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된 글이다... 올린지도 오래됐고...

* 조선 유학을 생각하다가 문득 르네상스가 떠 올랐고,

  르네상스를 정리하려면 칭기스칸에 대해 미리 검토할 필요가 있어서...^^

* 기존 올린 글에 문단별 소제목만 추가 한다.

* 줄 간격도 조금 띄우고... 070919

 

 

 

 

1. <칭기스칸>을 읽고... 0506


2. 나의 책 읽기

3. 칭기스칸 - 잠든 유럽을 깨우다?

4. 몽골비사 - 역사해석과 문자의 단절

5. 몽골제국과 유럽의 변화

6. 유목민 칭기스칸, 최후의 부족국가 몽골제국

7. 야만과 폭력의 대명사 - 타타르

8. 전쟁의 목적 - 문명과 유목의 결합

9. 칭키스칸의 출발 - 군사력

10. 나라를 정복한다는 것 - 전쟁의 목적

11. 몽골제국의 쇠퇴

12. 페스트 - 소통의 단절

13. 칭기스칸

14. 칭기스칸 - 근대세계를 열다.


책 한권을 읽었다...

간만에 느끼는 뿌듯함...

작은 성취에 만족해하는 小我의 자족일지

아니면 넓혀진 지적영역의 확대가 만들어 주는 새로운 긴장감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좋은 기분이다...

<칭기스칸과 몽골제국>에 대한 책이었다...


얼마 전 생일...

막내에게서 선물을 받았다... 물론 책 선물...

<신화보다 아름다운 그리스, 이두영, 영진>

-이 책은 내가 원했던 것 같다... 사진 때문이었을 것...-

<문화의 수수께끼, 마빈해리스 / 박종렬, 한길사>

그리고 <칭기스칸, 잭웨더포드 / 정영목, 사계절>


서점에서 한 시간 동안 골랐다는 정성에 감동했다...

단, 칭기스칸은 이미 역자인 빵형에게서 이미 받았는데...^^

그리고 이미 그때쯤부터 이 책은 내 책상 혹은 화장실,

차 뒷좌석에서 뒹굴고 있었고...




2-1. 나의 책 읽기


서점에 안 간지 꽤 됐다...

학교 다닐 때는 하루에 한번 이상은 서점에 있었던 것 같다...

책을 좋아해서? ㅎㅎㅎ

그보다는 약속하기 가장 편한 곳이 서점이었기 때문이다.

돈 안 들고, 기다리는 시간 아끼고, 그리고 늘 새로웠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어떻게 책을 골랐을까?

당시의 독서 범위라는 게 아무래도 <사회과학> 쪽이었고

선배와 동료들의 추천이 중심이었겠지만

한해가 지나고 나서는 책제목과 지은이와 옮긴이의 후감이

책선정의 주요한 지표였을 것 같다.


두해가 지나서는 서점의 대부분 사회과학 책을 건들었으므로

사야할 책과 알아둘 책이 쉽게 구별이 됐었고...^^


그 후 한동안 책과 멀어지면서 책을 고르는 관점도 바뀌게 된다...

경제학, 철학관련 분야들에서 논문 성격의 깊이를 쫓지 못하고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보거나

진보적 관점은 유지하되 대중적이거나 쟁점위주로 바뀌었다...


역사와 세계사 분야도 정치경제학 관련의 학문적 성격에서 벗어나

살을 붙이는 문화인류학적 관점의 폭을 원하게 되고

각각의 독자성과 특수성을 쫓는 비교적 관점과 완결성 지향이 완화되고

시, 공간의 영향력과 관계위주로 바뀌었다...


그리고 새로운 분야가 추가되었는데 아마도 예술과 문학 분야일 듯싶다.

포스트 모던과 해체주의, 복잡계 이론의 활성화에 따른 간학문의 공격적 접근으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는 객관적인 조건이 이루어졌고

뼈와 원칙만 남은 나의 학문적 체계에 포근한 살과 이야기가 필요했고

그리고 열린 관계, 안목 있는 선택, 지금보다 나은 ???으로 정립한 나의 가치관에도

예술과 문학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결국 90년대 넘어와서는 學을 위한 독서에서 나를 위한 책읽기로 바뀌었다...



2-2. 


게다가 묶인 시간이 많아지고

책보다는 신문과 영상물에 많은 시간이 투자되고

경력과 사람관계를 위주로 생활하면서

나의 책읽기의 변화는 책 고르는 방법도 바뀌게 만들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요점 정리가 되고, 편한 책들을 택하게 되고

사진과 그림이 많은 책에 안도하고

이러한 게으름은 결국 발품을 판 시간투자보다는

지인에 의해 소개된 책들이 앞에 놓이게 되고...

내게 들어온 책들 읽기에 바빠지고...

