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 서울 개운산 보타사 '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의 아침은 밝아왔다. 설레는 마음
을 진정시키며 서울 장안을 중심으로 절 투어 코스를 아름답게 짠 다음, 초파일 오전 길
을 나섰다.

우선 청량리 뒷쪽 회기동(回基洞)에 자리한 연화사(蓮華寺)와 월계동(月溪洞)에 있는 기
원사(祈願寺, ☞ 관련글 보러가기)를 찾아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탱화를 말끔히 챙겨보
고 초파일의 꿀재미인 공양밥과 떡도 든든히 챙겨 먹었다. (너무 배불리 먹어서 며칠 동
안 밥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음) 그런 다음 안암동 개운사(開運寺)로 이동하여 그곳을
둘러보고 그 부근에 자리한 보타사로 넘어갔다.

보타사는 개운사에서 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구석진 숲속에 묻혀 있는데 나와 같은 서
울 하늘 밑에 있음에도 10여 년 전에 딱 1번 가본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이번에 억지로
인연을 갖다 붙여 그곳을 다시 찾았다. <그곳에 깃든 마애보살좌상과 금동보살좌상이 국
가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도 인연을 다시 이어붙이는데 크게 한몫했음>

개운사 주차장 동문을 나와 주택가를 지나면 그 골목길의 끝에 보타사 정문이 나오고 그
문을 들어서면 대원암이 가장 먼저 마중을 한다.


▲  활짝 열린 보타사 정문


♠  개운사의 부속 암자로 석전 박한영과 탄허가 주석했던 유서 깊은 현장
~ 안암동 대원암(大圓庵)

보타사 정문을 들어서면 양반가 기와집처럼 생긴 한옥이 제일 먼저 모습을 비춘다. 이곳이 초
행이라면 이것이 보타사인가 싶어 마음이 설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함정이며, 그의 정체
는 개운사의 부속암자인 대원암이다.
보타사를 가리고 앉은 대원암은 큰 기와집 1동이 거의 전부인 아주 단촐한 절로 암자(庵子)란
이름에 가장 충실한 규모를 하고 있는데, 그 옆에는 중앙승가대학 동문회 건물이 우뚝 자리하
여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대원암은 1845년 지봉선사(智峰禪師)가 창건했다. 그는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법명(法名
)은 우기(祐祈)이며, 효성이 깊고 인품이 넉넉했다고 한다. 북한산(삼각산) 도선사(道詵寺)에
서 인파당 축홍(仁波堂 竺洪)에게 사사하여 그의 법을 이어갔으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도 친분이 있어 그에게 판서(判書)직을 받은 적이 있었다. 바로 그 연유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지봉판서라 불렀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개운사의 그늘에 가려진 암자이지만 20세기 큰 승려로 추앙 받는 석전 박한
<石顚 朴漢永, 법명은 정호, 영호>과 탄허(呑虛)가 주석하여 불교 교육과 역경사업을 벌였던
유서 깊은 현장이다.
박한영(1870~1948)은 근세 한국 불교 3대 강백(講伯)의 하나로 불교와 유교, 노장사상, 한시(
漢詩), 서법(書法) 등 이른바 유불선(儒佛仙)에 통달했던 당대 제일의 석학이다. 그 시절 제일
가는 지식인으로 손꼽혔던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조차도 '나는 누구에게도 물어볼 것이 없
는데, 석전 선생한테는 물어볼 것이 있다'
며 그에게 만큼은 한 수 접어주었다. 고수가 고수를
알아본 것이다.

석전은 전북 완주(完州) 출신으로 19세에 전주 인근 위봉사(威鳳寺)에서 출가를 했다. 스승인
금산에게 '정호(鼎鎬)'란 법명을 받았으며, 26세에 순창 구암사에 들어가 설유의 법통을 받고
법명을 영호(暎湖)라 했다.
27세부터 법주사(法住寺)와 해인사(海印寺), 범어사(梵魚寺)에 들어가 강의를 했고, 선운사(禪
雲寺)의 큰 승려인 백파(白波)의 선맥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그의 호를 따 '석전'이라 했다. 석
전은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백파에게 우정의 뜻으로 선물한 호이다.

