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류순정의 후처, 평창이씨묘
류순정 묘와 류홍 묘역 중간 언덕에 류순정의 부인인 평창이씨의 묘가 홀로 자리해 있다. 동그란 봉분과 상석, 키 작은 귀여운
모습의 문인석 1쌍, 조그만 묘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에서는 류홍 묘역 일원과 류순정 묘역, 그런 묘역을 둘러싼 금강수목
원아파트, 천왕산이 훤히 시야에 들어와 위치 하나는 좋다.
2. 뒤쪽에서 바라본 평창이씨묘
3. 앙증맞은 연꽃봉오리 모양의 지붕돌을 지닌 평창이씨묘표
4. 눈이 유난히도 크고 귀여운 문인석 (평창이씨묘)
5. 평창이씨묘에서 바라본 류홍 묘역 일원 (제일 꼭대기에 류홍 묘가 있음)
6. 류홍 신도비(왼쪽)와 류사필 묘갈(오른쪽)
7. 류사필 묘갈 - 류사필은 류홍의 아들이다.
8. 류순정 묘에서 바라본 류홍 묘역
9. 류순정묘
이곳 묘역의 시조인 류순정(1459~1512)은 자는 지옹, 호는 청천이며, 아버지는 류양(유양), 어머니는 정집의 딸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으며 무예에도 능하여 무인 중에서 그와 대적할 자가 별로 없었다고 전한다.
1487년 진사로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전적이 되었으며, 훈련원정으로 전라도 해안을 공격한 왜구를 토벌, 포획
하였다. 1491년 함경도평사로 도원수 허종의 막료가 되었으며, 이후 평안도평사를 역임했다.
연산군 시절에는 사헌부헌납으로 임사홍의 죄를 논박하고, 평안도절도사 전림의 권력 남용을 추궁했으며, 북쪽 여진족 문제에
대한 대책을 올렸다. 이후 홍문관교리가 되었고 문인이지만 활솜씨가 좋아서 부응교에 임명되기도 했다.
의주목사가 되어 압록강 이북의 야인을 공격했을 때 도원수 종사관이 되어 적정 탐지에 공을 세웠으며, 군자금 확보와 성곽 수
축 등 군비 강화에도 힘썼다. 1503년 공조참판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왔으며, 이듬해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연산군
의 밤사냥을 간언하다가 임사홍의 모략으로 추국을 당하기도 했다.
1506년 박원종, 성희안이 반란을 획책하자 거기에 류순정 부자가 가담, 소위 중종반정을 일으키고 정국공신 1등에 자리를 얻었
으며, 덩달아 청원부원군과 숭정대부란 감투까지 받았다.
병조판서가 되어 영경연사를 겸임해 폐지된 경연 부활을 건의했으며, 얼마 뒤 우의정과 병조판서를 겸임했다. 1507년 이과 등이
견성군을 추대해 모반을 꾸미자 이들을 때려잡은 공로로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508년 평안도 인산, 강계 지역에 둔전을
설치했으며, 좌의정이 되어 박영문과 유담년을 포도대장으로 삼아 인천과 김포, 통진 일대에서 설치던 도둑을 처리하고 유민의
안집책을 마련했다.
1510년 경오왜변(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가 되어 군사를 총괄했으며, 도원수가 되어 1512년 삼포왜란을 평정하고 각 포
구에 비왜방략을 마련했다. 이때 대간들로부터 제물을 축적했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오히려 군공을 인정받으면서 영의정에 올랐
다.
허나 영의정이 된지 2개월 뒤 병사하자 중종은 크게 슬퍼하고 문정이란 시호를 내렸다. (문정이란 시호는 나중에 성렬로 변경됨)
또한 오류동과 온수동, 작동, 여월동 지역에 300만 평의 땅을 내렸다.
그 넓은 땅은 후손들이 처분하거나 개발의 칼질 등으로 적지 않게 넘어갔으며, 심지어 류순정 묘 뒤와 옆까지 아파트까지 들어
서 적지않게 옥의 티를 선사하고 있다.
10. 아름다운 무늬를 지닌 류순정 묘표
11. 뒤쪽에서 바라본 류순정묘
12. 류순정묘의 키 작은 동자석 - 류순정묘는 묘표와 상석, 동자석 1쌍, 망주석 1쌍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