그리고 지은이나 옮긴이를 먼저 찾아보는

매우 보수적이고 수동적으로 바뀐 것이다.


한 가지 더...

되도록 성의 있게 만든 책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예전처럼 글씨만 보관한 책이나

글짜로만 꽉 찬 책이 가볍게 보이고

형식보다 내용? 목적의식에 철저한 책보다는

형식과 편집과 문체에 성실한 책에 손이 먼저 간다...


디자인 시대? 물론 편집과 제목이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분명 겉모습과 느낌도 책 고르는 척도의 하나가 되었다...



2-3.


이렇게 길게 서론을 시작한 이유?

이번에 읽은 칭기스칸이 위의 대부분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선물 받은 책이고(그것도 두 권씩이나...)

옮긴이를 잘 알고

논문 스타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설도 아니고...


역사와 문화와 경세가 혼재되어 있는

메모식의 서술방식을 가진

사건의 영향력을 비교적 광범위하고 세계적인 차원에서 접근한

새로운 지적 자극으로 호기심을 충족하기에 충분한 책이었다.



약간의 불만이 있다면

논문이 아니면서도 무미건조하고

적지 않은 두께와 메모식 서술로

책 읽는 속도와 분량이 부담스러웠다는 점...


그리고 소설이나 위인전이 아니면서도 인물위주로 접근했으며

자신의 주장에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체 결론을 선행시켰고

준비했던 시간적 범위(13세기)를 벗어나서는 비약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점 등이다...


이젠 책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실 워낙 방대한 내용을 가진 책을 후감으로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다...

또한 내가 정리하고자 하는 것도 요약이나 메모를 포함한 후감이어야 하고...

먼저 저자의 의도부터 살펴볼까?




3. 칭기스칸 - 잠든 유럽을 깨우다?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면서 일관되게 강조한 내용이 있다.

하나는 아시아와 몽골, 그리고 칭기스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벗기기>다...

사실과 진실을 추적하여 왜곡된 이미지와 편견을 벗기고자 칼을 든 느낌이다.

소위 야만인, 호전적인, 그리고 파괴자, 정복자, 압제자로 불리 우는

칭기스칸과 몽골인, 그리고 아시아인에 대한

악의 화신이란 이미지를 벗기고자 객관적 근거를 비교한다.


또 하나는 원 제목인 <근대세계를 열었던 몽골과 칭기스칸의 역할 복원>이다...

저자는 역서의 부제인 잠든 유럽을 깨운 칭기스칸을 복원한 게 아니라

지폐의 융통과 국제무역, 독자적인 문명의 보존,

동서양 지식의 융합을 통한 농업과 의학의 발달,

역법, 수학, 역사, 인쇄술의 발달을 통한 인간지적 능력의 고양 등을

종교에 대한 국가의 우위, 종교의 자유, 치외법권, 국제법 통용에 이르기까지

근대세계를 연 칭기스칸의 힘을 폭넓게 조명하였다...


1620년 프랜시스 베이컨의 인식처럼 칭기스칸과 몽골의 정복활동은

종이와 인쇄술, 화약, 나침반을 유럽에 보급시켰으며

이는 근대세계의 발판이 된 과학기술의 혁신적 결과물이었고

첫째는 문학, 두 번째는 전쟁, 마지막 항해에서

전 세계의 양상과 상황을 바꾸어 놓았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몽골제국의 흥망성쇠의 결과는 유럽의 르네상스였다는 지적이다...


형! “잠든 유럽을 깨우다”는 부제는 잘 못된 거 아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식된 칭기스칸에 대한 광고용 카피...

이를 반영한 출판사의 수준 아니겠어?

원 부제인 “근대 세계를 열다” 너무 멋있지 않냐?

ㅎㅎ 옮긴이와 대화에서 느끼는 이 책의 무게다...




4. 몽골비사 - 역사해석과 문자의 단절


나에게 몽골제국의 객관적 평가가 현 시기에 왜 필요할까?

과연 칭기스칸이 개인적 비극과 고난을 극복한 영웅으로 만족될 수 있을까?

지도력과 조직력을 갖춘 CEO로서만 재평가되어야 하는가?


그도 아니면 변방의 치기어린 정보에 현혹되어

몽골과 아시아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재정립하고

비주류의 새로운 주장을 전파하는 전도사로 만족해야 할까?

책을 읽으면서 시작된 나의 지적지도는 사실 상당히 넓어졌다...


저자의 말처럼 몽골비사라는 책이 재발견되기 전까지

칭기스칸과 몽골제국의 전모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을지 모른다.

언어와 문자가 단절된 대부분의 과거사와

승자들에 의해 재단되고 재평가되는 패자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현재의 세계는 두 개의 고대문명만 인정하는지 모른다.

유럽과 중국...

팍스아메리카나를 주도하는 미국 역시 유럽의 적자에 다름 아니고...

