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이야기 8집



# 송화(松花)클럽
 

                                                                        손채린

반세기 만에 만남~  참으로 오랜만이었습니다.
고교를 졸업한지 어언 48년~ 그러니까 지난 21일 토요일에 반세기 만에 만남이었습니다.
간간이 문학지에서  보고 소식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상상을 못했거든요.

인터넷 세상 다음에서 블로그를 하면서 우리의 들꽃을 찾아다니며 사진마을 출사팀 회원인 '한강의 꽃'에서 우연히 흔적을 따라 찾아간 블로그 '들꽃나라'의 시인 김혜원 님 방에서, 목요포럼의

회원들 소식을 보고 그 곳에서 예전의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의 문학동우인   시인 이건청 님을 사진으로나마 만나게 되어 김혜원 시인 님이 다리를 놓아 직접 만나게 되었답니다.

'59년 그당시 고교 3학년때 학원문학상에서 소설부 「희생자 」로 가작, 이화여대 전국 여고문학콩쿨에서 단편소설 부문에 「환상의 독백 」으로 2등을  하곤, 대학 졸업 후 신춘문예에 여러 곳에

투고를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64년도인가 새로 태어난 「여상(女像)」이라는 여성잡지에 단편소설 「분열 」을 투고를 해서 결심 4편까지  올랐으나 낙선을 하곤,  그 길로 꿈을 접고 결혼해서

24년간 아이들 낳고 뒷바라지하며  지내다가, 나이 53에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으로 펜을 잡고 씨름을 하여 '98년도에 겨우 그토록 원하던 문단에 수필부문으로 입성을 해서, 아직껏

개인 작품집 하나 없이 문학지와 동인지에만 해마다 겨우 원고를 서너편 보내는 정도이지만, 그 분은 저보다 한 학년 아래 후배였지만 청소년의 꿈을 그대로 간직한채 계속 매진해 교직에 몸을

담구어 글밭을 이루어 한양 대학교에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사범대학장까지 지내시고 얼마전까진 시인협회장을 지내시고 이젠 중후한 모습의 노년을  흑석동 대학원에서 석, 박사 과정의

후진들을 가르치시고 계신다 했습니다.

해마다 온누리에 송화가 피기 시작하면,
오십 여년전, 그 때 그 시절 사람들을 떠올려 봅니다.
명동 성당 건너편에 Y.W.C.A. 소속으로 두개의 혼성클럽이 있었는데 하나는 OAK CLUB으로 영어회화클럽이고,  우리는  서울 재학생들로 모여진 문학도들로 송화(松花)클럽에서 양정고

후배 삼총사 중에  이 건청 시인과, 또 한분 이서룡 님은 워싱턴에서 산부인과 의사를 하시며 그곳 한인문인회에서 활동하고, 조종군 님은 신체가  좋았었는데 후에 재벌급으로 특수강 사업을 하며

미국에서 지내다 14여년전 저 세상 길로 이미 떠났다 하였습니다.


그 시절 함께 뜻를 같이 하던 김원래 님, 그리고 서라벌예대를 나와 아리랑 잡지에서 근무하던 사촌 동생인 김원두 님은 오래 전 세상을 하직하셨고,  배재고 출신의 노래를 곧잘 흥얼거리던

홍순훈 선배님은 신촌의 연세대 사학과로 진학하시고,   저를 그 곳 클럽으로 인도하였고 시를 쓰시던  조영일 님은  화공과로 진학하시어 화공학박사로 후진을 지도하고 계셨더랬습니다.

우리클럽의 회장직을 하시던 역시 배재고 출신의 주승림 선배님은 대광고에서 교편울 잡으셨었고, 회장직을 물려받았던 천소웅 님은 외국어대학으로 진학하고,

진명여고의 오상조 님과 이연강의 소식은…
그 당시 소설로 여성동아에 결심에 올랐던 한창 기대가 되던 창덕여고 출신의  최길자(이영/개명) 님의 소식은 고려대로 진학 후 옥수동 시절 다시 한번 만나곤 그 후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모두 어디에 계신지요…?

인사동 골목 '귀천' 가는 길에 '인사동 사람들'이라는 찻집에서 만나, 지나간 세월을 더듬으며 두어 시간 어린 날들의 문학에 대한 막연한 꿈들을 반추해보며, 우린 중3시절부터 글을 써오기

시작했다며 문학의 길을 향하여 오랜 세월을 지내온 이야기들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계속 되었습니다.