1910년 이후, 만해 한용운(韓龍雲)과 이 땅의 불교를 지키고자 노력을 기울였고,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 조선 불교를 왜열도 조동종(曹洞宗)에 통합하려는 만행을 저지르려고 하자
이를 막았다. 1913년에는 불교잡지인 '해동불교(海東佛敎)'를 창간해 왜정(倭政)의 조선불교
왜식화(倭式化)를 강하게 비판하고 왜의 대한제국(大韓帝國) 강제 합방을 규탄했으며, 불교의
혁신을 강조했다. 그리고 1919년 한성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도 큰 활약을
보였다.

1926년 대원암에 들어와 이곳의 조실(祖室)로 지내면서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해 불교 교육에 나
섰다. 그러자 승려 뿐 아니라 많은 문학가와 지식인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그의 가르침을 받았
는데, 그중에는 신석정(辛夕汀), 조지훈(趙芝薰), 뒷끝이 영 좋지 못했던 서정주(徐廷柱)와 이
광수(李光洙) 등이 있었다.
그중 왜정과 독재정권에 심하게 아부를 떨어 주옥 같은 작품을 무색케 하였던 서정주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서울중앙고보(중앙중고교)와 고창고보에서 퇴학을 당하여 방황하고 있었는데
그를 중앙불교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로 데려와 제자로 기른 이가 바로 석전이었다. 그 인연
으로 둘은 각별한 사이가 되었고 서정주는 그를 '내 뼈와 살을 데워준 스승~'이라 찬양하며 평
생 은혜를 갚지 못함을 아쉬워 했다고 한다. 하여 석전이 남긴 한시 130수를 한글로 번역해 그
원고를 가지고 있다가 2006년에 비로소 공개되었다. <석전은 서정주의 친일짓거리와 친독재행
위를 보며 지하에서 피눈물을 바가지로 흘렸을 것이다>

또한 그의 문하에는 20세기 중/후반 이 땅의 불교계를 이끈 운허와 지관 등 이름 높은 승려들
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우리나라 불교 학승(學僧)의 대부분이 그의 배움을 이어갈 만큼 불교계
의 큰 줄기를 형성했다.

1945년 이후, 조선불교 중앙총무원회 제1대 교정을 지냈고 1946년까지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
을 지냈다. 이후 정읍 내장사(內藏寺)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48년 열반에 들었다.
그는 많은 한시와 수필을 남겼는데, 최남선이 그의 작품을 '석전시초(石顚詩抄)','석림수필(石
林隨筆)','석림초(石林抄)' 등 9권의 책으로 정리했으며 수필도 500여 편이 남아있다.

▲  대원암 어칸(가운데 칸)과 현판

▲  조그만 석불과 탄허 역경(譯經) 기념비
(가운데), 그리고 석전 박한영 기념비


대원암을 거쳐간 2명의 큰 승려 중 마지막인 탄허(1913~1983)는 전북 만경(김제) 출신으로 원
래 이름은 김금택(金金宅)이다. 법명은 택성()이며, 최익현(崔益鉉)의 제자인 이극종에게
한학을 배워 도학에도 능했다.
15살에 도(道)에 대한 답을 얻고자 고승 한암(漢岩, 1876~1951)과 서신문답을 주고받았고, 그
인연으로 하여 1934년 한암이 머물던 오대산 상원사(上院寺)를 찾아가 출가하여 그의 열성 제
자가 되었다.