유럽은 신화와 유적과 문명으로 그리스와 로마를 복원하였고

세계의 백색공장, 미국을 상대할 유일한 잠재력으로 인정받는 중국은

고대문명 중 유일하게 문자를 상속받았다.

5000년 된 문자를 쓰는 유일한 문명국이다.


우리가 애써 무시하고 혹은 경쟁상대로 혹은 복수의 상대로 생각하는 일본...

그들이 대접받는 것은 단지 세계 2위의 경제력만이 아니다...

18~19세기 유럽의 문예를 자극한 건 일본이었고

일본의 정신세계는 유럽과 현대의 미국에 새로운 영감을 주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이미 8~11세기부터 존재한 문자가 이어져 왔고

문화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은 결코 타국과 타민족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


문명과 유적 외에 문자의 힘은 그렇게 강하다...



수많은 문명과 문화의 단절은 단지 지배세력의 거세에만 있지 않다.

문자의 소멸은 정신의 단절을,

그리고 잠재력과 미래를 위한 꿈이 배양될 자궁을 잃게 만든다...

이집트의 역사, 메소포타미아, 인도 등의 고대 문명이 그러했고,

마야, 아스텍, 잉카, 앙코르와트 등 중세문명도 그렇게 사라졌다...


리그베다의 발견과 재해석으로 인도의 고대문명이 하나하나 밝혀지듯이

몽골비사란 잊혀진 문서와 역사는

칭기스칸을 재해석하는 열쇠로 저자와 우리를 잊혀진 몽골제국으로 인도한다.


독일의 랑케처럼 “본래 그것이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를 진술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인과와 전후관계의 재해석으로 사실 간의 연관성을 기록한 헤로도토스의 역사관에 따라

EH 카아의 말처럼 저자는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의 사실을 서술”했다.




5. 몽골제국과 유럽의 변화


얼마전 <술탄 살라딘>을 읽으면서 했던 말이 있다...

이슬람의 중심은 십자군 전쟁을 중심으로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집트로 옮겨왔다고...

그 배후의 원인은 바로 몽골제국의 서진과 일 칸국의 성립 때문이었다.


그 당시 인류사의 가장 높은 문명과 부와 과학을 가진 셀주크 투르크의 이슬람 문명은

동서로마로 갈라지면서  쇠망의 길로 들어선 로마의 쇠퇴처럼

이집트로 그 중심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유럽의 십자군 전쟁도 몽골의 유럽원정과 킵착 칸국의 성립으로

흑해와 카스피해가 막히면서 막을 내린다...

11세기부터 시작된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도시의 발달로 시작된 유럽의 팽창은

십자군 운동으로 그 영역을 이베리아 반도와 지중해로 넓히면서 정점에 이르지만

몽골제국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서서히 봉건제도의 붕괴를 맞게 된다...


몽골이 유럽원정을 멈춘 이유는 군사력과 전술, 무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저자의 말처럼 몽골기병이 움직일 만큼 대지의 조건이 좋지 않았다는 점도 있지만

이슬람이나 중국만큼의 부를 유럽은 가지고 있지 못했으며

과학과 기술과 대중문화를 유럽은 가지지 못 할 만큼 척박했다...

몽골제국에게 약탈당할만한 그 어떤 것을 유럽은 갖지 못했다는 말이다.


전화위복?

몽골이 진출한 만큼만 상처받은 유럽은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시간과 과학기술을 전수받는다...

르네상스와 자본주의의 태동이다...


라틴족이 중심이 된 고대사회가 게르만이 중심이 된 중세사회로 넘어오고

비잔틴제국과 교황, 그리고 서유럽 중심으로 발달하던 유럽이 이제는

중앙집권 국가를 설립한 프랑스와 영국중심으로 변화한다. 

근대사회로 이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씨앗을 유럽은 몽골제국으로부터 전수받는다(?)




6. 유목민 칭기스칸, 최후의 부족국가 몽골제국


칭기스칸과 몽골제국의 영향력은 유럽과 이슬람, 그리고 아시아의 모든 것...

그 당시 전 세계 인류 대부분의 문명지도를 바꾸었다...

조금 더 크게 접근하면...


인류의 시작은 수렵과 채집인가?

그렇다면 문명의 시작은 농경과 정주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직립보행과 도구를 사용한 인류의 첫 번째 혁명은 농업혁명이다...


문명, 문화와 동의어인 정주, 정착은 모두 강에서 시작한다.

나일강, 황하/양쯔강, 유프라테스/티그리스, 인더스/갠지즈강...

자급자족의 농업은 드디어 도시생활을 만들고...

고대문명을 꽃피운 그리스/로마도 강과 농업을 벗어나지 않는다.