시인이신 박목월 선생님께서 우리 클럽에 오셔서 시에 대한 특별 강의도 해주셨던 일도 또렷이 기억이 나고, 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비바람에 제가 둥둥 실려가며 우산이 날아가도록

사라호 태풍이 거세게 불던 그 날도 우리의 문학에 대한 갈망은 토론과 함께 계속 이어졌었지요.
혹여 이곳 제 블로그에도 가금 청소년 학생들이 찾아 오는데 여러분의 소중한 꿈들을 고이 간직하시고 열심히 매진하면 언젠가는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할수 있겠습니다.

습관적으로 디카를 꺼내곤 하지만 이젠 너무도 크게 자리 매김하신  이건청 시인님에게 혹 실례가 될까하여 감히 카메라를 들지 못하고 일부러 저에게 선물하려고 가져오신 문학잡지의 표지 위에

올려진 선생님의 모습을 대신 블로그에 담아 올려 봅니다.

고향이신 이천에서 삶의 터전을 잡으시고, 만일 시인이 아니었다면 산불감시원이 되어 숲지기가 되었을 거라며 웃으시며 이젠 자유로이 글에만 전념하신다니 앞으로도 건필하시어 계속

아름다운 자연의 숲속에서 좋은 작품들이 샘물처럼 솟아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만나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2008.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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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년 후 어느 날

옛 송화클럽의 회원이었던 홍순훈 선배님의 졸업후 반세기가 지나 궁금해있던 소식을
 최근 우연히 인터넷 서핑하다가 다음카페에서 미국 땅 남가주 어바인(Irvine)자택에서
가스중독으로 부부가 함께 불의의  사고로 사망 소식을 접하여, 놀란 가슴을 어루며
삼가 두분 고인의 명복을 빌어봅니다.


#           _지금은 잃어버린 노트에서_

 
   「체린을 위한 詩曲」

  
     그때
     그 시절
     그 사람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며 지낼까

     구성지게 잘도 부르던 
     '갑돌이와 갑순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
     바람에 은발 휘날리며
     낡은 시집 하나 펴들고
     낙엽이 깔린 의자에 앉아
     그 시절처럼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고있을까

     아니면
     지금쯤 젊은 날의 꿈을 찾아서
     바람에 실려 온누리 누비며
     이 아름다운 세상
     사랑하는 반려자와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리는지…


#     길. 8


세월이 우리에게 주는 것



우리의 만남은19년전 선릉의 나산 문화센터에서 처음 만나 젊은 날의 글공부에 목이
마름을 달래주며 우여곡절 끝에 계몽으로 이어지고 그 곳에서 카페지기 블루 님과의
첫만남이 시작되고 다시 진로로, 강남터미널 신세계로 스승을 따라 여러번 마다않고
옮겨 다녔습니다.
되돌아 보면 그 시절 그 때가 아마도 문맥을 찾기위해 산골을 찾아 무수히 방랑하며
눈높이를 키워가며 타는 목마름을 적시워가던 인생의 황금기 였던 것 같습니다.

마음속 갈등을 글로 풀어내며 다른 이들의 진솔한 글을 읽으며, 나 자신을 채찍질하고
전국 각곳의 유명한 사적유적지들을 찾아다니며 선인들의 숨결을 느끼고 세상
바라보는 안목도 넓히고 마음을 살찌우기도 했더랬습니다.

이제 머리에 하얀 성에를 이고 사니 그간에 저 아득한 세계로 먼저 사라지신 문우들,
명 희경 님, 손 일하 님, 박 유수 님, 정 금주 님, 신 옥수 님... 등이 문득 떠오릅니다.


고운 자태로 우리에게 모범이셨던 산울림 이복자 선배님을 점심식사 후에
치료중이신 안양의 요양병원을 찾았습니다.


지병인 당뇨와 고혈압으로 고생하시다가 지난 10월에 췌장암과 대장암으로 대수술
받으시고, 초췌해진 모습에 왼쪽 귀는 전혀 안들리고 현재의 순간들이 가끔 이리 저리
헤매이기까지 하셔서 안타까웠습니다.
우리 화이트 님의 이름은 정확히 대시는데, 얼마전까지도 전화로 문안 드리면 제 이름
석자를 불러 주셨는데 어제는 저를 한참 기억을 더듬어 보시더니 "송..창식.." 하시더군요.^.^
예전에 제가 노래 부르면 좋아하시더니 노래와 연관되셨는지 송창식이라 불러 주셔서
전 웃으면서도 한켠으론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언젠가 훗날의 제 모습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슬펐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손을 잡으시며 "어떻게 먼곳에 이렇게 찾아왔어요?" 하시며
"고맙다"고 가슴이 메어 겨우 말씀을 이으시더군요. 선배님의 쾌유를 바라면서
병실문을 나오는데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어쩌면 다시는 못 뵐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 오늘 하루도 살아 있음에 감사드리고, 하늘 우러르는 동안 건강한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며 서로에게 격려의 말들을 아끼지 말고
올 한해도 열심히 힘찬 걸음으로 하루를 시작해 봅시다.