이후 월정사 조실과 연수원장을 지냈으며, 1964년부터 1971년까지 동국대 대학선원 원장을 지
냈고 1967년 조계종 중앙역경원 초대원장이 되어 대원암에 머물며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큰
임무를 완수하기도 했다.
그는 동양철학에도 해박하여 왜열도와 대만에서 화엄학 등을 강의했으며, 대만대학교에서 비교
종교에 대한 특강으로 세계적인 석학으로 찬양을 받았다. 말년에는 월정사(月精寺)에서 지내다
가 1983년 70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으며, 나라에서는 그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  숲속에 자리한 보타사와 주차장

대원암을 지나면 삼삼하게 닦여진 숲이 펼쳐진다. 이곳은 안암동(安岩洞) 주택가 바로 옆으로
녹음이 짙은 나무들로 완전 그늘을 이루고 있어 마치 첩첩한 산속의 암자나 신선의 산중(山中)
거처를 찾은 기분이다. 개운사에서 아주 잠깐 이동했을 뿐인데 주변 풍경화는 이렇게나 180도
달라졌다.

햇살도 거의 들어오기 힘든 그 숲속에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있고 그 너머로 석
축을 쌓고 터를 다진 보타사가 마치 별장 같은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연등이나 보물 지정 경
축 현수막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과연 절집인지 고개 조차 갸우뚱했을 것이다.
주차장 옆에는 키도 제각각인 중창 송덕비와 사적비 등 비석 4기가 서 있고 그 옆에 아기자기
하게 꾸며진 반원(半圓) 모양의 작은 연못이 장차 다가올 연꽃의 향연을 숨죽여 준비한다.

▲  보타사 송덕비와 사적비

▲  계단 끝에 자리한 일주문

주차장에서 보타사로 인도하는 계단에는 고운 연등이 길게 드리워져 초파일 분위기를 한층 고
조시키고 있다. 그 계단을 올라서면 보타사 현판을 머금은 일주문(一柱門)이 중생을 맞이하는
데, 일주문이라고 하지만 그냥 주택 대문에 기와 지붕을 얹힌 모습이다.


▲  숲속 막다른 곳에 자리한 보타사


♠  개운산(開運山)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조그만 산사, 겉은 작아도
보물급 문화유산을 2점이나 품은 실속파 절집 ~ 안암동 보타사(普陀寺)

▲  보타사 대웅전(大雄殿)

개운사 동쪽 그늘진 곳에 비구니 절인 보타사가 살포시 자리해 있다. 대원암과 더불어 개운사
의 부속 사찰로 경내가 숲에 완전히 감싸여 있어 바깥에서는 거의 보이질 않으며 나무들이 무
성해 속세의 온갖 기운과 소음을 거의 털어버린다. 그러다보니 늘 번잡한 안암동 대학가가 지
척임에도 고적하고 아늑한 산사(山寺)의 분위기가 진해 그야말로 매우 조용하다는 뜻의 '절간
답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보타사는 개운산(안암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다. 서남쪽을 제외하면 모두가 막혀버린 궁
색한 곳으로 경내 동쪽과 남쪽은 고려대로 막혀있고, 북쪽은 벼랑으로 완전히 막혀 있으며 그
벼랑 윗쪽에 개운산의 남쪽 허리를 가르는 북악산로가 흘러가 차량의 소음이 조금씩 전해진다.
그리고 서쪽에는 고려대 안암학사가 있다.

이 절은 원래 20세기 중반 불교전문강원과 중앙승가대학의 기숙사로 출발했다. 허나 1911년 2
월 경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마애보살좌상 옆에 맞배지붕 건물이 보인다. 하여 개운사나 대원
암에서 마애불 관리를 위해 닦은 조그만 건물이 이전부터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기숙사 건물을 손질해 칠성암(七星庵)이란 간판을 내걸었고 1980년대에 보타사로 이름을
갈아 마애불과 금동보살좌상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으며 절을 꾸리고 있다.

