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13년명 불좌상/639년/당/중앙박물관 자료 스크랩...>

다시 한반도로 돌아오기 전, 60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 중국, 한반도, 일본 3국 모두는 중대한 전환점에 들어선다.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멸망한 다음 당나라가 들어서고, 한반도에서는 신라의 가장 전투적인 외교공세가 펼쳐지며, 일본은 다이카 개신에 이은 오사카 천도 등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에 돌입하며 하쿠호 문화시대를 연다...

 

이때 중국에서는 西遊記(서유기)의 주인공 삼장법사 현장에 의해 (구역불교의 폐단을 비판하면서) 신역불교가 개창되고, 당나라가 등장한다. 새로운 굴기에 맞춰, 혁신된 사상체계로 강력한 통일국가를 주창한 만큼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불상들이 조성되는데, 상현좌 표현도 세련된 주름과 정연한 방식으로 양식화 되어간다...

 

 

 

<도교천존상/중앙박물관 자료 스크랩...>

중국의 국교가 도교인 이유는, 북방 동이족이 받아들인 불교에 대항하여, 중국의 화족은 화이사상의 전통성을 도교에서 찾았기 때문이 아닐런지... 때문에 본존불이나 천존상이나 비슷한 시기에는 비슷한 옷을 입었고, 자태와 형식도 비슷하게 만들어 자신들의 사상과 신앙을 융합시켰다고 생각한다...

 

 

 

<경주 인왕동 출토 석조불좌상/630년 경/신라/경주박물관...>

전쟁의 기운으로 들썩이던 신라의 석불좌상은 어떤 모습일까? 사회적 분위기와 상반되게 이 당시 조형된 삼화령 애기부처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미소를 가졌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이 석불상도 비슷한 느낌인데, 역시 상현좌로 표현하였다... 신성을 표현하는 유행과 권위는 쉽게 바뀌지 않았겠지...

 

 

 

<삼화령 석조미륵삼존불상/630년대/신라/경주박물관...>

미륵불로 명명된 이 본존불도 의자에 앉은 모습이지만 법의가 하체와 좌대를 모두 가리고 있다... 이런 모습도 상현좌라 생각해 같이 올려본다...^^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국보 201호/670년 전후/통일신라...>

그러면 600년대 후반,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통일신라의 불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최초의 모습이 봉화 북지리 석불좌상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연동리 석불좌상을 뛰어넘는 전체 높이 4.8m(본존불이 4.3m)의 기념비적 스케일에 시원시원하고 유려한 곡선으로 조형하였는데, 평양성 함락이후 경주로 개선하는 문무왕의 기개를 담아선지 안정감 넘치면서 장중한 기운이 넘치는 석불이다... 마애불이라고는 하나 완전한 석불좌상에 가깝고, 자연암반을 깎아 석굴처럼 조성했으며(언젠가 다른 글에서, 백제석공들이 동원되어 만들었다고 말했었지??^^ 그만큼 백제불상들과 친연성이 강하다), 역시 상현좌 유형이다...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국보 109호/670년 경/통일신라...>

봉화와 영주를 이어 경주로 개선하는 길목. 백제와 고구려로 출병하는 모든 군마가 모였을 곳이 군위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런지 당대 만들어진 대부분의 불상은 죽은 장병과 백성들을 위무하는 아미타불상이었지... 봉화보다 더 깊이 파인 석굴, 경주 남산 부처골에서 시작해 200여년 지난 후 석굴암으로 완성될 석굴사원은 군위에서 그렇게 조금 더 체계를 잡아간다(불교의 성지 인도뿐 아니라 중국에 조성된 수많은 석굴의 권위를 신라를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역시 좌상인 본존불은 상현좌로 표현되었다...

 

 

 

<경주 남산 탑골 마애조상군/보물 201호/600년대 후반/통일신라...>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고자 한 문무왕과 신문왕대, 나는 이제야 경주의 탄생설화를 간직한 경주 남산이 성역화 되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반월성 바로 남쪽이 인용사지 등이 있는 인왕동이고, 그 방향 남산 초입에 있는 게 감실부처, 그리고 남산의 동편에 자리 잡고 있는 게 탑골이다(신라 탄성설화가 담긴 나정은 남산 서편이다)...

 

탑골 바위 남쪽면, 바위 정상에 있는 마애불상의 본존불 역시 상현좌... 통일신라의 불상이 백제식 광배를 벗어나 새로운 양식을 개발하기까지 100여년이 걸리는데, 이때까지 통일신라는 아직 백제의 유형을 그대로 답습했다. 물론 이 마애조상군을 보면 백제와 신라의 차이(불상조형 뿐만 아니라, 불교에 대한 이해까지를 포함해서)를 명확히 비교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계유명 삼존천불비상/국보 108호/673년/통일신라/공주박물관...>

불상조형에 온전한 통일신라의 유형이 완성되기 이전, 백제는 마지막 여운을 남기니 600년대 후반에 조형된 불비상들이 그것이다... 비석 혹은 광배처럼 생긴 석재에 불상을 조형한 것을 비상(碑像)이라 하는데, 중국에서는 북위부터 수당에 이르기까지 유행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충남 연기군에서만 집중적으로 출토되어, 이들 비상 7기를 연기파 불비상이라 묶어 부른다... 현재 세종시는 그 지리적 위치 때문인지 백제의 멸망 이후에도 유민들이 남아 있었고, 또 아직 백제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던 이들에 의해 가족의 명복 혹은 백제의 부흥을 염원하며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특정시기에 집중적으로 조형되었다...

 

다만 이 비상들은 1m를 넘지 않아 절이나 집 내부에서 보관할 수 있는 크기로, 불특정 다수의 대중들이 볼 수 있거나, 특정 그룹의 상시 친견이 가능한 기념비적 스케일이 아니다. 즉 동 시기 전쟁에 승리한 신라인들이 3~7m에 가까운 대작들을 쏟아낼 때, 백제유민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들의 사재를 모아 망자를 위로하고 후일을 기약하는 것일 뿐이었고... 그런 이유로 불과 십수년전 멸망한 백제의 유민임을 스스로 자처할 수 있었고, 또 다시 백제의 영화를 되찾기를 염원할 수도 있었을 터...

 

이 비상들에는 그런 염원과 애환이 스며있음에도,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공력을 투입했다. 광배의 세부 디테일에서부터 전체적인 구성까지 그들이 알고 있는 백제의 모든 것을 담았다는 말... 백제 최초의 기념비적 석불이 사면불이었고, 또 백제인들이 백제의 이름으로 한반도에 남긴 최후의 완성품도 사면불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 삼존석상/국보106호/673년/통일신라/청주박물관...

내가 찍은 사진은 너무 흔들려서 스크랩한 걸 올린다...>

연기파 불비상 7기는 계유명 전씨명 비상2기를 포함, 연화사 무인명 불비상 및 받침돌(보물649/678), 연화사 칠존불비상(보물650), 비암사 기축명 아미타불비상(보물367/689/청주박물관), 기축명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보물368/689/청주박물관), 납석삼존불비상(공주시 정안면 출토/보물742/동국대박물관)이며, 이 중 국보로 지정된 2기의 본존좌불상이 상현좌로 조각되었다...

 

불비상은 이들 외에 함화4년명 불비상(834/발해/오쿠라미술관)이 있고, 참고로 순천 금둔사지 석조불비상(보물946)과 담양 오룡리 석불입상도 비석의 형태이나, 이들과는 같은 유형으로 분류하기는 힘들다...(물론 내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