 강단에 올라
예배시작을 사회자에게 명하고
강단에 끓어 앉아 주님의 스피커가 되게 해달라고 애걸 복걸 했지
불상한 제모습은 감추시고
주님이 역사하셔
6일을 도가니로 만들어 주셨어
매일 하나 둘 오시던 학부모 끝날엔 빈자리를 메웠지.....
진정 하나님의 틀에 꼬옥 끼인
장정의
나
그에게 군대 3년 기다려 달라 했고
논산 93연대
빡빡 머리들 틈속에 끼였지
잔반통에서 건져먹는 동료을 보며 많이도 울었어
흐르다보니
광주 31사 밀려 들어갔다
상무대 에서
전 남북 연합 군인 성가 경연 대회에서
제일 큰 꽃다발을 받고
광주 학생 극장에서 독창회 허락하고 말았어
1회 남도교회
2회 광주 학생극장
메인곡은 수많은 교회에서 불렸던
수난가
1 골~고다 험한길로 십자가~지고 넘어지고 쓰러지며 가시던 주님
딧고가신 자욱마다 피~땀이~피되 죄에빠져 죽을 인생 구하시려고
채짹질를 맟으시며 발길 ~채이도록 죽음을 사양찮고 가셨나이까 가셨나이까
2 지는해는 서산위에 기우러지고 무심한 까마귀떼만 지져귀는되
우리주를 십자가에 못박는 소리 광명한 했빛조차 캄캄했거든
하물며 사랑많은 우리 하나님 어찌 그 형상을 보시였을까 보시였을까
3 가시관 쓴머리에선 피가흐르고 손과발엔 끔찍스런 못이 박혔네
가진모욕 쓰린 고통 당하시어도 한번도 입을열지 않으셨건만
그얼마나 목이타고 답답했으면 아~아 내가 목마르다 하셨읍니까 하셨읍니까
4 나에죄 나의 허물 나의 악함이 우리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어찌하면 박힌 못을 빼여드~리며 무엇발라 찔린 상처 낳게 하니까
이몸을 죄물삼아 주께 드리면 행~여나 그 상처 낳게 되리까 낳게되리~까 아멘
그후로도
그곡을 많이도 불렀다 보니
예비군이 된
나
새해 첫 번째 떠 오를 태양을 향해
신랑 박 광철 신부 강 미경 양은
걸음마를 배워 익혔읍니다
이날 <1970년 1월 1일 오후 1시 영등포 경원 예식장에서>
봄 여름을 지나 가을이 있는곳까지 뛰기위하여
구복하고 있사오니
부디 오시어 신호총 에 방아쇠를 당겨주시고
옷깃여미는 찬사와 격려을 주시옵서소
<이땐 청첩하지 못하도록 국가에서 엄몀을 내려 알림니다로 초청장 대신하였다>
그날
예식 시간 에서 45분 늦게 신부가 지각하였다
3백여 하객들이 어찌되일이냐 는 질문에 도망하고 싶었다
속리산 신혼길도
이미치른 첫날밤이지만 그밤도
내입은 굳게 닫쳐 있었다
신혼5개월후
잔디 아빠가된
나
구로동에서 화곡동으로 장막을 바꾸었고
신도 카텐사 사장이 되였다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밤을 낮같이
낮을 날같이 뛰고 뛰다보니
아람이 아빠가 된
나
14세부터 교회학교 교사 시작하였고
이날에 와서
내
70세 까지 교회학교 교사로 봉직 하리라
서원했지
경기노회<통합 서울 강남에서 남부 경기지역>
교회학교 연합회 총무로 발들어 놓아
강남 인천 노회 분립후
경기노회 회장기를
받아
흔들었던
나
신발 무게가 가볍다고
광나루 장신 총무과<당시 김ㅇㅇ총무처장>에 난립하여
책상을 뒤집어업으며
큰소리 쳤어
왜
신학교 문만 나오면
목사들이
권력과 권위와 돈 밖에 모르는
속물이되느냐..
어찌 교육했기에,,
총무 처장님이 한마디만 듣고 맘대로 하세요
해서
귀를 세웠지
"학교에선 잘 교육했어요"
"그들이 학교문을 나서면
그들 손에 누가 돈맛 권력맛 권의맛을 알게하고
부추기던 그분들이 집사님 아니던 가요?"
난
두손 번쩍 들었어
무조건 투항 했지
비참하고 브끄러워 고개를 들수 없었어
후에
1학기 책가방을 들고
강의실에 앉자 있었던
사십대초반
나
50여분 들은 강의를
노트정리 해보려 두세시간 결려도 힘들어했고
오늘 들어도 전에것은 깜깜 불꺼진 백열구
집사람이 멱살을 잡는다
"나는 목사 사모는 도저희 감당 못하니 목사 안수 받으려면 서둘러 이혼" 하잖다
사모 품의 지키는 것 자신 없단다,
자신 역시 목회보다
교회학교 교육에 이바지 하려고 공부하겠노라 약속했지
그리저리 하다보니
석사 모. 가운을
집사람에게 입히고 꽃다발 안겨 주웠지
하나
빈 깡통 바닥 긁는 소리만 내다보니
세째아들 바위의
아비된
나
영등포 노회 남선교회 회장 순항중
평신도대표 자격으로
25일간 독일 교회 초청 받아 갔다
목사,장로, 대표님들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른다 하며
맥주가 맛있다고 한잔 더 하잖다
세미한 음성으로
저분들이 한국에 와서 맥주를 달라면
우리는 금주하는 기독교라고 하면
그들이 우리를 어찌 생각할까요
찬물을 뿌렸다
독일 각 대표들이 한국초청으로 와서
연세대 알렌관에 모였다
아뿔사
한국 맥주 맛 좀 보자고 한다
쥐구멍 찻아 헤메이는
50초반의
나
우리교회 <화곡동교회>김ㅇ식 당회장님
독일 순례 보고를 교회 앞에 하란다
거절했다
기독교 국가인 독일이
교회마다 예배드리는 교우들은 늙은 몇분 밗에 없다
그 크고 아름다운 교회가 저녁엔 술을 파는 카페가 되였다
목사도 살아보고 결혼한다
목사가 이중 사랑해도 무방하다
차마
말
할수 없는
나
내 핏속에 아비의 피가 흐른다
흥얼거리기를 좋아했고
두세번 들으면 악보없이 뇌 까린다
익투스 남성 합창단 오디션에 테너파트로 신청했다
경건회에서 옆에 분이 곱고 아름다운 미성으로 테너하신다
저렇게 훌륭한 분들이 있는되
자신없어 베이스로 변환했다
오디션에서 그분이 지휘자이란다
그래서
교회에선 테너 합창단에선 베이스
자리지킨
60 중반의
나
내 삶은 교회가 독차지하였다
그래서 행복했다
화곡동교회창립1969년 7월6일후
12월에
구로동 남도교회에서 이명하였다
삼년후 화곡동교회와 영곡교회가 합동하여
화곡동교회로 재 탄생 되였다
사연도 많고 할말도 많고
몸부림, 눈물에. 휘들리며
많이도 울었고 많이도 웃으며
정년은퇴하는
70의
나
교회내력도 살입해야햐할텐되
어찌하여야 할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