처음에는 개운사의 부속 암자로 조용히 묻혀 지냈고, 마애불 또한 부근 사람만 찾아올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하지만 낭중지추(囊中之錐)란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결국 세상에 그 모습
을 드러내게 된다. 1992년 서울문화사학회가 서울에 숨겨진 문화유산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그
가 발견되었고, 단순히 오래된 존재로만 구전되어 오던 상태였으나 조사 결과 고려 후기에 조
성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바로 이듬해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고, 2014년에는 국가 보물로 흔쾌히
승진까지 했다. 또한 요사에 봉안된 금동보살좌상은 이 땅에 흔치 않은 유희좌(遊戱坐) 스타일
로 그도 서울 지방문화재로 있다가 2014년 3월 보물로 승진되어 같은 해에 무려 보물급 문화재
를 2개나 거느리게 되었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요사, 선방 등 3~4동의 건물이 있으며, 마애보살좌상과 금동보살좌
상 등의 빵빵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절이 매우 소소한 모습이라 눈에 별 부담 없이 살
필 수 있으며 숲에 묻힌 벼랑 밑도리로 깊은 산중에 들어선 기분을 들게 하여 이곳이 서울 한
복판임을 순간 잊게 한다. (현재 새 건물을 짓느라 경내가 좀 어수선함)


▲  대웅전 앞에 차려진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일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마애불과 벼랑이 있고, 오른쪽에는 새로 지은 선방(禪房), 왼쪽에는
대웅전과 요사가 자리해 있다.

대웅전 앞에는 초파일을 맞이하여 오랜만에 외출 나온 아기부처가 화사하게 꾸며진 꽃밭 가운
데에 서 있다. 바로 중생들에게 관불의식을 받고자 함이다. 하지만 절을 찾은 중생이 별로 없
다보니 관불 수요도 저조하여 거의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좀 있으면 다시 어두컴컴한 창고에
봉인되어 1년을 갇혀 지내야 되는데 저녁이 다가옴에 따라 사람들 발길도 줄어드니 아기부처와
돈을 좋아하는 불전함의 마음은 그저 타들어갈 뿐이다. 그들에게 초파일 해는 너무 짧다.
 
아기부처상 앞에는 파라솔을 지닌 동그란 탁자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누구든 먹을 수 있도
록 떡(절편)과 수박이 놓여져 절의 훈훈한 초파일 인심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들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비구니들이 바로 채워놓아 먹거리가 마르지를 않는다. 나도 떡과 수박을 수없이 집어
먹으며 이른 저녁 배를 채웠다.


▲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대웅전 석가불

보타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불단(佛壇)에는 금색 찬란한 석가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근래에 조성되어 피부가 아
주 탱탱하며, 변색된 부분이 없는 순 100% 금동색으로 그의 광배(光背)는 마치 이글이글 타오
르는 모습 같다.
볼살이 많아 보이는 그의 온후한 표정에는 미소가 깃들여져 중생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데, 그
뒤에는 그 흔한 후불탱을 두지 않고 환하게 창문을 내어 마애보살좌상이 보이게끔 하였다. 그
러니까 마애불이 일종의 후불탱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불상 앞에는 중생들이 진상한 과일과 꽃, 쌀로 상에 금이 갈 지경이며, 건물 좌측 벽에는 석가
의 설법 장면을 담은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와 법당 수호용인 신중도(神衆圖)가 걸려있다. 이
들은 20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피지 못했다.


▲  온갖 호법신(護法神)들이 그려진 신중도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위태천(韋太天) 등 온갖 호법신들이
복잡하게 담겨져 그야말로 정신을 다 빼놓는다.

▲  후불탱의 황금 자리를 버리고 옆으로 비켜 선 영산회상도

◀  경내 좌측에 자리한 선방과 쉼터
선방은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전통 찻집이나
여염집 한옥 같은 분위기이다. 그 앞에는
탁자와 의자를 두어 녹차 등을
제공하고 있었다.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8호

대웅전 뒷쪽 벼랑에는 보타사의 2대 꿀단지의 하나인 마애보살좌상이 깃들여져 있다. 마애불(
磨崖佛)이 고된 몸을 기댄 화강암 벼랑은 거의 80~85도 각도로 그 윗쪽에는 암벽이 눈썹바위
마냥 앞으로 짙게 튀어나와 자연산 모자나 보개(寶蓋)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바로 그 윗쪽에는
개운산의 남쪽 허리를 가르는 2차선 북악산로가 닦여져 있어 차량 소리가 가늘게 들려온다.

