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병좌상/700년 경/발해/중앙박물관 재현품...>

그러면 600년대 후반, 고구려 멸망 이후 만주에서 이를 계승한 발해는 어땠을까? 발해의 함화4년명 불비상은 상현좌 유형이 아니지만, 이 이불병좌상은 상현좌 양식이다... 당 뿐만 아니라 고구려에서도 상현좌가 유행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어 골라봤다...

 

고구려, 백제 유민들까지 당나라와의 전쟁에 동원되면서 통일신라는 서서히 중앙집권적 체를 정비하고 새로운 융화정책을 통해 정체성을 획득해가면서, 한반도는 통일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시대를 맞이한다. 이때가 700년대... 불상 조형은 어떻게 변하며, 또 상현좌는 예전의 명맥을 유지하며 전통 유형을 고수해 나갈까?

 

 

 

<경주 황복사터 삼층석탑 출토 금제 아미타불좌상(706년)과

산서성 루이청현 펑링두 출토 석불좌상/710년/당/높이 93cm/중앙박물관 자료 스크랩...>

이 불상을 통해 중국의 700년대도 상현좌는 여전히 좌불조형의 유력한 양식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통일신라와 당나라, 비슷한 시기에 조형된 두 불상은 규모와 재질은 다르지만, 원형의 중대석과 여러단의 층급받침 등 비슷한 양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창원 삼정자동 마애불/통일신라...>

상현좌란 주제를 떠 올리게 만든 오늘의 주제, 삼정자동 마애불이다... 그리고 내가 이 마애불을 700년대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이유는, 황복사터 아미타불과 중국의 석불좌상의 3단 커튼식 물결패턴이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상현좌 양식은 이후에도 계승되지만 이런 패턴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현좌 자체가 드물어지고 법의를 표현하는 법식은 새롭게 변한다...

 

참고로 통일신라와 그 이후를 통틀어 살펴봐도, 이만한 구도와 완성도, 그리고 부조 이상의 공력이 투입된 마애불은 그리 많지 않을 뿐 아니라, 800년을 넘어서면 거의 없다. 애초 마애불을 조각으로 풀어나가는 방식이 신라인들의 기질에 맞지 않았기 때문일까? 완전한 조각상을 갖춘 다양한 불상 조형과 석탑의 기단부와 몸돌에 조각을 채워 넣을 수단이 있던 신라인들에게, 마애불은 회화로 이해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신라인들은 마애불을 조상하면서,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상체와 두상 외에 고부조와 중부조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건 단석산 신선사에서부터 시작된 전통이며, 격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보물 187호/750년 경/통일신라...>

석굴암 본존불이 조형되기 전후부터 통일신라는 석불좌상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그 중 유일하게 상현좌를 명확하게 표현한 불좌상이 용장사지 삼륜대좌불이다... 한편으론 도식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전 3단 커튼식을 벗어나 (내 눈에는) 국보78호와 국보83호 반가사유상의 특징을 융합시킨 독창적 유형으로, 반복적이지만 지루하지 않고 단순하면서도 세련돼 보이는 패턴이다...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보물 199호/780년 경/통일신라...>

몇 년전 국보로 지정된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삼존불좌상(국보312/750년경) 바로 위쪽에 위치한 마애불상이지만, 이와 동시대로 분류하지 않은 이유는 ; 칠불암 마애불이 사방불에 삼존불을 함께 조형한 독창적 구조이지만, 사방불과 보주형 광배는 백제의 양식 중 하나이며 연화좌도 고식으로(마지막 사방불상이기도 하다), 경덕왕 초기보다 성덕왕 말기 작품으로 생각된다. 이에 비해 신선암 마애불은 광배 유형도 달라지고, 법의 장식과 좌대 하부의 암좌도 완전히 달라져, 최소 1세대 30년의 시차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통일신라 마애불 중에서 고부조이며, 전체적인 완성도 또한 높은 작품으로, 한때 유희좌로 불렸으나 공식명칭인 반가좌가 맞고, 후대 이런 자세는 보타낙가산에 상주하는 관음보살 자세의 원형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법의가 사각좌대를 덮은 상현좌 유형이다...