단지 지속적인 노예 수급을 위한 대규모의 점령전쟁과

강보다 범위가 확대된 지중해를 중심으로 발전한다.

카스피해, 흑해, 아랄해 처럼 해일과 태풍이 없는 호수 같은 바다...

굳이 나침반과 해양기술의 도움 없이도 지중해는 경영되었고

지속적인 노예의 수급이 끊어지면서 로마제국도 노쇠화 된다.



농업혁명이 이룬 모든 문명을 뒤바꾼 것은 부족국가이면서 유목민인 몽골제국이었다.

아프리카만한 면적의 동서 8,000km, 경도로 100도가 넘는 지역을 몽골제국은 다스렸다.

최대 100만명 인구와, 10만 군대로 오늘날 인구의 절반이 넘는 범위를

몽골제국은 점령하고 경영하였다...


시베리아에서 인도의 뜨거운 평원까지, 베트남의 논에서 헝가리의 밀밭까지,

고려에서 발칸제국까지...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 모든 사람과  땅의 통치자가 되려했던 칭기스칸은

태평양에서 지중해까지 육지로 확대될 수 있는 최대한의 범위를,

로마군이 400년 동안 정복한 것보다 많은 땅과 사람을 몽골군은 25년 만에 정복했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의 정치적 국제적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는데,

황하와 양쯔강에 머물던 영토를 확장하여 오늘날 중국에 물려준 것은 몽골제국이며,

중국의 정치적 중심지인 북경은 원나라가 만든 몽골제국의 수도였다.


키예프공국과 여러 슬라브족을 묶어서 만든 킵착칸국은 러시아가 되었고,

몽골을 가리키는 페르시아 말인 무굴제국은 인도에서 1857년까지 이어졌고

칭기스칸의 후손이자 그의 마지막 칸들은 1944년 아프카니스탄에서 숨을 거두었다. 



오늘날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세계사의 진정한 의미는

15세기 지리상의 발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이전까지 자신의 문명권을 세계와 일치시켰던 인식을

지구적 차원으로 전환시킨 첫 번째 사건을 콜럼부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으로 꼽는다.


그러나 <콜럼부스>의 항해목적도 대칸의 나라 카타이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의 항해안내서는 <마르코 폴로>의 몽골여행기였고

그가 상륙한 쿠바에서 만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붙인 인디언도

몽골의 남쪽에 자리 잡은 인도인이라 판단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미 13세기, 세계사의 시작은 몽골제국으로부터 시작했다.


자유무역과 국제법, 지폐의 도입과 문맹을 없애기 위한 초등학교, 역법과 만세력,

지도의 수집과 지구의, 상업과 외교를 위한 아프리카 탐사...

과학기술, 전쟁, 의복, 상업, 음식, 예술, 문학, 음악이 바뀌었다...


불과 150여년에 걸친 기간 동안 농업이 만든 모든 문명을

세계화시키고 근대화시킨 그 출발에 유목민 칭기스칸과

최후의 부족국가 몽골제국이 위치한다.




7. 야만과 폭력의 대명사 - 타타르


그러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의문이 남는다.

하나는 이처럼 인류사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남긴 몽골제국이 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가?

그리고 왜 몽골제국은 사라졌을까?


2000년을 맞이하면서 미국의 <라이프>지를 비롯한 수많은 석학들은

지난 천 년 간의 가장 위대한 인물 뽑기에 많은 시간과 지면을 할애했다.

물론 2차 대전을 비롯한 20세기의 사건들과

미국과 서구유럽, 그리고 기독교 문명이 대부분을 이루었지만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은 그 첫 번째는 칭기스칸이었다...

또한 꼭 여기까지가 그들의 칭기스칸과 몽골제국에 대한 평가의 전부였다.


르네상스 시대 작가와 탐험가들에게 찬사와 동경과 환상을 심어준 칭기스칸은

몽테스키외, 볼테르를 비롯한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자들로부터 시작하여

민족과 인종을 백과사전식으로 정리하기 시작한 19세기에 들어와 고착되면서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짧은 기간 만에 야만과 폭력의 대명사로 우리의 인식을 길들였다.



그리스 신화 하데스의 가장 낮은 동굴인 타르타로스는 지옥을 가르킨다.

티탄족이 신들의 전쟁을 일으킨 뒤 저주를 받아 내려간 곳인 타르타로스가

몽골인을 표현하는 타타르가 되었다.


사탄의 종족이며 파괴자로 낙인찍힌 타타르는 아시아를 대변하게 되고

그 무지와 공포만큼 몽골인은 평가절하 되고 하급인종으로 낙인찍혀

20세기를 맞이하였고,

설상가상,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는 몽골제국의 과거를 철저히 묻어버렸다.


몽골제국이 존중하던 기독교도와

자신들의 영토에 존재하는 정치세력에 의해 두 번 해체된 것이다.


