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학교 바로 정문 앞에서 좌판행상처럼 '창작과 비평' 영인본을 팔고 있었다. 유신시대에 '창작과 비평' '사상계'와 같은 계간지는 불온서적처럼 평가받고 있었다. 왜 그런 책들은 체제비판 내용을 싣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러니까 더욱 내용이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문학비평 계간지 잡지로만 알고 있었는데 '창비'라면 무언가 반체제 학생운동권 학생이나 사보는 잡지 정도로 알고 있던 석근이도 내심으로 호기심이 일어 ...
46. 한창 젊은 청춘이라 비록 가께우동과 유부초밥을 먹고 나이트에 들어갔지만 밤새 마른 오징어류의 안주와 맥주만 들이키고 난 속은 새벽이 되자 허기져 왔다. 영필이는 아직도 표정변화없이 자신을 따라오는 성미란 아가씨가 조금 묘하다란 느낌은 받았지만 의례 저런 류의 논다리 여대생은 머리속에 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여기며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새벽참을 먹고나서도 미기적거리면 어디 여관에나 데리고 들어...
43. 식모 귀련이라고 사람들은 말을 하였지만 귀련이 자신은 한번도 자신이 식모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 집 마나님은 좀 둔한 것인지 아니면 어진 것인지 당최 싫은 말을 하지 않는 성품이었고 귀련이가 이집에 온 이후로도 귀련이를 부엌데기 취급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성식이 도련님도 점잖치 최의원나리야 바깥일이 바빠서 당최 집의 가장인지 아니면 손님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만 성애가 좀 성가...
40. 광복동은 부산의 중심지였다. 미화당 백화점을 통하여 윗층에서 바로 용두산 공원으로 건너가는 철간다리가 놓여져 있어 백화점 구경을 하다가는 공원으로 빠져서 이순신 장군상을 볼 수도 있었고 그 이순신 장군의 눈길은 앞에 펼쳐진 부산 남항을 내려다 보는 곳에 조성되어 있었다. 예로부터 일본인들과의 왕래가 잦았던 부산은 그래서 해방이후에도 한동안 일본문화의 잔재가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생선 이름부터 각종...
37. 오늘도 학교 앞에서 작은 시위가 있었다. 민도는 왜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아직 고1에 불과한 자신이 정치에 대한 관심도 없었지만 날로 심해가는 최루탄 가스 냄새는 맡으면 맡을수록 익숙할 법도 하지만 마실 때마다 화가 났다. 함부로 남의 코에 이런 지독한 가스를 집어넣는 그 사람들에 대하여 화가 나는 것이었다. 어느쪽이든 빨리 항복을 하든지 아니면 따로 여의도 광장같은 곳에서 시위를 했...
34. 말숙이는 친구 병인이의 오빠 병욱이와의 만남을 생각하면 할수록 분했다. 학교만 시계추처럼 다니게 보인 그 병욱이는 사회학도라는 것을 책속에서만 찼으려는 범생이였다. 말숙이는 여자대학을 다니지만 여느 학생과는 다르다고 자신은 생각하고 있었다. 학교 앞의 수많은 양장점에서 맞춤옷이나 고르는 그런 여대생의 한 사람으로 자신도 비춰질까 어떻게 보면 너무 지나치리 만큼 다른 티를 내고 있었다. 암울한 시대...
31. 그렇게 우리들의 수험생활이 마쳐졌고 우리는 해방되었다. 다들 캠퍼스라고 불리는 또 다른 교정으로 옮겨갔을 뿐이었다. 석근이도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있는 자그마한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고 난생 처음으로 집을 떠나 혼자서 생활하는 경험을 얻게 되었다. 그렇게도 바라는 생활이었지만 막상 서울이라는 거대한 집단속에 들어간다는 막연한 불안감과 기대감은 열차가 영등포역에 도착했어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대...
28. 아무래도 용철이는 대학진학은 어려웠다. 인문계 고교도 아니고 더구나 집안 형편으로 보아서도 자신에게 학자금을 대어줄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상업고교였지만 그래도 한반은 '진학반'이란 명칭으로 대학진학을 목표를 하고 있었다. 자신은 사회진출을 목적으로 하는 반에 편성되어 있으니 대학 진학과는 무관하게 학교생활을 해온 것이었다. 나름 인문계 고교를 다니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조숙한 그는...
25. 시대는 변해가고 있었다. 변할 때는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은 의례 잘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그 무엇이 분명 그 시절엔 있었다. 누구나가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그 어떤 두근거림. 어떤 이는 이를 자신감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할수 있다는 불굴의 새마을 정신이라고도 했지만 그 말이 그 말인 셈이다. 학생들은 좋은 머리만 타고 나면 배를 굶어서라도 서울대 합격이라는 의외의 결과를 낼 ...
22. 그렇게 우리들의 여름은 지나고 가을이 찾아왔다. 이제부터 10월유신이 선포된다. 유신이란 낯선 글자를 해석해내느라 신문들은 바빴다. 그 누가 이런 단어를 어디서 찾아냈단 말인가. 일본의 메이지유신에서 따왔다는 사람도 있었고 또 다른 이는 중국의 옛 고전에 나오는 말이라고 했다. 이른바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말로 대변되는 유신의 시절은 그렇게 막이 올랐는데 뜻풀이가 재미있었다. 서양화초를 한국토양에 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