 

 

 

<대구 팔공산 동화사 마애여래좌상/보물 243호/800년 전후/통일신라...>

동화사 초입에 조형된 마애불로 눈높이보다 높은 곳에 조각되었다. 마애불에 대해 정리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마애불은 독립된 불상으로 이해되기보다 바탕이 되는 바위와 함께 큰 범주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되는데, 이는 전통적인 거석신앙의 흔적이며 역으로 불교가 습합된 결과이기도 하다...

 

또한 동화사 마애불은 저부조 또는 선각(음각)으로 조형된 일반적인 통일신라 마애불(두상만 고부조 또는 환조, 이후 라말려초가 되면 몸체까지 선각으로 처리하고, 두상만 별석으로 조형한 양식으로 바뀐다)들과 달리, 중부조와 저부조 양식을 가진 거의 마지막 단계 마애불로 완성도 또한 높다. 오른발이 결가부좌 하지 않고 대좌까지 내려온 유희좌 양식으로 소극적인 상현좌 유형이 아닐까 싶어 골라봤다. 대좌 밑으로는 화염문 같은 雲文(운문)으로 표현되었다...

 

 

 

<경산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보물 431호/800년 전후/통일신라...>

약사여래 양식을 갖춘 관봉 석불좌상은 제작년대 추정에 많은 혼란이 있었던 불상이다. 갓으로 불리는 천판이 있는데다, 굳게 다물어진 입술로 인한 괴기성으로 고려시대 불상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러나 천판이 후대에 보강된 부재임이 확인되고, 전체적인 균형과 비례가 석굴암 본존불의 아형으로 시대가 멀리 떨어지지 않으며, 나발이 없는 소발 형식과 상현좌 등 고식이 남아있어 8 또는 9세기 작품으로 최종 판가름이 난 거 같다... 나 역시 같은 이유로 800년 전후 작품이라 생각을 고쳤는데(석굴암 조성 이후 대구쪽 경영이 한창이던 780년 전후가 더 맞다고 생각한다), 또 한가지 석불좌상으로서 특이한 점은 몸체의 옷주름이 선각에 가깝게 표현한 조식이다. 이는 조각보다 마애불의 특성이 강한 요소이며, 그런 의도와 의지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체보다 큰 비중의 상체는 석공의 한계라기보다 관람자의 시선을 감안한 고도의 장치라고 나는 평가한다...

 

 

 

<경주 월성 골굴암 마애여래좌상/보물 581호/880년 경/통일신라...>

이 불상이 통일신라가 만든 석불좌상 중 마지막으로 상현좌 양식을 계승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불상 아래쪽이 많이 훼손되어 전체적인 윤곽은 확인할 수 없지만, 좌대를 완전히 덮을 정도로 길게 옷주름이 내려왔다... 800년대 이전 작품들에 비해 많이 경직된 자세에 도식화된 옷주름으로 표현하였는데, 개인적으로는 통일신라 이전 신라 고유의 추상성이 발현된 고유의 형태가 아닐까 생각된다.

 

즉 선각으로 처리한 하체, 중부조의 상체, 환조에 가까운 고부조의 두상도 그렇고, 거칠고 단조로워 자연스럽지 않게 처리한 옷주름 등은 개념화에 능숙하고 보수성과 소박한 자연주의 성향이 강했던 신라인들의 특징이 그대로 구현된 것이라 생각하는데, 결국 삼국통일의 긴장감이 사라진 이후 원점으로 회귀한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남원 신계리 마애여래좌상/보물 423/930년 전후/라말려초...>

골굴암을 통일신라의 마지막 상현좌라 표현했지만, 후삼국부터 고려시대 초기까지 범위를 넓혀보면 상현좌 양식으로 조형된 석불이 2기 더 있으니 하나가 월출산 마애여래좌상(국보144, 아직 보질 못했다...ㅠㅠ)이고, 또 한기가 바로 남원 신계리 마애여래좌상이다. 통일신라 5소경 중 하나인 남원경은, 대부분 5소경처럼 각 지방 문물이 집적된 문화의 보고이며, 신계리 마애여래좌상은 만복사, 용담사 석불 등과 함께 최고의 보물 중 하나다.