불교와 도교의 기반위에 기독교도가 중심이 되어 이슬람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고

종교와 국가를 분리하여 종교의 자유를 장려하고

신분과 계급을 무시하고 기술과 능력을 위주로 인재를 선발한 몽골제국을

야만적 독재와 처참한 미개상태로 낙인찍은 이들은 서유럽 기독교인들이었다.




8. 전쟁의 목적 - 문명과 유목의 결합


이러한 이유는 첫째, 무지가 컸지만

유럽원정에 나선 몽골군에 대한 게르만과 슬라브족의 철저한 군사적 패배에 기인한다.

그 열등감만큼의 공포가 사탄의 이미지를 조작했다.


유럽을 비롯한 정주문명/농업경제/도시문화의 전쟁은

공격하는 장소의 점령이 승리의 관건이다.

그러나 유목민인 칭기스칸에게 전쟁의 승리는 적을 죽이는 것이다.

그만큼 잔인함과 폭력성을 바라보는 차이가 있다.


몽골군은 잔인했다.

그러나 문명화된 군대가 자행하는 폭력성에 비해 몽골군은 잔인하지 않았다.

몽골군의 공포는 특별한 잔인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정복이 매우 빠르고 능률적이었으며

부자나 귀족, 권력자의 목숨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몽골군과 칭기스칸이 만든 불패의 신화가 유럽인이 느끼는 잔인한 공포였던 것이다.



두 번째는 칭기스칸의 후손을 자처한 투르크족 티무르의 폭력성에 근원을 둘 수도 있다.

(같은 투르크 전사출신의 술탄 살라딘은 포용력과 지도력,

군사력에 기초한 외교력으로 십자군 전쟁을 끝내고 성지를 회복했는데 반해서...)

가장 최근의 피해의식이, 오래되고 객관적인 영향력을 가리고

허상으로 진실을 가리는 또 다른 신화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몽골인과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또다시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었던

유대인에 대한 오랜 반감도 한 몫하고...

(상업과 화폐운용에 강한 유대인들에 대한

기독교도와 서유럽인의 인종적 반감은 참으로 오랜 악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칭기스칸에게 전쟁의 목적은

몽골식의 “약탈과 폭력이 없는 평화”를 위해서였다...^^

태생에서부터 그의 가정사까지 점철된 그 부족들의 비극적 약탈전쟁에 대한 기억은

자신의 보호 하에 들어온 백성들에게는 최대한의 안정과 자유를 보장하였고

외부로부터의 폭력과 약탈로부터도 철저히 보호하는 평화였다.


그의 폭력과 잔인함은 몽골을 무시하고 배반하며

신분계급에 의탁한 무능한 권력자에게만 적용되었다.

그는 정복민들에게 종교를 강압하지 않았고, 문화를 바꾸지 않았으며

체제와 정서를 존중했다.

칭기스칸은 “호수 건너편에서 정복한 사람들을 호수 건너편에서 통치했다”


그나마 20세기 초반 칭기스칸을 재평가하는데 앞장선 사람은

영국에서 교육받고 인도독립운동과 제3세계 운동에 앞장선 <네루>다.

알렉산더와 카이사르를 칭기스칸에 비교했던 네루는, 한 차원 높은 지적을 한다.

“칭기스칸의 구상은 문명과 유목 생활을 결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았고, 지금도 가능하지 않다”




9. 칭키스칸의 출발 - 군사력


그러면 몽골제국은 왜 사라졌는가?

우리는 이 문제에 답하기 이전에

몽골제국이 어떤 힘을 가지고 등장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테무진에게는 “발주나 맹약”을 서약한 19명의 친구가 있었다.

19명이 그의 가족의 전부였고, 군대의 전부였고, 추종자의 전부였다.

그들 중 몽골씨족은 테무진 형제뿐이었고, 무슬림과 기독교도와 불교도가 있었다.


오직 테무진에 대한 헌신과 서로간의 서약을 통해 결합된 결사체가 탄생한다.

친족관계, 인종, 종교를 초월한 개인적 선택과 헌신에 기초한 근대적 시민 결사체...

이들은 3년 후 모든 몽골부족을 통일하고 테무진은 스스로 칭기스칸의 칭호를 부여한다.

여기에서 칭기스칸과 몽골제국의 신화는 탄생한다...



신분을 뛰어넘는 능력위주의 인재선발,

공동체의 결의에 기초한 수평적 조직력,

그리고 기동력과 화력을 갖춘 월등한 군사력...


게다가 점령한 모든 문명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무궁한 포용력과

물자와 사람의 적극적인 유통으로 넘치는 생동감...

그리고 이를 배치하고 통제할 수 있는 지도력...


그러나 이 같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성공의 원칙을 논하기 이전에 짚을게 있다.

