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막선원 안거에 바란다

 

 기해년 동안거 한달 보름을 남겨놓고 법보신문에 비장한 기사가 떴다. 25일에는 혹한에 하루 한끼·묵언 정진첫 동안거 야외천막결사” 27일에는 생명 내건 치열함으로 나와 한국불교 바꾸겠다는 제목으로 2건의 기사가 그것이다. 현대불교신문에도 공부하다 죽겠다노천안거라는 제목으로 기사화 되었다. 법보신문이 이틀 간 같은 주제를 2번이나 기사화하는 것이 의아하지만 한편으론 그 만큼 이 사건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기자에게는 있었을 것이라추측해 본다.(불교신문은 보도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전국의 선원에서 이번에 동안거를 지낼 수좌스님들은 천막선원 개원소식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해 하고있다. 요즈음 출가자가 줄어들어 승가대학에서 신입생 모집에 애를 먹고 있고 자연스럽게 참선하는 선방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그 때문인지 어떤 선원은 더 이상 스님들의 방부를 받지 않고 재가자를 위한 템플스테이 장소로 운영되고 있고 어떤 선원은 재가자 선원으로 운영중이다. 기존의 선원에 방부들여 정진을 마음껏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난방을 걱정해야 하는 위례신도시 천막선원에서 정진하려는가 하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기도와 정진은 남모르게 혹은 일생을 두고 유장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에 선방수좌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생경스런 일이다







청규도 의아하다. 동안거 동안 대중전체가 묵언을 실천하고 삭발과 목욕을 금지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멀다. 부처님은 묵언으로 안거를 지내고 온 스님들에게 너희들은 가축이나 염소처럼 살았구나!”라고 야단치시며 대중생활에서 묵언은 악작죄가 된다고 하셨다 보름마다 목욕하는 것을 어기지 말라’는 계목도 보인다. 머리 안깎고 목욕 안하는 것이 도()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중도(中道)의 길이 아니다. 수행은 탐진치를 없애기 위함이지 몸에 고통을 주기 위함이 아닌 것인데 삭발까지 안하겠다고 하니 참으로 의아하다. 이번 안거의 주제는 고행과 인욕인 것인가

?  

 더군다나 결제 기간이 끝나기 전에 천막법당을 벗어날 경우 조계종 승적에서 제외한다는 각서를 제적원과 함께 총무원에 제출한다는 대목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요즘은 출가자수가 줄어들어 걱정인데  정진하다가 하차 했다고해서 오랜 수행생활을 한 스님을 환속시킬 필요가 있을까? 그런 약속 대신에 청규를 지키지 않거나 정진을 포기하면 죽을 날까지 매일 삼천배를 하며 살겠다거나 스스로 공권정지 시키고 수행만 하며 살겠다라는 약속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리라 본다. 이런 약속이라면 '천막정진'보여주기가 아닌 수행자로서 불퇴전의 각오로 정진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보일 것이다.






동안거 한 철만이라도 승가본연의 모습으로 살아보자는 생각은 갸륵하다. 대중이 일종식하며 14시간을 정진하되 좌선과 행선을 번갈아 한다는 것도 부처님 가르침과 맞아 긍정적으로 보인다.허나 승가본연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는 더 고민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승가본연의 모습으로 사는 것은 묵언하고 삭발목욕 안하며 사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추위와 더위를 피할 적당한 수행처를 찾아서 정진하면서 보름마다 포살을 행하며 자신의 허물을 돌아다보아야 한다. 비구라면 마땅히 안거기간에 비구계본으로 포살을 해야한다. 비구계본을 읽으다보면 자신이 그동안 어떤 죄를 짓고 살아왔는지 뼈아프게 뉘우치게 된다. ‘금은과 돈을 받지 말라’, ‘정사를 짓되 규정보다 지나치게 짓지말라라는 계목을 보면 각자 통장의 잔고와 자가용의 가격과 거쳐의 크기가 율장의 규칙과 맞는지 점검하고 반성하게 된다. 비구계목에는 현재 수행자들이 지킬 수 없거나 지켜지지 않는 계율들이 있고 보살계와 양립할 수 없는 내용도 많다. 이러한 계본들이 가진 모순을 수행자 개인에게 맡겨놓지 말고 종단적으로 현실에 맞게 어떻게 다듬어야 하는지도 고민해보기 바란다. 수행자들의 일상 생활지침이 되는 기초적인 규칙들이 혼란스러운데도 이것을 정비하지 않고 한국불교의 쇄신을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목욕과 삭발을 하지않고 해제하기 전에 천막법당을 떠나면 제적원을 제출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과 맞지 않을 뿐아니라 불자와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기 어렵다. 요즘 수행자들 사이에서도 부익부빈익빈의 현상이 심해지고 있는데 이번 9인의 안거자들이 '소욕지족'하는 삶을 살겠다고 대중앞에 맹세하는 것도 한국불교를 변화시키는 행위일 것이다.  

