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사지(靈岩寺址)


 

<합천군 영암사지...>



1.

볕이 쏟아지던 어느날,

맘이 휑했던 어느날.

그날도 나는 탑을 찾았구나.

 

육중한 바위들이 비켜선 적막한 대지,

층층이 쌓아올린 무심한 손길 위로,

허허로운 빈공간과 금빛 햇살...

 


빈틈없는 석축과, 탄탄한 기품의 석탑,

허허실실 채움도 비움도 없는 적당한 석등이

쏟아진 겨울 빛살을 무심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올 때마다 자꾸 쪼개지고 나눠지는 영암사지...

그게 예전의 모습이었을까?

이건 처음, 그대로의 공간구획이었을까?

 


물론 석축과 석탑, 석등으로 시작했겠지만,

어느 순간이 진짜 靈岩寺, 완성된 영암사지였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생기로 채워지고 약속이 넘치던 그 때, 그는 왜 이 곳을 택했을까?...

 

 

 

2. 


무엇을 그리려 했을까?

그녀는 무엇을 담으려 했을까?

한참을 거닐고 뜯어봐도 채워지지 않는 저 층급과 공간들...

 

<합천 영암사지 삼층석탑/보물 480호/3.8m...>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보물 353호/2.3m...>


튼실하다고하나 중후하지 않는 삼층석탑과

곱게 단장했으나 화려하다 볼 수 없는 쌍사자석등만으로는,

이 다양한 공간과 어지러운 조화를 포용할 수도, 꽃 피울 수도 없었을 터...

 


누구도 넘지못할 거친 기암괴석과,

자신의 마음마저 가둘만한 정교한 석축은,

채우고 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막고 끊기 위한 장치들이 아니었을까?...

 

<영암사지 석등과 석탑이 바라 보는 곳...>


석등이 불 밝히는 이곳과, 석탑이 바라보는 저곳을 곱씹어 봐도

영암사지는 대지를 굽어보지 않고, 하늘을 품지도 않았다.

바람은 스쳐지나가고 물은 머무르지 않는다.

 

 


깎아지른 듯 우뚝 솟은 봉우리가 답답해 보이지 않지만,

좁지 않은 黃梅山자락, 햇살을 품은 대지는 마냥 평화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시선이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굳어버린 마음만 고여 있기 때문이다.

 

<영암사지 위쪽에서 바라본 대기저수지 방향... 나는 이런 조망/전망을 원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애초부터 이 공간은 나아가기 위해 만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 공간은 채우기 위해 만들지 않았다.

오로지 물러나고, 돌이켜보고, 스스로 죽이기 위해 만든 공간이었을지 모른다.


  

 

 

3.

 

모든 게 정지된 공간, 모든 걸 잊어버린 시간,

그는 무엇으로 이 공간을 완성했을까?

그녀는 무엇으로 自然과 인간들의 정성,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묶어냈을까?

 


혹 이만한 木塔이 있었다면 그는 만족했을까?

병풍처럼 공간을 호위하는 황매산자락을 넘지 않고,

층층겹겹 공간을 떠받치는 넓은 석축에 조응할만한 높이의 목탑이면?

 

<어설픈 작업이지만, 영암사지에 목탑 하나 세워봤다... 당나라풍에 가까운 기름진 황룡사목탑 미감보다, 백제의 미감이 살아있는 법륭사 오중탑을... 삼층, 칠층, 구층보다 왠지 영암사지엔 오층목탑이 더 어울렸을 거 같다는 생각도...^^>



하늘이 열리는 동쪽을 향한 영암사지는 그렇게 높게 완성됐으리라.

석조가 새롭게 발굴된 北院, 두기의 귀부가 지켜선 南院 한가운데,

삶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을 좌우에 거느린 神聖의 공간 정점에 선 우주목...