2012.1.9.



#             전철에서 만난 헷세가 나에게


5년전 무릎관절염으로 수술을 하고 난 후 정기적으로 수원 아주대병원을 찾았습니다.
왼쪽무릎마저 욕실에서 넘어지며 문짝에 부딪혀 통증이 심해 사진을 찍고 결과를 보니
심각한 상태인데 될수록 약으로 치료하기로 하고 처방을 받은 후, 어머니인 이복자 선배님의 안부를 여쭈니

힘없이 제손을 꼬옥 잡으시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듯 했습니다.

"지난 구정 설날에 그만 저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연락을 주시지 그러셨어요."했더니
"모처럼 가족들이 모이는 설날이라 그럴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병실을 나서는데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떠날텐데
헤어진지 보름만에 너무도 일찌기 가버리신 선배님이 다시 그리워 집니다.

착잡한 마음을 누르고 1호선 전철을 타고 약을 지으러 종로5가로 가는동안,
헬만 헷세(Hermann Hesse)의 저서 ⎡헷세가 너에게 Hermann Hesse to you ⎤를 꺼내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


시인이면서 그림에도 소질이 많아 많은 그림들을 남겼는데, 63페이지에
"그림을 그리는 일보다 더 위험하고, 더 어려우며, 더 절망적인 것이 있을까?
그보다 더 까다롭고 절망적인 일이 있을까? 목련꽃을 그리려하는 주제 넓은
시도와 비교해볼때, 내가 쓴 모든 글들도 아주 쓸모없는 엉터리 작품이 아니였을까?"

아마도 모든 창작을 하는 태도의 어려움과 고통을 털어낸 말씀인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제가 아직까지 써온 글에 대한 반성과 만족하지 못함에 대하여 작품집을 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65페이지 4에서는
" 우리들 중 대부분은 과거를 회상할때 흔히 '그때가 좋았지'라고 말하며
강한 행복감을 느끼곤 한다."

지나간 날은 고통이었지만 아마도 다 충분히 감내하고 이겨 낼수 있었던 아픔이었기에

훗날 좋은 기억으로 추억을 떠올릴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65페이지 5에서는
"지내온 길은 되돌아 볼때마다 버렸던 수없이 많은 날들이 엷은 기쁨과 슬픔으로
혼합되어 엄습해 온다. 이제는 아무도 나 자신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줄 사람은
살아있지 않고, 나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마치 굳건한 성곽처럼 닫혀진채
황금빛 회고의 행복 속에 감추어져 나의 동경의 대상이 되어있다."


위의 말은
언젠가 80세쯤 그때 가서 책을 내볼 계획이라는 제 말에 김국선 선배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때는 내 이야기를 들어줄 우리가 아는 독자들이 이미 이 세상에 없을 지도 모른다"는 말의 의미를 마치

전철에서 만난 헷세가 나에게 일깨워 주는 것 같기도 해서 그동안의 성실하지 못하고

열심히 작품활동을 하지 못한 자책감 같은 거라고 반성해보며 새삼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65페이지 6에서는
"생활에 의미다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단한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도

나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때문이다."

그렇습니다. 단 한번뿐인 우리의 삶을 헛되고 후회 많은 날들로 남기어서는 안되겠지요.
지금부터라도 오늘 하루를 참되고 성실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 다짐을 해봅니다.

올해 봄엔 1월 10일엔 대학축제때 함께 혼성4중창단을 꾸려 노래불렀던 수필가이시며 선배이신 함광순 목사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시고,

우리의 다정한 언니이셨던 이복자 선배님도 우리 곁을 떠나시고,

'목련화'를 지으신 조영식 총장님께서도 2월18일에 85세의 일기를 마치시고 소천하셨고,

학우였던 이성부 시인도 저 머나먼 길로 떠나시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빌어드립니다.


2012.3.21.