 

또한 수행자는 틈틈이 선지식에게 자신의 공부를 점검 받아야한다. 요즘 한국불교의 수행자들이 스승의 지도없이 혼자 공부하는 것이 큰 폐단이라고 지적받고 있다. 만약 자신의 공부를 점검해 줄 스승이 없다면 부처님이 남기신 경전을 보면서 각각의 삼매를 경험하면 어떤 마음상태가 되는지, 각각의 과위를 얻으면 어떤 번뇌들이 남아있고 어떤 번뇌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지를 살펴서 스스로 점검해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묵언을 할 것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번씩이라도 자신의 수행경험을 털어놓고 경()과 대조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백장암은 이러한 한국불교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보름마다 포살을 하고 일주일 마다 법담탁마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한국불교 새롭게 바꾸겠다는 원력이 있다면 시도해 볼만한 일이다





 

천막선원 대중들이 승가본연의 모습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승가 본연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고행하는 청규를 제정하고 이 것이 승가본연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것 같다. 누구라도 '승가'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승가 본연의 모습도 알 수 없다. 조계종에서 귀의승가를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도 '승가'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한다. ‘승가라는 단어에는 청정, 화합, 귀의, 공덕, 공동체의 의미가 담겨있다. ‘스님들은 비구나 비구니의 번역이다. 전세계 불교국가 어디를 가서 확인 하더라도 승가스님들로 번역하지 않는다. 30년간 조계종에서 살아보니 누구도 승가의 뜻. 승가의 중요성, 승가의 공동체성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종단에서 아직도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가르치고 있고 뻔뻔하게도 스님들(자신들)께 귀의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귀의승가는 법정스님이 제안하신대로 청정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로 변경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에 선배스님을 모시고 오랫만에 전라도와 경상도 사찰을 돌아보는 만행을 하였다. 선원에서 공부하는 스님이라고 밝혀도 객승(客僧)에게 잠자리를 내주지 않았고 주지스님이 혼자서 절을 지키고 있는 사찰이 많았다. 수행자는 숙박을 할 수 없고 돈을 내고 템플스테이를 하는 재가자들은 환영을 받는 세상이 되었다. 안면이 있는 스님을 만나거나 가난한 사찰에서는 그래도 방을 내어 준 반면 사찰의 규모가 크고 전각이 화려한 부자인 절에서는 오히려 재워주지 않았다. 자신들 편이면 종법(宗法)을 지키지 않아도 징계하지 않고 자신들을 비판하면 '해종'이라는 딱지를 붙여 징계하는 종단의 현실과 닮아보였다. 절도죄로 감옥에 갔던 스님이나 그를 말사주지에 임명한 본사사주지는 징계받지 않고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들이 나타나게 된 근본 원인중의 하나는 스님들이 '승가에 귀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번에 천막선원에서 목숨을 걸고 정진하는 9명의 스님들이 설사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박하게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 해제무렵이면 ‘청정한 승가에 귀의합니다!’ 라는 한마디를 가슴으로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막선원에서 정진하던 열정으로 다른 종회의원들을 설득하여 청정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로 삼귀의를 변경시키는 노력을 시작하길 바란다청정한 승가에 귀의합니다’가 가슴에 새겨지면 지금보다는 더 계율을 지키려 노력하고 대중을 모시고 검소해지려는 노력을 하게될 것이다.




법보신문 기사보기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7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