 

 

<안내판에 명기된 ①서금당지와  ⑪건물지 7동/축대(이제 발굴되고 있는 곳) 쪽을 나는 각각 南院과 北院으로 불렀다... 영암사지가 남향이었다면 안내판이 맞겠지만, 내 눈에 영암사지는 완벽한 동향이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영암사지를 접한 게 2차발굴 전후시점... 그 후로 많이 변했다...^^>

<영암사지 가람배치... 동향이다...^^ 나는 ⑪당간지주와 석조가 발굴된 북쪽을 생활의 공간, ①귀부 2기가 안치된 남쪽을 죽음의 공간이라 불렀는데, 여전히 수수께끼인 점은 왜 죽음의 공간이 아래쪽(남쪽)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내가 금당지를 목탑으로 보는 가장 큰 이유는 ; 정방형 구조, 4면 모두에 계단이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 주요했다...> 

<금당지 발굴 실측도... 주춧돌 배치로보면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금당 중앙 전후에 신방목을 받치던 신방석이 있으며, 내부 고주는 법륭사 오중탑이나 팔상전처럼 등간격으로 배치되어 불상도 금당/목탑 정중앙에 배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불상 주변엔 3면에만 벽체가 있었을 거 같은데, 이런 격벽 구조였다면 우리에겐 매우 낯선 구조였을 듯(법륭사 오중탑 내부구조를 생각해 보시길) 싶다... 조성시기는 800년대 중반(830~860년) 쯤... >

<4면 계단은 화려한 문양의 조각 난간들이 존재했던 것으로...>

<금당 한가운데에는 석불이 안치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입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사진 우측 - 지대석 혹은 기대석 측면에도 아름다운 조각(공양상)들로 치장되어 있다...> 

<금당/목탑 기단부 모서리는 석탑 기단부 갑석(청량사지 삼층석탑을 상상)처럼 반전이 살아있다... 멋있지? ^^> 



우람한 기암괴석-암봉을 떠받치는 엄정한 짜임새의 인공석축과,

장중한 황매산에 곱게 자리한 단아한 석탑과 석등,

그리고 모든 기운이 돌로 채워진 이곳에 고고하게 솟아오른 연꽃하나 - 목탑.

 


모든 것이 완성되던 마지막 정점의 순간,

더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않은 그 공간에 목탑을 세워본다.

이만한 높이와 크기의 목탑 한기 꽂아놓고 영암사지를 다시 그려본다.

 

 


4. 

 


장엄하지만 군림하지 않은 석축은 세상에서 물러난 선언이었을지 모른다.

정성스럽지만 카리스마가 없는 석탑과 석등은 스스로의 절제였을지 모른다.

비대칭-무작위로 쪼개진 층급과 공간들은 단절된 관계를 위한 소심한 위로였을지도...

 


그렇게 한층한층 쌓아올린 층급과, 한단한단 깍아내린 공간들...

자랑하지도 체념하지도 않은 성실한 습관으로 만들어간 돌로 만든 왕궁-자신만의 왕국.

그렇게 멈춰선 시간과 관조하는 마음이 영암사지를 일궈냈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고

그래도 비워지지 않겠지만,

그래서 완성되고, 그렇게 머무를 수 있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보이는 게 없어 시선을 잃어버린 영암사지,

잘게잘게 쪼개져 맘 붙일 곳을 찾지 못한 영암사지,

나는 그곳을 무심한 마음으로 엿보고 있다.

 


흉내내기 어려운 기품을 갖추고도 자극적이 않아 생동감을 놓아버린 공간.

그래서 찬란하지만 쓸쓸한 영암사지.

석축, 석등, 석탑... 하나하나의 정성만 담아오기에 너무 허허로운 공간이다.










* 늘처음님이 말씀하셨던 영암사지, 그리고 물으셨던 영암사지의 목탑... 그 때 갔었는데, 이제 올립니다...ㅉㅉ

* 애초 생각은 영암사지의 모든 걸 사진으로 담기 위해 준비 했었는데, 1년이 더 지나서 느낌만 담습니다...ㅠ

* 영암사지까지 지금의 제마음을 그대로 투영한...쩝... 아직 도깨비에서 헤어나지 못해 시작도 끝도 도깨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