몽골제국의 등장은 한마디로 뛰어난 군사력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의 민족은 외부 물자의 꾸준한 유입만이 유일한 생존수단이다.


결국 유목민에게 전쟁은 일종의 생산활동이며 생산수단이다.

전사에게 전쟁이란 성공과 부를 의미한다.

몽골제국의 구성원들은 모두가 전사로서 성공과 부를 가져야만 했다.




10. 나라를 정복한다는 것 - 전쟁의 목적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는 <이순신>의 연전연승과 학익진 등은 화력에 근거한다.

화살은 소총보다 약하지만, 조선의 대포는 일본군의 화포보다 사정거리보다 길었다.

굳이 근접전 없이 적의 방어선에 들어서지 않고,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면서 적을 궤멸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과의 전쟁에 승리한 이순신은 정치에서 패배한다.

 

프랑스 혁명을 전 유럽에 전파하며 전쟁과 전술의 개념을 바꾼 <나폴레옹>...

군사들의 근접전과 보병 배치에 익숙한 당시의 유럽군에 비해

포병과 기동성을 갖춘 프랑스 군은 자유로웠다.

화력에 기초한 진지전과 기동성 있는 운영은 오스트리아나 러시아에 비해 월등했다.

그러나 대륙전쟁에 승리한 나폴레온은 영국과의 해전에서, 러시아의 날씨에서 패배한다.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뒤늦게 제국주의로 뛰어든 독일...

독일을 대표하는 한마디는 <전차군단>이다.

부대의 전투가 아닌, 무한한 전선에서의 전쟁을 주도하고

탱크의 방어력과 기동력을 가동하여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는 전격전의 등장...

초기의 전투에서 승리한 독일은 총력 동원체제의 피로현상과

군수물자의 생산력에서 연합군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칭기스칸도 부하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죽을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몽골군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은 전략적 목표였다.

화력에 기초한 아군의 보호...

이순신과의 동질성중 하나다.


또한 칭기스칸은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군대를 정복하는 것과 다르다고 말한다.

군대는 전술과 전력만 우월하면 정복할 수 있지만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정복할 수 있다고 자식들에게 가르쳤다.

몽골제국은 하나지만 신민(백성)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나폴레온이나 독일과의 근본적인 차이다.


그리고 칭기스칸은 이순신처럼 정치에서 패배하지 않았고

나폴레온처럼 날씨에 굴복하지도 않고 승리의 조건으로 바꿀 줄 아는 지혜도 있었다.


월등한 화력과 과학기술이 뒷받침 된 전쟁 무기...

기병의 빠른 기동력과 정보전달체제에 근거한 전선의 확대능력과 기습적인 요새점령...

그리고 심리전과 공동체의 총동원에 근간한 정신적인 무장...

이순신의 화력, 나폴레온의 진지전과 기동력, 독일군의 전격전과 총동원체제...

현대전에서나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전쟁의 기법을 몽골군은 이미 자유롭게 활용하였다.

(오히려 20세기 이후의 전쟁에 대한 전략 전술은 몽골이 이바지한 바 크다.)



유목민에게 정복이란 땅을 차지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칭기스칸에게 정복이란 어떤 나라를 정복하여 그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물자와 사람이 돌아다닐 길을 뚫고 다리를 놓고 교역망을 이어서

그 흐름과 방향만 통제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몽골제국의 영역이 되었고,

또한 몽골제국의 한계가 되었다.

그들 방식의 힘과 원칙이 전달되는 곳...

그 넓이가 몽골제국이었고, 전성기 몽골제국의 모습이었다.




11. 몽골제국의 쇠퇴


이러한 제국을 자식들에게 남기면서 칭기스칸은 교훈을 남긴다.


“필요한 말만 하라”

“지도자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보여주어야 한다”

“지도자는 백성이 행복하기 전에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목표에 대한 전망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삶은 물론이고 자신의 삶도 경영할 수 없다”

“자만심을 삼키지 못하면 남을 지도할 수 없다”


“지도자의 전망이 절대 원로들의 가르침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서는 안 된다”

“낡은 옷이 더 잘 맞으며 편하다. 새 옷이나 입어보지 않은 옷은 금방 찢어진다”

“좋은 옷을 입고, 빠른 말을 타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거느리면

 자신의 전망과 목표를 잊기 쉽다. 그런 사람은 노예와 다름없으며 모든 것을 잃는다”


뛰어난 군사력에 기초한 몽골군은 해전과 바다 경영을 제외하고

당시의 전술과 전략에서 몽골군은 절대 패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유한 생산품을 갖지 못한 몽골제국은

늘 새로운 재화를 조달하기 위한 새로운 정복대상이 필요했다.


일본 원정이 실패하고

유럽원정에서 새로운 재화를 얻지 못하고

내부의 권력다툼이 벌어지면서 몽골제국은 정체된다.

