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며칠 영하권에서 맴돌던 기온. 단단히 여미고 차려 입었어도 춥다. 싸아한 기운이 숨쉴 때마다 폐를 자극하여 쿨럭거린다. 또한, 귀가 시렵더니 귓볼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다. 새벽녘이라 더욱 견디기 어려운 건가. 정신이 얼얼할 정도이니.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보려다가 기우뚱한다. 눈을 감았다. 그리 밝게 느껴지지 않던 가로등 불빛이 눈을 찌른다. 가로등을 피해 이동해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 결국 ...
자동차가 지날 적마다 바닥을 휘젓는 소음. 낙엽이 병아리 떼처럼 일어나 자동차를 따라 종종걸음치다가 제풀에 주저앉는다. 여기 어디쯤이지 않을까? 약속장소로 가는 중에 방향을 잃어 엉거주춤 서 있을 때 비니를 눌러 쓴 긴 머리 소녀가 다가들었다. 지구종말에 대해 알려 드릴 게 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망연자실한 채 눈길을 주다가 불에 덴 듯 놀랐다. 노골적인 티를 내지 않았을까. 다행히도 상대는 내색없다. 화...
나무꾼은 심호흡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킨다. 사슴의 얘기를 들으며 설마한 게 사실일 줄이야. 삐죽삐죽한 산정 위로 보름달이 훌쩍 솟아 있었다. 교교한 달빛이 산의 속살을 뒤지는 중에 바위 아래 자리한 웅숭깊은 옥담, 그 안에서 빙기옥골의 나신들이 까르르 소리를 내며 저마다 물장난을 치고 있는게 아닌가. 연못 바로 위까지 살금살금 다다른 나무꾼은 마침내 벗어 놓은 선녀의 옷 하나를 감춘다. 여기까...
태생적으로 정착할 줄 모르는 빛. 그래도 생명의 근원이 거기라고 태양이 빛을 뿌리는 방향으로 쉴새없이 공회전을 거듭하는 땅. 어둠이 물러나기 전이라 그 경계가 불분명하다. 이승과 저승이 공존하는 듯한 숲에서 나무 사이를 떠돌거나 촉촉한 수피를 더듬으며 그렇게 서 있었다. 안개가 꼬물거리는 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바닥에서 떠있는지 땅을 딛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경. 사방에 늘어뜨리고 있던 감각을 거둬들...
냉장고 문짝에 더덕더덕 붙은 포스트잇들. 하루이틀 새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삐뚝빼뚤한 아내 글씨로 잔뜩 씌어 있다. 빨간 줄이 쳐진 전화번호나 날짜, 시각 메모에 아이에게 당부하는 전언이나 과제도 보인다. 마시던 우유 넣어 두지 말 것. 시답잖은 T.V 프로그램 시청 말그라이. 아이 방은 벽 여기저기를 도배한 사진 나부랑이들로 눈이 어지럽다. 쫓아다녔지만 시들해진 연예인이나 모델 대신 새롭게 뜨는 아이돌로 채워...
거울에 빤히 비치는 이발소 안 풍경. 대기의자에 줄줄이 앉은 아이들은 좀이 쑤신다. 입이 찢어지게 연신 하품을 하거나 코를 파내거나 껌을 씹거나 졸고 있는 녀석들 생각은 오직 하나, 어서 순번이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문이 빼꼼 열리더니 고개를 디미는 영복이 엄마, 북적이는 안을 보고서는 냉큼 얼굴을 뺐다. 달고 선 영복이와 동생이 병아리처럼 제 엄마를 쫓아간다. 옆 이발의자에 올라 앉은 계집아이. 십이 반에 ...
화창한 가을, 사색보다는 활동이 좋은 때이다. 손 차양을 하고서는 길에서 길을 더듬는 이들마다 절로 감탄한다. 역시 우리나라 가을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정도로 훌륭해. 금빛 물결로 출렁이는 이 들녘이야말로 르노와르에게 맡겨야 제격일걸. 인상파 화가 손에서 재현되는 결실과 풍요의 아우름은 어떨까. 바야흐로 두툼한 잎을 하나씩 지우는 감나무. 말간 하늘을 배경으로 잘 익은 감을 촘촘히 드러내고 있다. 유...
어릴 적 혼자 집을 지키던 때가 생각난다. 누군가 있는 것만 같아 두리번거리고 힐끔힐끔 돌아보며 머리를 긁적이던 기억. 귀 기울이면 보이지 않는 뭔가가 벽을 쏠거나 나무가 걸어다니고 빗자루가 일어설 것만 같은 두려움으로 뒤통수가 섬쩍지근하다. 아닌 밤 중에 홍두깨로 휴일날마다 주어지는 임무. 청첩장을 두석 장이나 들고 낯선 곳을 헤매는 꼴이라니. 인적 드문 것이 유령도시가 따로 없다. 저 블록을 돌아가면 표...
익숙치 않은 수다가 계속 이어진다. 사무실에서 그러고 있으려니 주변에 신경이 쓰여 나중에는 이마가 뜨끈하다. 이넘 가시나가 목소리는 왜 이리 커? 짧은 응대만 하려고 해도 그럴 수 있어야지. 다들 무심한 척하고선 쫑긋하는 모습. 옆에 소근거리겠지. 저 사람이 이른 시각부터 웬일이람. 그러거나 말거나 전화기 안에서 여자애는 더욱 신이 나 고음으로 떠든다. 코맹맹이 소리로 덕지덕지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엄지손가...
장롱 안에 숨 죽이고 있던 어머니의 남빛 공단 치마저고리. 그 옷감처럼 푸르고 평온하던 지난 봄날 바다. 치즈가 녹아내리듯 양광이 넘쳐 흘렀다. 미동도 않는 물결 위에서 고깃배도 어쩌지 못해 정지한 풍경을 떠올렸는데. 동료들과 어울려 떠들썩하니 퍼붓던 어젯밤 술자리는 숙소인 쏠비치까지 이어져 끝날 줄 몰랐다. 오죽하면 조용해 달라는 소원이 서너 번이나 날아왔겠는가. 이도 모자라 아침 상에 떠억하니 술병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