이 마애불은 오랫동안 개운산의 은자(隱者)로 이곳에 살짝 은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2년
서울문화사학회에 의해 강제로 발견되었다. 어떤 자료에는 발굴했다고도 하는데 그는 이미 바
깥에 노출된 상태였으므로 발견이 맞을 것이다. 서울 굴지의 오래된 절인 개운사가 바로 지척
이고 그 그늘에 조그만 것도 아닌 커다란 마애불이 수백 년을 숨어왔으니 그의 숨바꼭질 실력
은 참으로 대단하다.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발견된 이듬해(1993년)에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89호로 지정
되었으며, 2014년 3월 경내에 있는 금동보살좌상이 보물로 지정되자 그 여세를 몰아 그해 7월
보물로 승진되었다.

마애불의 높이는 대략 5m, 폭은 4.3m로 감정 결과 고려 후기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그 생
김새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는 홍은동 옥천암(玉泉庵) 마애보살좌상(보도각 백불)을 너무나
닮았다. 보관(寶冠)은 좀 틀리지만 얼굴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하얀 피부까지 옥천암의 그것과
다소 비슷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옥천암 마애불 역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같은 사람이 조성하거나 모방하여 만들
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며, 고려 후기 서울 변두리에서 아주 잠깐 나타났던 마애불 형식으로 진
정한 서울 스타일의 고려 마애불이다. 놀라운 것은 이런 마애불은 천하에서 서울에 딱 2곳 뿐
이라는 것이다.


▲  옆에서 바라본 마애보살좌상

마애불의 모습을 살펴보면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좌우로 관대(冠帶)가 나와있고
그 밑에 보관 장식이 늘어져 있다. 오른쪽 관대 밑에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긴 장식이 눈에
띈다. 하얀 얼굴은 약간 볼살이 있어 보이는데,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그 눈썹 사이에
백호가 찍혀 있으며, 검은 두 눈은 지그시 뜨고 있다. 코와 입은 좀 작은 편이며, 입술은 붉은
색이나 빛이 좀 바래있고 귀는 보관 장식에 가려져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왼쪽 가슴을 가로지르는 스
카프 형태의 천의(天衣)가 밖으로 흘러나오도록 표현되어 있다. 왼쪽 팔은 몸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표현되어 괴물 팔처럼 보이는데, 팔찌를 낀 왼손은 무릎 밑까지 내려와 있으며, 엄지와 3
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그리고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올려 엄지와 2번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옷 주름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고, 두 다리는 포개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으며 두 발은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  마애보살좌상 옆에 새겨진 원패(圓牌)

마애불 어깨쪽 좌우에는 네모나게 구멍이 파여 있다. 이는 자연산 구멍이 아니라 불상을 지켜
주던 목조 건물이나 보호각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마애불에 대한 기록
이 부실하여 언제 지어지고 어떤 모습을 취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부족한 상상력을
꺼내본다면 옥천암 마애보살좌상(보도각 백불)처럼 앞으로 조금 튀어나온 형태가 아닐까 싶다.
마애불은 바로 그것을 갑옷으로 삼아 온전하게 남았고, 건물은 장대한 역사의 거친 흐름 속에
형편없이 녹아버려 이렇게 상처 만이 남았다.

불상 왼손 쪽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네모난 공간이 있는데, 이를 원패라고 부른다. 이 원패는
마애불 제작 당시<또는 조선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데, '南無金剛會上佛菩薩(나무금강회
상불보살)'이라 쓰여 있다. 원패란 부처나 보살의 이름을 적어 불단 앞에 놓는 것으로 마애불
옆에 새겨진 점이 꽤 이채롭다.