지속적인 물자 유입을 위한 외부와의 전쟁이 사라지면서 몽골제국은 분열된다.

그와 함께 칭기스칸의 소박하고, 분명하고, 상식적인 가르침이 무너진다.



저자는 이러한 몽골제국의 쇠퇴에 내부의 권력투쟁과

칭기스칸만한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의 부재와 행정력의 미비를 지적한다.

또한 지배세력의 결정적 변화중 하나를 지적한다.

기독교도의 지도력과 이슬람의 부에 기초해 건강함과 긴장감을 유지했던 지배세력은

라마교를 편애하면서 부패와 사치에 빠졌다는 점이다.

몽골제국은 스스로 종교와 국가의 분리원칙을 포기했다.


시간의 흐름은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가 거세되면서 중국과 이슬람에 동화 돼버린

자기절제가 없는 오만과 지나친 사치를 강요한다.

결국 나약해진 정신세계와 비젼의 부재를 깔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은 모든 제국의 몰락과 궤를 같이하는 비슷한 점들이다.




12. 페스트 - 소통의 단절


그러면 몽골제국의 몰락에 결정적 역할을 저자는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중세 유럽을 암흑으로 몰아넣은 흑사병...

그 페스트의 시작을 중국의 남부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1328년 경 시작된 페스트는 1345년 볼가강 하류의 킵착칸국에 이르고

1348년 이탈리아를 파괴하고, 1350년 아이슬란드까지 전파되었다고 지적한다.

14세기 아프리카 인구는 8,000만명에서 6,000만명으로

아시아의 인구는 2억 3,800만명에서 2억 1,000만명으로

그리고 유럽의 인구는 7,500만명에서 5,200만명으로 줄었다고 지적한다.

그 당시 전 세계 4억명(±5천만명)에서 최소 7,500만명이 흑사병으로 사라졌다.



교역으로 유포되고 창궐한 페스트는 모든 교역, 통신, 운송을 중단시킨다.

페스트는 유럽을 고립시켰을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와 러시아의 몽골인을 중국이나 몽골과 차단했다.

연결이 끊기고 칸국들을 연결시키던 소유관계가 붕괴했다.

인구의 감소는 생산력의 감소를 의미하고 모든 질서의 파괴를 의미한다.


결국 몽골제국의 경제적 바탕인 상업적 국제적 교류와 소통이 끊기면서

화폐제도가 붕괴하고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서 경제제도는 무너진다.

군사적인 힘과 상업적 이득이 사라지고

러시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중동의 몽골제국 지배층은

그들의 언어, 종교, 문화를 따름으로써 새로운 권력과 정통성을 찾아 나갔다.


그나마 유지되던 페르시아와 중국에서도 14세기 중반 무너지고

몽골제국의 지배층 6만명은 지금의 북경을 버리고 몽고로 되돌아간다.

페스트는 몽골제국을 경제적 군사적으로 무장해제 시키고

유럽의 중세봉건주의도 붕괴시킨다.


몽골제국의 붕괴에는 당시 지구를 휩쓸었던 흑사변이 존재했다.



한가지...사족!!!

몽골제국이 바다로 진출했다면...???

유목민의 정서와 기병이 바다로 진출했다면...

그러나 그 당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 그만한 문명과 경제적 부가 있었을까?


소위 지리상의 발견이후 유입된 남아메리카의 은(금)은 유럽을 바꾼다.

이보다 1~2세기 전에도 남아메리카에는 충분한 금과 은이 있었을 것이다.

나침반과 대형선박 건조기술이 있었으면서도 바다로 진출하지 못한 몽골제국...

어쩌면 페스트와는 또 다른 기마족, 유목부족의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13. 칭기스칸


이제 칭기스칸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야 한다.

잠깐, 한 두가지라도 책의 내용을 옮기지 않는다면 서운할테니

몇가지의 인용으로 정리를 대신한다.


먼저 칭기스 칸의 칭은 무슨 말일까?

몽골어 친(chin)은 강하고,

단단하고,

흔들림 없고,

두려움 없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들을 늑대의 후손이라 생각하는 몽골인 주장처럼

늑대를 가리키는 몽골어 치노(chino)와 가까운 단어다.

(로마인들도 자신을 늑대의 후손이라 생각하지?)



이러한 칭기스칸은 당시의 서구인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을까?

1390년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를 들 수 있다.

 

“  이 고귀한 왕의 이름은 칭기스 칸이었으니

   그는 당대에 큰 명성을 떨쳐

   어느 지역 어느 곳에도

   만사에 그렇게 뛰어난 군주는 없었다.


   그는 왕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태어난 신앙에 따라

   스스로 맹세한 법을 지켰다.


   게다가 강인하고, 지혜롭고, 부유했으며,

   누가 보아도 정이 많고 의로웠다.