 

엄청난 공력이 투여되는 환조에 가까운 고부조에 백제불상의 유행을 계승한 연판식 두광과 간략화된 연화문(영기문), 그리고 구슬무늬의 독창적인 광배문양 등 어디하나 빠지지 않는 신계리 마애불은 묘한 수인으로도 유명한데(장항리 석불은 새끼손가락이, 신계리는 검지손가락이...), 이 불상 역시 상현좌 양식이다. 모든 설명과 안내문에는 고려초기라 적시하고 있지만 나는 견훤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던 후삼국, 통일신라 말기로 본다... 

   

 

 

 

<경주 석굴암 본존불/국보 24호/770년/통일신라...>

그러면 지금까지 통일신라인들이 상현좌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승 소화했는지 살펴봤다면, 이제 700년대 중반 이후부터 하체를 덮었던 옷자락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그 단초가 석굴암 본존불에 있다고 생각된다... 즉 석불의 규모가 커져, 석불과 좌대를 하나의 바위로 조각하지 못하면서 상현좌를 그대로 표현하기엔 한계가 많았을 터. 결국 가부좌로 교차하는 양발목 사이에 옷주름을 모아서 단순화시켰는데, 물론 중국의 사례가 없진 않지만 이를 받아들인 건 역시 개념화와 추상화, 단순화에 강했던 신라인들의 기질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원주 출토 석조비로자나불좌상/850년 경/통일신라/춘천박물관...>

이 모습을 위에서 잡은 것인데, 역시 옷주름이 가운데에 단정하지만 세련되게 모아져 있다...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이 별석으로 조각되고, 여기에 불상까지 따로 제작되어 적층했던 이 시기에 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800년대 후반으로 내려가면 이런 양식의 옷주름도 생략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그렇게 상현좌는 잊혀지게 된다...

 

그러면 우리나라 불상 조형의 최초 형태이면서 고식으로 400여년간 전승된 상현좌 양식은 영원히 사라지게 될까? 고려와 조선시대로 내려와서도 상현좌는 드물게 등장하는데, 석불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고 종이로 만든 지불 또는 건칠불에서 나타난다.

 

 

    

<강릉 낙산사 원통전 관세음보살좌상/보물 1362호/1130년 전후/지불/고려...>

정교하게 장엄된 보관에 대비될 화려하고 세련된 주름이 대좌를 덮은 상현좌 양식이다... 석조, 철조, 소조, 목조와 달리 표현이 자유로웠던 종이의 특성이 있겠지만, 상현좌는 소재만의 문제는 아니지 않았을까 싶다...

 

 

 

<경주 기림사 건칠보살반가상/보물 415호/1501년/조선...>

진흙으로 속을 만들어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가루를 발라 묻힌 다음 속을 빼어버린 건칠불(乾漆佛), 목조대좌 위에 반가상으로 조형한 조선 연산군 시대 불상이다... 반가상이라는 특성도 있지만 조선시대에도 상현좌는 전승되었다...

   


<법주사에서...> 

 

현대에 들어오면 더이상 상현좌를 찾기는 쉽지 않다. 다만 반가상에서는 여전히 그 양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오늘날 불상조형에서도 우리의 고식이 적극 활용됐으면 훨씬 풍부해지지 않을까 싶어 법주사와 용인 와우정사의 반가상을 소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