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계절이다 백무산 계절이 바뀌면 뱀도 개구리도 숲에 사는 것들은 모두 몸을 바꾼다 보호색으로 변색을 한다 흙빛으로 또는 가랑잎 색깔로 나도 머리가 희어진다 천천히 묽어진다 먼지에도 숨을 수 있도록 나이도 묽어진다 흙에 몸을 감출 수 있도록 몸을 바꾸고 자신을 숨기지만 그러나 긴 고요에 들면 더이상 숨는 것이 아니다 봄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나는 계절따라 생멸하지 않는다 내가 계절이다...
너무 무거운 노을 김명인 오늘의 배달이 끝났다 방죽 위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저무는 하늘을 보면 그대를 봉함한 반달 한 장 입에 물고 늙은 우체부처럼 늦 기러기 한 줄 노을 속으로 날고 있다 피멍 든 사연이라 너무 무거워 구름 언저리에라도 잠시 얹어놓으려는가 채 배달되지 못한 망년의, 카드 한 장 ---김명인, 꽃차례, 문학과지성 시인선 367, 문학과지성사(2009년 10월 29일)--- *'카드 한 장' 기다리며 '너무 무거운 ...
제석봉 부근(2009년 6월 24일) 제석봉에서 이별하다 박후기 산처럼 사랑도 오르는 일보다 내리막을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죽은 나무들 사이로 당신이 떠난 후 깨닫는다 엎질러진 물처럼 사랑은 발아래 스며든다 땀 흘리며 묵묵히 오르던 늦가을 벽소령, 당신에게 건네던 물과 함께 쏟아진 마음을 다시 담을 수 없었다 물 한모금으로 더운 가슴 적시며, 무거운 짐 지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사랑했다 하지만, 좁은 외길 함께...
야생오리 이선영 이윽고 겨울이 지나면 야생오리들은 잊지 않고 날아왔던 곳을 향해 다시 날아간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도 날아가지 않고 남아 있는 오리들이 있다 때로 나는 내가 그, 손쉽게 길들여진 집오리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곤 한다 ---이선영,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 창비시선, 304, 창비(2009년 7월 15일)--- *늘 '나는 내가 그,' 집오리라고 생각한다. 孔道사는 安아무개도 집오리인지 모른다.
침대를 타고 달렸어 신현림 누구나 꿈속에서 살다 가는 게 아닐까 누구나 자기 꿈속에서 앓다 가는 거 거미가 거미줄 치듯 누에가 고치를 잣듯 포기 못할 꿈으로 아름다움을 얻는 거 슬프고, 아프지 않고 우리가 어찌 살았다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찌 회오리 같은 인생을 살며 어찌 사랑의 비단을 얻고 사라질까 ---신현림, 침대를 타고 달렸어, 민음의 시 154, 민음사(2009년 6월 30일)--- *하여간 달려간거야. 金도, 孫도, ...
오늘은 이근화 오늘은 살과 비늘로 이어진 날 한 마리 물고기는 한 마리의 냄새를 피우고 두 마리 물고기는 두 마리의 냄새를 피우고 오늘은 파도를 무시하고 입술고래와 만나는 날 내가 듣는 줄 모르고 여기저기 시끄러운 날 야광 후프가 반짝반짝 돌아가고 이리저리 허리가 꺾이고 다리가 늘어난다 오늘은 살과 가죽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날 오늘은 식구들이 다 낮잠에 빠진 날 선풍기가 산소를 먹고 머리카락을 먹고 아이...
방 강성은 옆으로 누우면 벽 똑바로 누우면 천장 엎드리면 바닥이었다 눈을 감으면 더 좋았다 가끔 햇빛이 집요하게 창문에 걸쳐 있다 돌아가곤 했다 ---강성은,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창비시선 303, 창비(2009년 6월 22일)--- *내 방이다. 오래전 모습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눈을 감으면 더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