   그는 약속을 지켰고, 자비롭고, 명예로웠으며,

   그의 감정은 중심이 잡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집은 어떤 젊은 남자 못지않게

   젊고, 생기 있고, 강하며, 전투에서 앞서고자 했다.

   그는 잘생긴 사람이고 운도 좋았으며,

   늘 왕의 지위를 잘 유지하여,

   그런 사람은 달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고귀한 왕, 이 타타르의 칭기스 칸. ”



그리고 당시의 영향력은

로마제국 쇠망사를 썼던 에드워드 기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


“  칭기스칸과 그의 후손들이 지구를 흔들자

   술탄들이 쓰러졌다.

   칼리파들이 넘어졌고,

   카이사르들은 왕조에서 떨었다 ”




14. 칭기스칸 - 근대세계를 열다.


얼마 전 김우중 전대우회장이 입국하면서 세계경영과 칭기스칸을 비교한 언급이 있었다.

결론은 조직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한 개인의 역량에 기초한 발전의 한계였다.

김우중씨와 대우에 대해 공과와 시비를 논하고 싶지는 않으나

불만인 것은 칭기스칸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의 평가절하 때문이다.

(90년대 후반 칭기스칸과 몽골군의 영기들이 대륙을 누비는 모습은

당시 대우의 세계경영 광고 카피였다)


<네루>만큼의 애정은 아니지만

짧지 않은 무미건조한, 그러나 자극적인 이 책을 보면서

우리들의 시야와 안목을 조금은 넓혀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몽골과 칭기스칸에 대한 우리들의 시각과 관점은 꼭 이만큼인지도 모른다.

그런만큼 저자의 주장과 나의 생각들은 주변과 변방을 맴돌지도 모르고...



이 책의 제목은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이지만

세계사가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로 자리 잡고

근대세계로 전화되는 13~14세기의 중심에 칭기스칸과 몽골제국을 끌어 들였고

내게는 충분한 문제제기와 지적영역을 확대시켜 주었다.


그러나 한인간의 일대기와 한나라의 흥망성쇠를 들춰보는 자극들이

역사유적의 탐사와 문화의 이해를 통한 시간의 재배치와 학문적인 탐구를 넘어서

저자의 지적처럼,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일이 되거나,

한 민족이나 한 인간을 위한 과거로 인도될 이유는 없다.

즉 유럽과 서구인에 대항할 아시아의 새로운 영웅의 발견이 중요한 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건 옮긴이의 말처럼 무척이나 궁색하고 진정한 의미를 희석시키는 오류만 만들 것이다.



이 책은 칭기스칸으로부터 시작하여 페스트로 끝나는 몽골제국을 다루었다.

또한 칭기스칸 개인보다는 몽골제국이 미친 영향력을 세계적 차원에서 폭넓게 접근하였다.

그리고 군사력과 폭력성의 무게에 짓눌린 몽골제국의 진정한 힘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은 문명의 지도를 바꾸고,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흥미진진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근대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만들어낸

수많은 맹아들에 대한 역사적 추정일 수도 있다.

수많은 편견들에 대한 도덕적 고백일 수도 있다.

또한 한 인간에 대한 애정을 절제하지 못한 오만한 주장일 수도 있다.



칭기스칸과 몽골제국은 오늘날의 몽고와 몽고인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로마식의 유적이나

이슬람식 종교문화

중국식 전통과 유럽식 생산과학기술...

그 어느 것도...


그러나 13세기에 시작된 몽골제국의 정복활동은 세계사에 충분한 충격을 주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소위 제3의 물결과 21세기의 지식혁명은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거시적인 우주개발이나 가장 미시적인 생명공학을 뛰어넘어

인터넷과 디자인만으로 창작활동을 견인하며 세계경제에 활력을 넣고 있다.


소위 지식혁명이란 상호관계의 영향력을 추적하여

공간의 밀도를 증진시키고 시간을 단축하며, 가치를 이전한다.

13~14세기, 기술과 과학이 없는 유목민인 몽골제국은 문명의 지리적 공간을 확장시키고

사람과 지식을 교류시켰으며, 시장을 넓히고 속도의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쩌면 몽골제국의 성패만큼, 세계사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주민과 농업을 위주로 한 인간과

각 지역에 한정된 문명의 발전과 변화에

노마드 칭기스칸은 인류와 세계를 변화시켰다.

이렇게 세계사에 남긴 몽골제국이 남긴 족적은 결코 간단치가 않다.


역자의 말처럼

“ 칭기스칸은 자신이 뚫은 길 입구에

  시공자로 자기 이름을 적어두는 일에 크게 연연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노마드 답게 ”



분명한 한가지는 칭기스칸과 몽골제국은 위대했다는 점이다.

노마드, 칭기스 칸의 힘은

근대 세계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