#         길. 10




애기봉 단상(斷想)



인생을 계절에 비해 사계로 나누면 지금 제가 서있는 길목은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어느새
겨울에 들어 서 있습니다. 연극으로 비하면 4막의 마지막 장에 들어 서 있다고나 할까요.

요즈음 흔한 말로 지하철 7호선 2번출구에 올라서니 저보다 4년 앞선 동반자가 그 고개에서 자꾸만 친구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해 제가 대신 말해주곤 했는데

막상 그 자리에 제가 서니 즐겨 부르던 꽃이름도 깜빡하니 그 증세가 뇌세포가 하나씩 죽어가는 현상이라니, 세월을 탓해야 하기보다 육신의 기력도 이젠 전만 못해

걷기 좋아하던 패기는 점점 주는 것을 그대로 인정해야만 할것 같습니다.

어느덧 봄기운이 화사한 가운데 벚꽃이 피어 한창이더니 한차례 비바람에 지고 난뒤,여의도에 벚꽃구경하고 온 다음날, 척추관 협착증으로 몇년동안 통증으로 고생하다가

갑자기 허리를 세우질 못하고 화장실에도 간신히 기어가는 남편을 119 응급차에 실려 곧바로 수술받기로하고 입원한 병실을 매일 오가는 동안 아파트와 공원을 지나 길목엔

철쭉이랑 명자화랑 눈부시게 빛나고 제비꽃은 고운 자태로 고개 숙여 피어났습니다.

그를 간호하느라 저의 수술 안한 나머지 무릎관절염과 허리병이 다시 도지는데, 다행히 5월 초하루 남편은 무사히 수술을 마쳐서 간병인에게 잘봐달라 부탁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날따라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있어 11층을 간신히 걸어 올라와서 초죽음 되었습니다.

오가는 길가에 목련이 피었다 지고 벚꽃도 피고지고 만발한 철쭉꽃이 환히 웃어줍니다.
베란다에선 화초들이 꽃잎을 활짝 펴서 예쁘고, 집을 비운 사이 지난번 문우들과 같이 간 양수리 세미원에서 산 연꽃 5개의 씨앗에서 싹이 나고 줄기에 둥근 잎이 돋아나서

진흙화분에 심어 커다란 백자에 물을 채워 심어주니 푸른 잎새가 삶의 의미로 위로를 해줍니다.

성치못한 몸으로 늙은 아내 노릇하느라 너무도 힘이드는데 근 한달을 병원을 오가는 사이 아파트 마당엔 제가 좋아하는 붓꽃이 무리지어 피어있고,

베란다 창밖엔 방울토마토가 귀엽게 매달려 그나마 시름을 덜어줍니다.

지난 일요일엔 며늘아기가 바람 쏘여준다며 김포가도를 달려 나갔습니다. 태산패밀리파크에서 손주들과 분수맞기 놀이를 하고 도예체험장에 들어가

손수 도자기를 빚어 그림을 그려보는 아기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에 잠시 지난 날들의 학창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마침 그곳이 서해안 최북단이라 전류리포구를 지나 가까운 군사지역인 애기봉을 찾았습니다. 저희 둘째가 초등학교 보이스카웃 시절에 찾았던 곳이라

손주들에게도 우리의 분단된 조국의 현장을 보여쥴수 있을 거라 생각해 입장 마감 시간이 임박해 들어가 부지런히 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바로 저기 임진강 건너에
아련히 보이는 작은 산 봉우리들...
선전용 위장마을이 희미하게 보이고
갈아놓은 논과 밭이 침묵하고 있는데
작은 모래섬들과 멀리 송악산이 바라다 보이고..
저 산 멀리 저 너머엔 고향땅이 있을 터인데...

자연은 저리도 평화로운데
어찌 우리 사람들이 함부로 금을 귿고
언제까지 서로 총을 겨누고 살아야하는지...
참으로 반세기가 넘도록 한맺히는 서글픈 현실입니다.


며늘아긴 그렇게 가까이 북한이 보이니 한나라가 두동강이 나서 서로 대치한 상황이
아이들 보기에도 부끄럽고 안타까운 현실이 너무도 무섭다고 합니다.
마감시간인 6시가 다 되어 서둘러 그곳을 내려왔습니다.


지난해 2011.12.17.오전 8시 30분에 열차안에서 발병 심근경색으로 사망~
이틀이 지나서 오늘 낮에서야 알게된 북한의 김정일의 사망소식~!

3대를 이어온 저 북녘땅 김일성의 권좌가 아들대에서 영영 찬 이슬로 사라졌으니
아직은 어린 손자대에서 우리 민족의 염원인 하나가되는 길목으로 갈수있으려는지...