현재 마애불은 하얀 피부의 백불이지만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하얗게 호분(胡粉, 여
자들이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하던 것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듬)이 칠해진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며 그로 인해 몇몇 부분은 확인이 어렵게 되었다. 참고로 그의 친척뻘인 옥천암 마
애보살좌상은 19세기에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가 호분을 칠했다고
전한다.

하나같이 거대하고 개성이 강한 수많은 석불과 마애불이 등장했던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마애불
로 그가 아무리 장대하다 한들, 초파일을 맞이하여 허공을 가득 수놓은 연등의 물결 앞에선 별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연등이 그 앞에 진하게 아른거려 제 모습을 담기가 어려웠다.

마애불의 밑도리와 팔에는 중생들이 무심히 얹혀놓은 동전들이 수북한데 가히 1만원은 넘을 것
이다. 저 돈이야 다 뻔한 데로 가겠지만 부디 속세의 어두운 구석을 위해 쓰기를 바란다. 그게
마애불의 지극한 뜻이자 그의 존재의 이유이다.


▲  마애보살좌상의 얼굴과 자연이 그에게 씌워준 자연산 돌모자
어깨 옆에 파인 홈은 지금은 전설이 되버린 보호각의 아련한 흔적이다.

▲  마애보살좌상의 아랫도리
오른쪽 발은 발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했으며, 왼쪽 발은 오른쪽 발에 가려져 있다.

▲  보타사 요사(선방)

대웅전 옆에는 여염집 모습의 요사가 자리해 있다. 선방과 종무소(宗務所)의 역할까지 도맡고
있는 건물로 예전에는 중앙승가대학 숙소로 사용되었는데, 저 안에 보타사의 나머지 꿀단지가
들어있으니 꼭 들어가보자. 다행히 절 사람들은 그것을 보여주는데 다소 호의적인 편이라 사진
촬영에도 흔쾌히 협조를 해준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면 종무소 공간이 나오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조그만
금동불이 봉안된 불단이 나올 것이다. 그 불상은 포즈도 참 특이한데, 그가 바로 마애보살좌상
과 더불어 보타사의 2대 꿀단지의 하나인 금동보살좌상이다. <현재 기존 건물을 부시고 새 건
물을 짓고 있음, 금동보살좌상의 거처도 임시로 변경된 상태, 친견 가능 여부는 절에 문의 요
망>


▲  유리막에 봉안된 금동보살좌상과 붉은 색채의 후불탱

▲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 보물 1818호

요사 불단에 봉안된 금동보살좌상은 이 땅에 흔한 불상이나 보살 스타일이 아니다. 오른쪽 다
리는 의자에 올려 무릎을 세웠고, 왼쪽 다리는 밑으로 내린 모습이기 때문이다. 딱 보면 아줌
마 스타일의 착석 방법과도 비슷한데, 불상(보살상)의 이런 포즈를 유희좌(遊戱座)라고 한다.

유희좌는 9세기 이후 북송(北宋)시대부터 생겨났으며, 이 땅에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중기
에 가뭄에 콩 나듯 조금씩 생겨났다. 그러다보니 매우 귀한 실정이라 그 가치는 대단할 수 밖
에 없다. 바로 그것이 현대 사찰 보타사에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보살상이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제자리가 어디였는지는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며, 보살상 또한 굳게 입을 다물며 진술을 거절한다. 아마도 이리저리 떠돌아다
니다가 중앙승가대학으로 흘러들어와 기숙사 불단에 봉안되었고, 이렇게 보타사의 마르지 않는
꿀샘이 되어 우리 앞에 자리해 있는 것이다.

