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절부암

용수리 해안에는 절부암이라 불리는 바위 절벽이 있다. 제주도의 숨겨진 명소의 하나로 인지도는 낮으나 이곳에 서린 애듯한

이야기는 속인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
19세기 후반에 19살 먹은 강사철과 고씨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비록 어렵지만 열심히 삶을 꾸려가고 있었는데, 남편(강사철)

이 마을 사람들과 차귀도로 건너가 대나무를 베고 돌아오던 중, 갑작스런 풍랑으로 배가 침몰해 사망하고 말았다. (고기잡이

를 나갔다가 풍랑을 만났다고도 함) 그때는 고씨와 혼인을 한지 겨우 며칠도 안된 상태였다.

고씨는 애통한 마음에 식음을 전폐하고 남편의 시신이라도 찾고자 며칠동안 해안가를 돌아다녔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하여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 현재 절부암 절벽(엉덕동산) 숲에서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행방이 묘
연하던 남편의 시신이 고씨가 자살한 바위 밑으로 홀연히 떠오른 것이 아닌가.
이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중원대륙의 조아의 옛일 같다고 찬탄을 했으며, 그 소식을 들은 신재우는 자신이 과거에 붙으면 이

들 부부의 제사를 책임지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며 바다를 건너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낙향을 하다가 답답한 마음에 점집에 들려 점을 치니 점쟁이는 한 여인이 따라다니고 있으니 잘 모시라고 이야기를 했다. 고

향(제주도 대정)으로 내려와서도 그 여인이 누군가 골똘히 생각하던 중, 우연히 고씨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그 여인이 그 고

씨임을 눈치챘다. 하여 고씨 부부 묘에 참배하고 다시 과거에 도전하여 드디어 급제했다.

신재우는 1866년 대정판관을 제수받아 고향으로 내려와 부부의 묘를 인근 당산봉(고산봉)으로 옮기고, 고산과 용수 두 마을

에 100냥을 지원해 매년 음력 3월 15일마다 제를 지내도록 했다. 또한 고씨가 자살한 절벽을 절부암이라 이름지었다.
왜정 때는 제사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나 마을 부인회가 중심이 되어 다시 돈을 모아 절부암전을 마련해 그 소출로 매년 꾸

준하게 제를 지낸다.



2. 절부암 앞 용수리포구

절부암은 해안 절벽으로 그 앞은 바다이다. 허나 바로 앞에 산책로가 닦여 바닷물은 더 이상 절부암 밑까지 들어오지 못하여

절부암 앞바다에는 도로가 생기고 조그만 항구가 생겨 주변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게다가 절부암 뒤쪽에도 집들이 마구 들

어서 절부암의 공간이 많이 줄어든 느낌이다.


3. 상석과 향로석으로 이루어진 절부암 제단 - 절부암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4. 울퉁불퉁, 세월을 너무 간지나게 탄 절부암 바위


5. 절부암 바위에 새겨진 글씨들 - 절부암 제사를 주도하는 단체 사람들의 이름들이 적혀있다.



6. 절부암 바위글씨의 위엄

감동 김응하가 글을 쓰고 동수 이팔근이 새긴 것으로 전서체와 예서체를 합친 듯한 아주 독특한 글씨이다. 절부암이면서도

아닌듯한 저 아리송한 글씨.



7. 대정판관 신재우의 글씨 - 지금의 절부암을 있게 한 신재우가 절부암을 조성하면서 남긴 글씨이다.


8. 절부암 앞 산책로 - 산책로 조성으로 바다와 살을 댔던 절부암은 바다와 아주 조금 떨어지게 되었다.



9. 용수리포구에서 바라본 절부암 - 절부암 바로 뒤쪽까지 집들이 마구 들어서 적지 않게 옥의 티를 선사하고 있다. 굳이

저렇게까지 집 허가를 내줬어야 했을까? 잘못된 위정자들로 인해 지나친 개발의 난도질로 망가지고 있는 제주도의 현주소

를 보는 듯 하다.



10. 용수리포구에서 바라본 절부암 일대