'50년, 제가 10살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 김일성의 정치적인 야욕에 의해 비롯된
6.25전쟁은 우리 민족 모두에게 크나큰 살상과 절망과 통탄의 아픔을 남겨주었는데,
이제 62년이란 세월속에 이산가족들의 한많은 삶을 철저히 외면한 그들이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길로 떠났으니, 과연 지구상 하나밖에 없는 분단의 나라의 비극적인 슬픔에
언제 종지부를 찍을수 있으려는지...


반세기가 지나도록 이 민족의 비극이 많은 사람들에게 한을 남기고, 지구상 어느곳에도
자기의 고향을 가 볼수 없는 나라는 이곳 하나밖에 없을 것입니다.
'04년 여름에 고향 대신 금강산을 밟아 본 이유도 그런 연유에서 였습니다.

언젠가는 우리의 소원인 통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2012.5.27. 서해안 최북단 애기봉에서 북녘땅을 바라보며~



#              곡산역(谷山驛)



그 곳에 가는 길


깊은 산 골짜기 흐르는 냇물
물안개 자욱한 산자락 구름따라
물길따라 나그네 머무는 곳

그 곳엔 언제나 사철... 나무가 있고
잎새가 바람에 춤을 추는 곳

계절마다 꽃이 피어 아름다운
그 곳에 가는 길은 어디메일까


불행하게도 제겐 고향이란 단어는 상상에만 있는 낱말입니다. 지금도 명절을 맞아 고향을 향해 가는 사람들만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 암울했던 일제 침략시대였고, 장손인데도 서울로 유학을 오셨던 아버님이 졸업 후에, 지금 한국전력의 전신인 조선전업(주) 수풍발전소에 계셨다가 서울로 전근되어

위로 언니를 둔 저는 네살적 부모님 따라서 서울을 향해 떠난 고향은, 슬프게도 기억속에 그림이 전혀 그려지지 않습니다.

다만 황해도 '곡산(谷山)'이라는 지명을 생각하면 심심 산골짜기라는 것만으로 기억하고 있을뿐이죠. 그런 연유로 고향 이름을 별호나 인터넷에서 닉으로 사용합니다.
사촌언니의 말로는 산 정상에 흑연탄광이 있어 그 곳에 오르는 사람들이 제법 너른 터에 자리한 저희 고향집에 방도 많아 묵어가는 손들이 많았다고 하더군요.

이듬해 해방이 되어 정부가 수립되었고 5년후, 김일성의 정치적 야망으로 남침된 6.25전쟁이 일어나, 사진으로만 보던 할아버지랑 할머니는 다시는 만날 수 없이 오늘을 맞고 있습니다.
이제 부모님은 세상을 모두 하직하셨기에 아직 생존해 계신 고모님들과 사촌형제들 만이라도 만나고파 저만이라도 죽기전에 저 북녘에 두고온 고향땅을 한번 밟아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날이라 모두 쉬기에 홀로 집을 나서 1호선을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1시간 남짓 기다려 곡산역을 향해 2009년 7월 1일에 전철로 곡산역으로 개통되었다는

경의선 전철을 타고 목적지까지 갔더랬습니다. 마침 젊으신 역무원과 퇴직한 역무원이 근무하고 계셔서 잠시 어떤 연유로 제 고향과 같은 이름의 '곡산역'에 대한 이름이 지어졌는지

여쭈어 보았습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알아본 내용이 없던 것처럼 자세한 기록이 없는데 일제시대부터 있었던 이름없는 간이역으로, 다만 능곡과 일산 중간에 있어 그리 지은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쟎아도 역이 개통되었을때 이북5도청의 황해도 면장님이 찾아 오시어 역 명칭에 대해 궁금해 하셨답니다.

혹시나 저는 곡산 출신인이 많아서일까? 생각을 해봤더랬습니다.

주변은 농지가 대부분이어서 가 볼만한 곳이 없고 주변의 야산도 나즈막한 곳 몇군데 있을뿐, 서쪽에 우뚝 솟은 한전에서 지은 열병합발전소가 보여서

아버지가 다니던 발전소라 반가웠습니다. 아마도 틈나는 대로 몇번은 더 이 곳을 더 찾아 길을 나설것 같습니다.



하루 속히 민족의 염원인 우리나라가 다시 하나되어 평화롭게 살수 있기를
오늘 밤이라도 달이 뜨거들랑 다시 한번 간절히 두손 모아 빌어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