앞서 마애보살좌상이 좀 남성적이라면 이 보살상은 여성적이다. 고품격과 미색(美色)이 느껴지
는 그의 정체는 딱 봐도 관음보살(觀音菩薩) 누님인데, 덩치는 조그만하고 머리에는 황제의 금
관을 유린시킬 정도로 장엄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칼이 조금 나와있다.
얼굴은 아리따운 여인네처럼 곱기 그지 없어 은근히 마음을 설레게 하는데, 카메라도 그를 보
고 흥분을 했는지 셔터가 마구마구 눌러진다. 불상은 보통 당시 귀족이나 특정 인물의 얼굴을
모델로 하여 조성한 경우가 적지 않아서 아마도 이쁘장하게 생긴 젊은 귀족이나 중년층 여인을
모델로 삼은 듯 싶다.
그의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지그시 떠 있으며 코는 작고, 입술은 작지만 어여쁜 모
습이다. 볼에는 살이 조금 있어 보이며, 가슴에는 온갖 장식물을 달고 있다. 어깨에는 천의(天
衣)를 걸치고 있고 그 한 자락을 수직으로 늘어뜨렸는데, 이는 조선 초기 보살상에서 조금 등
장하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그가 앉아있는 연화좌(蓮花座)는 보타사에서 마련한 것이라 오래된
것은 절대 아니다.


▲  유리막의 눈치를 피하고자 옆에서 담은
금동보살좌상의 위엄~~!


보살상의 예사롭지 않은 모습과 조그만 불상이 많이 등장하는 조선 초기 금동상 중에서 그나마
규모가 큰 점으로 보아 조선 초 왕실이나 귀족에서 발원하여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비
록 고향은 잃었지만 건강 상태는 양호하며, 조선 초기 귀족적인 보살상의 형식을 보여주는 대
표적인 케이스이자 조선시대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어 2006년에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 216호
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3월 보물로 특진되었다.
이처럼 귀한 몸이니 보타사에서 유리막을 설치해 그에게 손도 되지 못하게끔 했는데, 어찌보면
유리 감옥에 갇혀있는 듯 답답하게 보이기도 한다. 허나 어찌하랴?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사처
럼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런걸 바로 필요악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절 사람들이 별 거부감 없이 속세에 쿨하게 공개를 하고 있고 사진 촬영에도 호의적이
니 그것으로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보살상 뒤에는 붉은 색채로 이루어진 후불탱이 그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고, 불단 바닥도 순 빨
간색이라 주변이 너무 화사하다.


▲  금동보살좌상 보물지정서의 위엄
난생 처음으로 본 문화재 지정서, 문화재청이 금동보살좌상에게 달아준 일종의
훈장이다. 허나 그의 희소 가치를 본다면 저 정도 종이 문서와 보물 등급도
너무 부족해 보인다.

▲  연등의 배웅을 받으며 보타사를 떠나다 ~~

보타사를 정신없이 둘러보니 어느덧 18시가 넘었다. 인근 개운사에서 18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고적한 이곳까지 울려 퍼진다. 그만큼 서로는 가까운 거리이다. 이제 햇님이 퇴근하고 어둠의
커텐이 내려오면 우두커니 하늘을 가리던 연등도 제몸을 불살라 어둠을 몰아내고 연등의 이름
값을 할 것이다.

정말 벌처럼 날라가 콩을 볶듯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초파일 하루, 많은 절을 답사하면서 공양
밥과 다양한 먹거리, 문화유산, 괘불(掛佛), 초파일 분위기를 마음껏 누렸다. 이날만큼은 왜이
리 해가 짧은지 퇴근 본능이 발동한 햇님을 계속 중천에 붙잡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목적한 바를 거의 이루며 하루를 정말 야무지고 알차게 보내 마음은 뿌듯하다. 이리하
여 보타사를 끝으로 초파일 절투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안암동 보타사 찾아가기 (2017년 5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안암역 2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서면 바로 안암역교차로이다. 교차
  로에서 동쪽(북쪽) 길(개운사길)로 3~4분 가면 개운사 일주문인데 그 앞에 보타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그의 안내를 따라 가면 된다. 안암역에서 도보 10분
* 서울시내버스 273, 1111, 2115번을 타고 안암역에서 하차하여 도보 10분. (2115번 서경대 방
  향은 개운사입구에서 하차, 중랑차고지 방향은 안암역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8
(개운사길 60-46 ☎ 02-923-4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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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5월 1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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